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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1)
1. 믿음은(1-3)
히브리서 기자는 10: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여러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흔히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서점에 가면 11장에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을 영웅시하고, 그들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책들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11장은 그처럼 어떤 인물들의 믿음을 칭송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대해 분명히 가져야 할 중심적 사고는,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믿음 스스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이 믿음을 갖기를 결정해서 믿음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살려는 의지가 있어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자체가 능력이기에, 성도가 믿음에 의해 믿음에 붙들려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도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의지에 의해서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외치는 것이고, 부지런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도 하는 것입니다. 곧 믿음에 대한 주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32-39절에서 믿음에 대해 얘기를 한 다음, 11장의 믿음의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의인들을 말함으로써, 믿음이 과연 성도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한 것과 연결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1장에서 인간에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현대 교회가 말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 이 모두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성도가 바라는 것, 그럼에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을 천국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천국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실상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무엇으로 천국의 증거로 삼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로 천국의 실상, 또는 증거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로 삼아, 천국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서, 확인되어진 것만 믿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 역시 믿음입니다. 물론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영으로써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증명되지 아니한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의 중심은 증명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과학적 증명이 없어도, 얼마든지 믿게 되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음이 없는 세상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증거를 얻었습니다. 선진들이 바라면서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선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선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어떤 증거물이 있었습니까? 무슨 증명을 얻은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을 뿐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어떤 증거물을 보이심으로써, 믿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믿음이 선진들에게는 약속의 증거물이었고, 믿음에 의해 약속을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는 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대로 여러분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시는 것을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어떤 증거도 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증거입니까?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이유는 뻔합니다. 눈으로 본적이 없고,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살아 계시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종종 조롱하듯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디 한번 보여 봐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 난감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곧 믿음 자체가 증거로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대로,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증명 하려고 하지 말기 바랍니다. 믿음은 남에게 보여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은 나를 높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뜻합니다. 이 우주 만물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타난 것, 곧 세상에 존재하는 뭔가를 이용해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것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그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증거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보이는 것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함이 부족하다고 해서,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세상에 대해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갖 과학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창조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믿음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과학으로 통하거나, 과학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없는 세상은, 믿음이 있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이는 것으로 증거되고,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증거하고 증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보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말씀의 실상으로, 증거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의심 없이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기 위해 뭘 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이 이끄는 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확신을 갖고자 하고, 어떤 신비한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또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믿음은 오히려 보이는 나의 행동을 신뢰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신 일만,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아벨은(4)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추상이며, 보이는 것은 실체인데, 실체보다 추상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한계로 인해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 삼아, 사람을 판단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의 믿음의 여부를, 그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실체는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가공되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믿음의 증거로 강조하는 구제, 봉사, 기도 등등의 모든 행위들이,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믿음이 있다는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전혀 없는데도, 그를 믿음이 있는 자로 여겨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수님의 십자가 옆의 한편 강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한편 강도는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까, 없는 자였습니까?
눅 23:43절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린 그가 낙원에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 낙원에 있게 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한편 강도는 분명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한편 강도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가 무슨 행위를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 강도에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이 있는 자였고, 그 믿음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강도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라면, 자신과 함께 사형수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을 의지하고 자기 영혼을 맡긴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죽을 자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가능성을 찾지를 않고, 단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처지와 상황은 무시한 채, 예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도들을 생각해 볼까요? 사도들의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까, 아니면 차이가 있었습니까?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행적은 각기 달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산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분량의 행적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사도들 중 바울이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른 사도보다 믿음이 더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믿음의 증거물이 더욱 많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도들의 믿음에 차별을 둘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삼아, 믿음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나타난 것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곧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존재하기에,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이미 갖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증거가 있다면 그에게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상과 증거로 주어진, 믿음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11장의 내용이고, 이런 면에서 1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믿음의 위대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소개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믿음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로써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을 말하고 있습니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증거를 삼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본문을 보면 또 그게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하나님은 제물에 차별을 두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차별을 두고, 그 제물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면, 결국 아벨과 동일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결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곧 아벨의 제물을 현대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믿음의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에 있어서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제물의 종류의 차이일까요?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 증언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물의 차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류의 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창 4:3-4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이 내용을 보면, 가인은 곡식을 기르는 자로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서 양을 드렸습니다. 곧 자기 소산으로 제물을 삼은 것이기에, 제물 자체에 질적인 차별을 둘 수 없으며, 레위기에 보면 곡식도 제물로 등장하기에, 제물 자체의 차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달랐던 것입니까? 위 구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 3:16절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 27:26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돌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이 말씀에서 본 것처럼, 처음 난 것과 기름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곧 가인은 단지 자기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이지만,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제물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것은, 아벨이 바친 양을 증언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통해 나타난 아벨의 구별 의식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이러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의 소산을 바치는 가인의 제물은, 단지 바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곧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라는 수준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바치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서, 제물에 신경을 쓰는 것, 다시 말해서 많이 바치고, 정성스럽게 바치고, 좋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가인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물이 마음에 들어서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달랐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인은 바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수준이라면, 아벨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다기보다는, 아벨의 믿음을 받으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난 것과 기름을 믿음의 증거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처음 난 것과 기름을 바친다는 것도, 믿음이 없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난 것과 기름을 바치는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하반절을 보면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벨로 하여금 처음 난 것과 기름을 구별하여, 제물로 바치게 했던 그 믿음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아벨에게 있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바치면 복주시겠지’라는 생각에서 뭔가를 바치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조차도 여호와의 것이니, 내가 여호와께 따로 바칠 것은 없고, 다만 여호와가 나를 쓰실 뿐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믿음이 아니라면, ‘바치면 복주시겠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내 것을 바쳤으니, 그 대가로 복을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렸을 뿐인데, 그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떠나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구별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합니다. 이런 성도의 삶은 분명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이며 믿음의 증거입니다.
3. 믿음으로 에녹은(5-6)
여러분은 각기 나름대로 믿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고, 또 믿음이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소리치고, 또 믿음으로 산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헛된 삶일 뿐입니다.
마 7: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아무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들을 사람도 있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앞세우고, 믿음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며,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믿음의 인물들을 내세워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벨을 통해 나타난 믿음은 구별이었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벨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벨의 제물에는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며,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다만 바치는 행위에 중요성을 둔 수준입니다. 곧 바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수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산다면, ‘내게 있는 좋은 것을 바치면 복 주실 것이다’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여호와이시기에, 여호와께 바칠 만한 내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인물로 에녹이 등장합니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아벨과의 차이라면, 에녹은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인데,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은 어느 쪽을 더 선호하겠습니까? 분명 죽은 아벨보다는 죽지 않은 에녹일 것입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것이, 더 믿음이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벨과 에녹을 두고, 누구의 믿음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벨은 죽었지만,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은 채 하늘로 옮겨졌으니, 에녹이 더 귀한 대접을 받은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과연 에녹이 아벨보다 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에녹이 아벨보다 더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복에 대해, 그리고 믿음에 대해 이런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을 더 복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세상에서의 환경과 소유에서 찾는 것입니다.
곧 다른 사람보다 좋은 환경과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복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가 믿음이 좋기에 하나님이 그러한 복을 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과 에녹의 차이는 믿음이 아니라 역할이었습니다. 역할을 두고 누구의 역할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연극이나 드라마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하면서,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동일한 역할은 없습니다.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연기함으로써, 한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이 가장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주인공만으로 드라마를 완성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역할은 한 드라마에 있어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아벨은 죽음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고,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간 것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에녹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고생을 하는 분이 있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일찍 죽은 분도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은 불행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만 그런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각기 역할을 맡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의 역할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못사는데 저 사람은 잘사는 것으로 불평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합니다. 에녹이 하늘로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는데,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곧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에녹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6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 만물의 주관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그대로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모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가 곧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 1:14-15절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의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에녹은 뭇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을 믿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게 됩니다.
심판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사라질 것에 불과한 세상을 소망하고, 세상을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심판이 성취될 것을 믿는 자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상은 하늘의 상입니다. 에녹이 받은 상은 무엇일까요? 돈이었습니까? 성공이었습니까? 천국에서 크고 좋은 집을 받는 것이었습니까? 에녹이 받은 상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생명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귀한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고, 이 믿음이라면 세상의 좋은 것을 상으로 여기거나, 또는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믿음으로 살면, 나중에 천국 가서 크고 좋은 집에 살게 된다는, 엉터리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그 귀함이 충족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외면하고, 어떤 행위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의 믿음, 에녹의 믿음을 보면서,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은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합니다. 어떤 형편에 살든,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역할로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과연 이런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시고, 믿음의 참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믿음으로 노아는(7)
믿음은 보이는 것을 손에 쥐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와 실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와 실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천국을 보지 못하고, 천국을 보지 못하기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가치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면서, 그 세계는 가치있다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는 성도가 보이는 세상의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보면서 복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얻고자 믿음을 동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다’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일을 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그들을 말함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인해, 우리 자신이 과연 믿음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아는 대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그 심판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이란,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경고를 받은 자로서, 방주를 준비한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믿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경고는 현실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그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노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임할 증거가 보이지 않기에, 심판에 대해 의심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과 증거를 떠나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자체가, 노아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홍수로 망한다고 했을 때, 세상은 상식과 과학을 동원하여, 그 말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은 허황된 말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홍수로 망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대에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현대는, 더욱 과학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그 어떤 징후도 찾아볼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고,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쯤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조차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일이고, 나중에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에, 하나님의 경고를 현실로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의 전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 삶은 경고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재에 치우쳐 살아가게 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세상은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믿음으로 사는 노아의 삶이, 세상에 이해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오히려 노아를 싫어했지 않겠습니까?
평안한 세상에서 한평생 평안하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지, 뭐하러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평안한 세상을 시끄럽게 하려고 하느냐는 시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심판을 경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노아가 받았던 경고를, 오늘 우리가 받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는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 심판이 임할지 알 수 없고, 심판이 임한다는 징조로 여길만한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가 있고, 이상기후가 있고, 지진도 있고, 전쟁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것으로 세상이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심판 자체를 무시하고 삽니다.
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심판을 보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아무리 과학으로 무장한 세상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두가, 모래 위에 쌓은 것에 불과할 뿐임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 과학이 세상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현실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노아처럼 방주를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지금의 성도가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방주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해서, 특별히 해야 하는 삶이, 따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성도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노아와 같은 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히 세상을 향한 정죄가 되었습니다. 7절에서도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삶이, 세상을 정죄하는 외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세상을 향해 ‘너희는 심판을 받고 망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행위가, 세상을 향한 정죄의 외침이 된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믿지 않으니, 결국 심판에서 건짐 받지 못할 것이다’는 외침이, 노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노아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도 세상을 향한 소리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묵묵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향한 정죄의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있는 백성을 찾는 소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는 세상은,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삶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닷가에서 방주를 짓지 않고, 육지에서 짓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평하겠습니까? 정말 미련한 짓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노아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믿는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심판이 없다면 모두 헛된 일로 끝납니다. 괜한 수고를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이 보이지 않기에,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방주 없이도 세상을 사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경고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참으로 지혜있는 자가 누구인가가 증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믿고, 그 일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가, 진심으로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따라 세상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따라 세상을 보게 되면,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그들의 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경고가 현실입니다. 보이는 것은 헛된 것이고, 사라질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보이는 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 보이는 것을 구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헛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 영원한 것을 구하는 것이, 믿음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5. 믿음으로 아브라함은(8-10)
대개 믿음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이라는 힘을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믿음이 주어진 이후에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곧 일단 믿음이 주어지면, 그 다음부터 믿음을 책임지고 지키고 관리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하신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간 결과입니까?
믿음이 있는 나의 순종으로 본다면, 결국 말씀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행위가 곧 말씀에 반응하는 흔적이고 증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대다수의 교회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 순종을 나의 반응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나를 이끌고 있다면, 이미 나라는 존재는 믿음 안에 죽고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기에, 나의 행위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한다면 믿음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간다면, 나는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조종 받는 로봇과 같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믿음이 나를 붙들어 이끌어 간다는 것은, 가지 않으려는 나를 강제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소망을 새롭게 함으로써, 말씀을 따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롭게 된 나는 이미 ‘나’가 아니기에, 나는 믿음 안에서 죽고 없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없이, 1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결국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곧 믿음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고, 또 그게 그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주체를 누구에게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믿음의 조상’일 정도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임을 굳게 세워주고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의 주체를 아브라함에게 두게 된다면,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각이 될 것이고, 그러한 행위가 있는 아브라함 자체가, 높임을 받게 될 위험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내가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믿음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믿음을 받아서 그리고 소유해서, 그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아서,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구출하여,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자로 살아가는 세계로, 집어넣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나를 새롭게 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같이 이러한 세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어떻게 살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길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곧 믿음은 한 개인의 믿음의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야할 길과, 아브라함의 앞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알려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 1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다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모른 채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라고 합니다. 곧 젊은 때가 아니라, 힘을 쓰지 못할 늙었을 때,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어떤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모두 접어 버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는 것, 이것이 믿음이 이끄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음의 세계로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서의 종교 생활, 그리고 세상에서는 적당히 착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가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데 떠나라는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을 버리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믿음에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고치면서 붙들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는 삶, 이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기에, 다른 길로 가려고 발버둥 칠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길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어떠함과 악함을 익히 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이용하여,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잘 살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에게 있는 상식을 가지고 생각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자신의 형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되게 하시는 분을, 참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상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고향과 친척집을 떠나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집을 버리고 떠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믿음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떠난 자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의 고향 나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고향 나의 집이 있음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해서, 세상에 자신의 집을 탄탄하게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의 소유는 없음을 알게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배상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상법을 이용해서, 피해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만, 사실 배상법은 피해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향한 규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해자란 없습니다.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의 소유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피해를 입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해자는 있지만, 피해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를 입었으니 배상하라는 요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특이성입니다. 배상은 가해자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9절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간단히 말해서 남의 나라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나의 나라로 보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게 합니다. 믿음에 붙들린 성도라면, 믿음에 의해 그러한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를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인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이 일에 100%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와는 상관없는 존재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그러한가?’라는 의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내가 뭔가 한게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세계의 맛을 보지 못한 못난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시고, 믿음의 세계로 부름 받은, 무한한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