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여전히 주님과 함께... 私はなお主の共に…。
https://youtu.be/p25cAOdV4GI
본문: 시편 139:13~18
시 139: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7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13. あなたは、わたしの内臓を造り/母の胎内にわたしを組み立ててくださった。14. わたしはあなたに感謝をささげる。わたしは恐ろしい力によって/驚くべきものに造り上げられている。御業がどんなに驚くべきものか/わたしの魂はよく知っている。15. 秘められたところでわたしは造られ/深い地の底で織りなされた。あなたには、わたしの骨も隠されてはいない。16. 胎児であったわたしをあなたの目は見ておられた。わたしの日々はあなたの書にすべて記されている/まだその一日も造られないうちから。17. あなたの御計らいは/わたしにとっていかに貴いことか。神よ、いかにそれは数多いことか。18. 数えようとしても、砂の粒より多く/その果てを極めたと思っても/わたしはなお、あなたの中にいる。
오늘은 시편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댁에 가시면 설교의 본문인 시편 139편을 1절부터 마지막까지 꼭 입으로 소리내어 읽고 깊이 묵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시편 139편의 내용적인 구조를 보면 먼저 1절부터 12절까지가 한 내용으로, 오늘 함께 읽은 13절부터 18절까지가 또 한 내용, 19절부터 22절까지 한 내용, 그리고 23절부터 24절까지가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보면 제1단락(1~12절)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어디에 있어도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2단락(13~18절)은 나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의 능력을 또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이지요.
제3단락(19~22절)은 이런 나에게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탄원입니다. 삶의 장애요소를 제거해 달라는 고소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결론(23~24절)은 주님 앞에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지켜 주시길 구하는 간구의 기도문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은 결론적인 내용으로 볼 때 삶의 여러 장애요소가 나타날 때 그 장애와 고난으로부터 지켜 주시길 구하는 탄원시입니다.
표제에 보시면 다윗의 노래라고 적혀 있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
...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2b)
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았다는 것인데요. 물론 다윗도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하고,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저지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우리는 다윗의 인생을 보고 그의 시를 읽으며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주님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싶다고 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과 함께 첫 번째로 주목하고 싶은 구절은 …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다...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 몸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자신의 머리카락의 갯수나 색깔 하나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개척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죄라고 말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범죄의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를 창조하신 분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믿음은 시작합니다. 나의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정의의 시작입니다. 나의 뼈, 나의 장기, 나의 살점 하나도 주님의 창조하신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뼈 하나도 주님 앞에서 감출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면밀히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저 실험실에서 연구자들이 하듯이 요리조리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참여하여 우리의 마음에 들어 오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거듭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의 16절에서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말씀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아니면 너무도 감격스러우십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이 부담이 아닌, 감격과 은혜의 약속으로 느껴지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의식하지 못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기록하고 계셨다고 고백하는데요. 성령님은 지금 우리 마음 안에 들어 오셔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나답고 사람다워지고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누가 더 원할까요? 바로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손님보다 더 집을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경험과 태생적인 성향, 그리고 반복되어 온 상처와 실패로 인해 육신적인 감각만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이제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가장 큰 즐거움과 행복입니다. 용기와 담대함, 그리고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 외의 다른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이 세상 그 어떤 피조물의 위협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박리부가 사모님의 간증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요. 그 가운데 마음 깊이 감동이 되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모님께서 세계기도정보라는 책으로 중보기도를 하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토켈라우라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중보기도하시는 분의 숫자가 사모님을 포함해서 3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그 시간을 포기하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책자를 보니 토켈라우라는 나라의 인구가 약 2,000명 정도가 되는데...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정보도 너무 빈약하더라는 것이지요.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너무 마음 불편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다고 하지요.
그 작은 나라에 사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위해서 누군가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구체적으로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아는 사람이 이 세계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를 기억하시고, 그 작은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셨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나라에 살고, 얼마나 큰 성과를 내며, 얼마나 많은 소유의 사람인가로 자신의 가치를 헤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일상을 하루에 하루만큼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며 주목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은밀한 곳에서 친히 세포 하나 하나를 구상하시고 창조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와 동행하시기로 약속하신 주님과의 친밀하고도 행복한 일상생활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어서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과 행복한 일상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보기 원하고 주님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지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일이라면 주님의 힘으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 땅에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일들에 과민하게 반응하지요.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충만함을 누려야 합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과 부활 임재의 복음은 우리를 사람답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연습은 단순한 종교적 수행이 아니라, 나답게 평안 가운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고 유지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고 계시는 것을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사람들의 평가나 비꼬는 말투와 같은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잃고 주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우리가 함께 고백한 139편을 소리내에 읽으며 주님의 말씀과 평가에만 신경을 쓰고 사소한 모든 일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언제나 어디서나 그 어떤 문제나 형편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행복하게 동행할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