유난히 굵직한 사건들이 많은 해였다. 북아일랜드의 데리에서 영국군 낙하산부대가 공화주의자들의 근거지 지역에 진입하여 시민권을 주장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해 14명이 사망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었다.
미국에서는 반전운동이 격화되고 미국의 마지막 지상 전투 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군했다. 남베트남의 패망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뮌헨에서는 검은 구월단에 의한 올림픽촌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과 중국의 국교단정 후 다나카 수상이 방중하며 국교가 재개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10월 17일에는 10월 유신이 발표되었고 국민투표에 부쳐 투표율 91.9%, 찬성률 91.5%로 통과되었다. 그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박정희 제8 대 대통령 취임했다. 영욕이 깃든 어두운 시절의 자화상들이다.
이 해에 홍콩에서 활동하던 정창화 감독의 <천하제일권>이 미국에 수출되어 주말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이는 동양권영화의 최고 스코아이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비록 홍콩영화였지만 이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이 영화는 이미 한국에서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여 흥행에서 참패했던 영화인데 한국어 더빙을 한 위장합작영화였기 때문이다. 맛이 다르다고 할까? 어색한 더빙은 곧 영화의 완성도를 뚝 떨어뜨렸다.
미국에서도 영어 더빙영화로 개봉되었는데 미국인들은 동양의 무술세계를 보여주기에 더빙 문제를 생각할 겨를 없이 영화에 빠져들었던 같다. 미국에 가서 인터뷰를 하니 <세상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사나이>로 기억을 해 그럴듯한 제목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해 장철 감독은 한국 로케로 <사기사>를 완성해 개봉하나 홍콩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에서도 개봉할 수 없을 마큼 한국전쟁 상황을 이상하게 그린 영화였다.
이소룡은 <정무문> 개봉을 마치고 자신의 콩코드 프로덕션을 차려 <맹룡과강>을 완성해 12월 30일에 개봉하며 또 한번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대단한 이소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듬해에 곧 <사망적유희>의 제작에 착수한다.
이 해 이한상 감독은 허관문 주연의 <대군벌>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당산대형>의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 기록을 <정무문>이 다시 경신하니 홍콩영화계는 연일 흥분의 도가니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영화로는 변장호 감독이 <홍살문>을 감독했고 이 영화로 이듬해 제1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다. 훗날 한국영화계의 주인공이 된 임권택 감독은 <명동잔혹사>, 이만희 감독은 <1950.04시>를 만들었다.
외화로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가 개봉된 해이다. 이 영화는 마피아라는 성역을 다룬 최초의 영화이다.
안양예고로의 전학을 고집하던 나는 부모님의 말씀대로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진학을 결심했던 해이다.
고소영, 김주혁, 심은하, 이정재가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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