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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동영상) 1592년 4월, 전격적인 조선 침공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20여만 명의 왜군 앞에 조선군은 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를 당하여 순식간에 온 나라가 유린 당했다. 하지만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이순신/代役: (동영상) 방포하라, 적선을 분멸하라!
해설: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은 23전 23승을 거두며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순신/代役: 돌격하라, 남은 적들을 소탕하라!
군관/代役: 네,
해설: 결국 일본은 조선침략에 실패하고 만다. 불패신화, 이순신 장군! 그는 1592년부터 눈을 감기 이틀 전까지 무려 2539일 간의 기록을 난중일기로 남겼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1597.9.15), 7년이나 이어진 장군 이순신의 모습부터 한 없이 약했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까지 (하루 종일 비가 뿌렸다. 거적 지붕 아래서 깊은 회한을 걷잡을 수가 없구나-1597.9.12), 그가 남긴 13만여 자의 진솔한 기록, 난중일기는 조선 수군을 이끈 한 장군의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 세계가 함께 보존해야 할 기록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68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이번주 부터는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요. 전 세계가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기록유산을 의미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훼손되거나 소멸할 위기에 처한 귀중한 기록문을 보존, 이용하기 위해 선정),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우리의 난중일기가 등재되었습니다 (2013년 등재)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이시원/배우: 정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애요. 거기다가 국보로 등록이 되어 있잖아요 (1962년 국보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 초등학생도 알법한 난중일기, 그런데 다들 읽어는 보셨나요?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은 찾기 힘든다는, 제가 바로 난중일기를 정독한 여자입니다.
최태성: 진짜요?
이시원: 2014년 제가 KBS TV책을 보다에서 난중일기를 가지고 진화심리학으로 본 난중일기로 강연을 했었어요. 그래서 꼼꼼히 읽었거든요.
허준: 한자로 된 걸 읽은 거예요?
이시원: 아뇨,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허준: 사실 저는 미안한 게 사죄의 말씀을 먼저 올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어린이가 읽는 난중일기 책들이 있었어요. 친구들 끼리 그 책에다가 낙서를 했어요. 난중일기책 내용은 기억 안나고 낙서만 기억이 나는 거예요.
최원정: 영국인 피터 빈트씨가 자리했습니다. 혹시 이순신 장군과~
피터 빈트/방송인: 광화문 광장에 가면 동상있잖아요. 거기서 서로 봤어요. 구면이에요.
이시원: 하~하~ 동상 앞에서
피터: 눈 맞았어요~
최원정: 그렇게 따지면 저는 절친이에요.
피터: 영국에 비슷한 위인이 있어요. 넬슨 제독~ 트라팔가르 해전이요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
최태성: 그걸 기념하기 위해서 트라팔가르 광장도 있잖아요.
피터: 그 안에 기념비 넬슨 탑(51미터)이 있는데 너무 높아서 솔직히 누군지 잘 몰라요. 밑에서 봐야 되는데 그때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넬슨도 전사했거든요. 그래서 이순신과 그것도 비슷한 점이고~
허준: 누가 더 멋 있다고 생각해요?
피터: (당황)~
이시원: 유치한 질문이긴 하지만~
최원정: (답은 정해져 있어) 듣고 싶지, 우리는~
피터: 영어 자막은 안 나가는 거—맞죠? 솔직히 그때 18~19세기 세계 해군 중에 영국이 세었잖아요. 적은 병력으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이 멋진 거 같애요.
최태성: (농담) 평생 출연권 획득??
최원정; 우리 역사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데 세계가 함께 보존해야 되는 기록유산으로 선정하게 된 이유가 과연 뭘까요?
이민웅/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순신 학과장: 유네스코가 세계 기록유산을 선정할 때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야 하고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로 기록한 임진왜란은 일본이 동북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침략전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어요. 특히 명나라와 일본이 모두 참전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아시아 최초의 세계 대전, 즉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습니다.
최태성: 네델란드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계기록유산이 있거든요.
이시원: 안네의 일기
최태성: 많은 분들이 모르세요, 이 안네의 일기는 사춘기 소녀가 2차 세계대전 중에 6년여 동안 기록을 한거잖아요 (안네의 일기-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16세의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의 일기). 안네의 일기를 통해 가지고 독일이 네델란드를 점령할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모습들을 보는데 굉장히 중요한 기록물이잖아요. 난중일기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전쟁준비 과정이라든지 전쟁준비 상황 이런 것들이 정말 상세하게 적혀 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죠! 바로 사람 이순신, 역사 이런 거 중요한데 사람 이순신을 알 수 있거든요. 아마 오늘 저희 프로를 보시면은 아니~ 그런 모습이 있었어~ 정말 사람 이순신 인간 냄새 나는 이순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터: 근데 지금까지 얘기했던 세계기록유산이라고 한국말로 되어 있는데~ 혹시 영어로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최태성; 지금 영국인이 우리한테 영어를 물어보시는 거예요?
피터: 아니~ 저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시원: 이게 세계기록유산이니까~ World Record Heritage?
피터: 근데 world record 하면 record 를 쓰니까 기네스 북의 기록이 떠오르잖아요 영어는 달라요. Memory of the World(세계기록유산),
최원정: Record 가 아닌 Memory를 쓰는 거예요?
피터: 기록은 단순히 record 라고 번역되겠지만 그냥 그대로 fact만~ memory라고 하니까 기록자의 기억 감정이 담아 있구요. 그래서 Memory of the World 하면 전세계와 함께 기록물이 보존되어야 하고 기억되어야 되고 그러니까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최원정: 근데 세계기록유산이 우리나라가 많은 편이라면서요, 16편? 자랑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난중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기간 중에 또 다른 국보 기록을 남긴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임진장초(壬辰狀草)~
이민웅: 두 가지 차이를 살펴보면은 난중일기에는 하루의 일정이나 공적-사적 만남, 개인적 생각 감정 이런 것들을 담고 있구요. 글씨는 빠르게 흘려 쓴 초서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임진장초는 국왕에게 보고를 하기 위한 공식문서예요.
이시원: 보니까 글씨체가 굉장히 달라요. 난중일기 같은 경우는 초서체로 써서 해독이 어려울 것도 같거든요.
이민웅: 초서체는 많은 획수를 빠르게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워낙 생략되고 흘려쓰다 보니까 글자를 해독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슷한 글자를 전혀 다른 글자로 오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원정: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쓸 때 이거는 내가 후세에 널리 알려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쓰셨을까요 아니면 혼자 보려고 쓴 일기일까요?
이시원: 이게 만약에 후대에 전해질 의도로 쓰셨다면 더 있어 보이게 더 멋 있게 사생활을 최대한 배제하고 쓰셨을 것 같거든요.
허준: 누가 읽으면 장군님의 명예에 누가 될까 이런 면도 보이니까
최태성: 개인적인 어떤 감정이 들어갈 수 있었다 라고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이순신 장군 하면 항상 같이 붙어나오는 장군이 있잖습니까.
허준: 원균
최태성: 근데 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원균을 정말 싫어했구나. 우리 요즘 디스한다고 그러잖아요. 이게 난중일기 속에 30번 넘게 나와요.
이시원: 저는 여기에 욕을 쓰실 수 있었으면 욕이 난무했을 것 같애요.
최태성: 뭐라고 나왔는지 볼게요. 원균의 말은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1593.7.21).
최원정: 저 정도면 욕이 아닌가.
최태성: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으니 해괴하게 여겼다(1593.8.26). 원흉은 곤장 40대를 장흥부사는 20대를 맞았다고 했다 (1596.3.12). 여기서 元兇은 누구냐면 元均입니다.
이민웅: 이 시대에도 표현을 굉장히 축약해서 쓰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애요. 원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라고 안 쓰고 원균 경상 우수사, 원수사
최태성: 진짜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들어가 있다 라고 들더라구요.
이민웅: 원래 일기도 개인적인 감정이나 일상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죠. 또 이 시대는 개인의 어떤 수양을 위한 것이기도 했구요. 후대 전할 목적으로 썼다가 아니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의미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난중일기를 쓴 목적이 어찌 되었든 전란 중에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셨다는 건 대단한 일이잖아요. 얼마나 치열하게 그 기록을 남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저는 예전에 학창시절 방학 때 일기를 제 때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일기는 항상 난중에 쓰는! 우리 이순신 장군님은 이 전란의 와중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亂中에 쓰셨어요. 그런데 이름에서부터 뭔가 웅장함이 느껴지는 난중일기, 이 제목은 누가 지었을까요?
최원정: 절친 류성룡?
이시원: 후세의 자손들?
이광용: 아닙니다! 정조 19년에 이순신과 관계된 서적을 편찬한 전쟁문집인 이충무공전서 (이충무공전서-정조 19년에 간행한 이순신 전집, 이순신의 행정-일화-인품-전언 등을 망라한 책)가 간행될 때 이순신의 일기 친필 초고를 해독하면서 바로 지금 보고 계신 亂中日記 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편찬자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이름),
허준: 저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도 잘 하시고 작명도 잘하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작명은 다른 사람이 했군요,
최태성; 어떤 식으로 썼느냐 하면 그 해의 간지를 떠가지고 써요. 임진 계사 갑오 을미(미발행) 병신 정유 무술~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여기에다 임진일기 계사일기~ 이런 식으로 쓴 거예요.
이광용: 치열했던 7년의 기록, 이렇게 7년 동안 전란이 이어지는데 그걸 정말 이순신 장군은 기록하는데 진심이셨습니다. 꼼꼼하게 적어 놓으셨는데~ 가로--1월부터~12월까지(12개월), 세로--1592년~1598년 (7개년), 빨간색이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일기를 쓰셨던 기간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총130일), 보세요 5월초 까지 일기가 쭉 이어집니다. 근데 중간에 끊켜요. 이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비어있는 일기 (1592.6.11~8.23)
이시원: 전투하시느라 바빠서 못 쓰시지 않으셨을까요?
이광용: 공개합니다. 우리가 정말 자랑스러워 하는 한산도 대첩이 이 시기에 있었습니다.
최태성: 아니~ 이광용 아나운서가 이 표를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이광용: 제가 작가님들에게 열심히 부탁을 해서~ 그리고 임진왜란이 조금 소강상태에 들어갔던1594년 부터 1596년 까지는 기록이 빼곡하게 들어있죠. 300일 넘게 장군께서 일기를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시원: 1595년에는 30일 빼고 다 쓰셨어요.
이민웅: 1595년 을미년 일기가 원본은 없거든요. 일기가 제일 많이 남아 있어요. 원본이 없어졌을 뿐이지 이 춤무공 전서를 편찬할 당시에 근거해서 볼만한 자료들이 있었다는 거죠.
허준: 을미일기를 발견하면 엄청난 가치가 있겠네요?
최태성: 혹시 발견 되시면 일단 저한테 가져오세요.
이광용: 혹시 발견 하시면 TV 쇼 진품 명품에~
피터: 이순신 장군은 우리 같은 일반 사람과 똑 같은 점을 발견한 것 같애요. 해가 거의 끝날 때~ 10월 11월 특히 12월에 일기를 안 쓰셨잖아요.
최태성: 새해에 다시 쓰고 있죠.
이광용: 일단 장군께서 전투도 준비하시고 휴식도 하셔야 되고~ 수군병사들도 챙겨야 될 것 아녜요. 한 해 동안의 회포도 풀고~
최태성: 사람 냄새가 나네요.
이광용: 그럼요, 내년을 기약하면서 이러면서 또 송년회! 전란 중에도 한 숨을 돌려야 될 것 아녜요.
최태성: 너무 재밋다 이거~
이광용: 다 주목하세요, 1597년 (총266일) 정유년 석 달이나 앞쪽이 비어 있어요. 거의 다 1월부터일기를 써나가셨는데 이 때는 앞쪽이 비었습니다.
이시원: 그때도 아마 전투 중이지 않았을까요?
이광용: 1597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파직 투옥
최태성; 제일 힘든 시기~
-------------(동영상) 이순신이 출병 명령을 따르지 않자 대노한 선조, 죽여야 마땅하다 (선조실록), 명령불복종의 책임을 물어(罷職, 投獄, 이순신 죄수복으로 수레에 실려 끌려간다. 백성들 대성통곡하다
이광용: 일본에 대항해서 수군을 이끌고 저들을 물리쳐라 라는 선조의 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직되고 투옥됐다. (다행히 사형만은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 장군), 그 시기 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혀 있어서 일기를 못 썼죠. 중요한 것은 백의종군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다시 이어집니다.
이민웅: 1597.4.1. 晴(맑음) 得出圓門 (옥문을 나왔다) 라고 시작합니다. 조카와 아들…(중략)…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이 정도의 착잡한 표현이 있구요. 이날 저녁에 주위 사람들이 술을 많이 권해서 많이 마셨다. 몹시 취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시원: 16세기 조선 그땐 두부가 술을?
허준: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가만히 안 둘 거야. 원망하고 그런 내용은 없어요?
최원정; 자기를 투옥시킨 사람이 선조인데 선조에 대해서는 뭘 써야지~
이민웅: 이순신은 조선 성리학이 낳은 참 인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忠과 孝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다. 난중일기 어디에도 선조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 이런 표현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이광용: 사실 장군도 사람인데 그런 원망의 마음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
허준: 옥 안쪽 벽에 오래~
이광용: 여러분,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마음 속에 남겨두고요. 다시 주목할 부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 이때 일기를 두번씩 써요. 왜냐 우리가 가장 자랑스러운 전사로 기록하는 鳴梁大捷이 있습니다.
이민웅: 난중일기 7년 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일기를 쓴 날이 명량대첩 당일 일기입니다. 저게 먼저 일본에 대해 자세하게 썼는데 두번째 정유일기는 그것보다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추가되어서 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요.
이시원: 승리가 기쁘셔서 한번 쓸 것 한번 더 복기하고 그러셨군요.
이민웅: 이를 비교해서 보면 훨씬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볼 수 있어요.
이시원: 남자들이 축구하고 나서 골 넣는 장면을 계속 복기한데요.
이광용: 군대 이야기잖아요. 이순신 장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게 이것 아닙니까.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거잖아요. 세계 해전사를 다 뒤집어 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말 극적인 역전 드라마가 쓰여진 이 명량대첩 그날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해설: (동영상) 백의종군으로 돌아온 이순신 (명량대첩 전날/1597.9.15), 그의 앞에는 궤멸 직전의 조선 수군만이 남아 있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이순신/代役: 必死則生 必生則死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이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 나를 따르라 (1597.9.15),
해설: 하지만 이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조선 수군의 배는 단 13척, 하지만 일본군의 배는 무려 330여 척이나 되었다. 엄청난 숫적 열세에 조선 수군의 사기는 이미 껶여있었다(1597.9.16),
안위/거제현감/代役: 다 죽자는 거야, 뭐야! 으악!
이순신: 초요기를 올려라! 안위야, 군법에 죽겠느냐 아니면 싸우다 장수답게 죽겠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1597.9.16), 칼집에서 칼을 뽑아라!
안위: 장군!
이순신: 방포하라! 적선을 모조리 분멸하라!
해설: 장군의 독려로 다시 전장으로 뛰어든 조선 수군들, 그날의 일기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1597.9.16). 이순신은 이 날의 승리를 이렇게 기록했다. 此實天幸(차실천행) 이것은 실로 천행이었다 (1597.9.16).
최태성: 전설이다! 전설!
최원정: 기록이 많으니까 영상화가 자동으로 되잖아요.
최태성: 모든 것이 이순신 장군의 계획대로(?)
이시원: 정말 천행이었다 하시잖아요. 하늘이 도운 기적 같은 승리였다.
최원정: 우리가 동네에서도 1:17로 싸웠다 해도 안 믿는데~ 이것도 기록으로 안 남겨놨으면 13대 333 누가 믿을까요. 기록이 있으니까 우리가 추앙하는 거죠.
이민웅: 처음 쓴 정유일기를 보면 이른 아침에 정찰부대가 적출현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출전해 나가죠. 그 다음에 살짝 위험하게 되었다가 다시 역전하는 순간 그리고 값진 승리를 거두고 그날 방사도 까지 후퇴하는 그런 모습을 시간 순서대로 꼼꼼하게 적어 놨어요. 근데 그 뒤에 적은 속편이죠. 정유일기2에는 적장을 참수한 후에 적의 사기가 꺾였다. 그 다음에 진자 현자 총통을 쏴서 31척을 격파했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사실 대로 기록을 추가하고 있는게 보입니다.
이시원: 굉장히 성격이 꼼꼼하셨던 것 같애요.
허준: 사실은 저는 여기서 살짝 슬픔이 묻어나오는 부분이 휘하의 장수가 항명을 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총탄이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가고 죽음이 내 옆에 있잖아요. 혹시 내가 죽더라도 이걸 자세히 기록하고 남겨서 우리 앞 바다를 지키는 내 뒤의 장수들이 이걸 본 받아서 다시는 전쟁에서 지지 말아라 라는 마음이 갑자기 드신게 아닐까. 그래서 두번씩 자세하게 기록을 한 게 아닌가.
이민웅: 장수들하고 군사들이 겁을 먹을 수 밖에 없는 게 (칠천량 해전(1597.7.14)-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참패, 원균도 이 전투에서 전사), 칠천량 해전이 불과 2개월 전에 있었어요. 두 달 후에 명량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일단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한 것 같구요. 장수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순간을 여러 배를 돌아보니 이미 일 마장쯤 물러나 있었다. 일 마장은 1리, 400미터 정도됩니다. 많이 물러나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묘연했다. 보일등 말등 했다.
최태성: 바다에서 보일 듯 말 듯 했으면~ 굉장히 먼 거리예요.
이시원: 이미 저 멀리 도망간 거죠!
이민웅: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중략) 사세가 낭패 되었을 것이다(1597.9.16). 대장선도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없어서 내 배를 돌리지는 못하고 이런 아주 생생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시원: 난중일기를 보면 진짜 이순신 장군은 당근과 채찍을 너무나 잘 쓰는 장수였어요. 당근은 적당한 크긴데 채찍은 엄청나게 컸던 거예요. 보면은,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1592.1.16),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 왔기에 주모자 3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1594.7.26), 이렇게 굉장히 엄격하시고 군법에 따라 다스리시는 굉장히 혹독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게 많이 느껴져요.
피터; 영국에 그런 표현이 있어요. By the book 라고 해서 매뉴얼 대로, 규칙대로, 비슷한 표현이 Field Manual 이죠. 저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인들 특징은 늘 군율대로 해야 안 그러면 기강이 흔들리고 그래서 제대로 엄격하게 안하면 엉망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최원정: 아무리 그래도 유독 많이 때리셨네요?
이시원: 워낙 전시다 보니까 작은 실수만 하더라도 위험에 처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격해 지셨다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이민웅: 원래 군형법이 일반 형법보다 훨씬 중한 처벌을 하는데 전쟁 중이니까 더 더군다나 강할 수 밖에 없죠.
허준: 다 이해하고 너무나도 존경합니다만 그때 그 수군 병사들은 참 이순신 장군님 휘하에서 힘들었을 것 같애요.
이시원: 누가 일을 잘 하잖아요. 그러면 소 5마리를 군사들에게 먹이도록 명했다(1597.9.9) 쌀을 줬다 라는 이런 내용들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규칙만 잘 지키면 하라는 것만 잘 하면 최고의 리더죠.
최태성; 리더 중에서 두 유형이 있어요. 똑부와 똑게가 있어요. 똑부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 똑게는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 일반적으로 회사원들 같은 경우는 똑게가 최고예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똑부 스타일!
최원정: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끝에 얻은 기적 같은 승리였습니다.
최태성: 이순신 장군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예요! 이건 철저한 준비 속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강아랑/기상캐스터: 1594년 갑오년 5월 장마특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올 장마는요 9일부터 시작해서 13일 잠시 주춤했다가 14일부터 다시 장맛비가 종일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장마는요, 5월말이 되어서야 끝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긴 장마에 철저히 대비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때 갑자기 이광용 아나 등장),
이광용: 아니! 강아랑 캐스터! 날씨 전문가인건 알겠는데 뭐 1594년 5월 장마특보가 웬말이에요? 심지어 이게 장마인데 5월이 말이 됩니까?
강아랑: 말이 됩니다. 일단 이것은요,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록을 한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저희가 전해드린 거구요. 사실 이게 음력입니다. 1594년 음력 5월 9일은 양력 6월 26일경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장마기간과 유사하다고 설명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순신 장군님을 기상 캐스터 선배님이라고 불러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일기를 보면은요 날씨를 안 쓴 날이 고작 전체의 42일이니까 2.6%에 불과 하거든요. 16세기 장마기간이 지금과 비슷합니다. 18일에서 33일이니까 현재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고 또 요즘에도 게릴라성 폭우가 밤에 야행성으로 집중이 되는데 그때도 오전 보다는 오후가 밤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현저하게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최태성: 진심이셨구나.
이민웅: 난중일기의 자세한 날씨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자료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기상이변이나 재해 등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난중일기 처럼 해안지역 날씨변화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아랑: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일기를 쓸 때 날씨 표현을 정말 다양하게 표현을 했는데요. 무더운 날씨 습도가 높은 날씨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1594.6.11),
이광용: 시인이세요.
강아랑: 큰 섬이 찌는 듯 하다(1594.6.22)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리고 아주 추울 때에는요, 혹한기에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추워서 살을 도리는 것 같았다 (1596.1.9), 추위가 갑절이나 심했다 (1597.11.26), 이순신 장군님 날씨 표현 앞으로도 많이 배워서 좀 더! 좀 더! 자세한 날씨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날씨는 KBS!
이광용: 역사도 KBS!
일동: 박수~
최원정: 바다를 호령했던 장군 답게 정말 하늘을 살피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허준: 500년 전에 빅데이터 수집한 거에요.
최원정: 맞아요.
이민웅: 그야말로 살아있는 기상청~ 일기 첫머리에 무조건 날씨로 시작하는데 간단하게, 맑음 비가 왔다 라고 쓸 데도 있지만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흐리다가 정오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해질녘에 갰다 이런 식으로 시간대별로 아주 면밀하게 썼습니다.
최태성: 이런 전통이 이어져 가지고 초등학교 일기장에 항상 날씨부터 썼던 게 아닌가?
이시원: 이순신 장군은 그냥 날씨만 흐림 이렇게 쓰고 넘어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맑음 쓰고 내용을 꼭 썼어야 돼요. 날씨만 쓰고 싶으면 날씨만 쓸 수 있고
허준: 일기 쓰고 싶을 때가 없어서 문제예요.
최원정: 우리가 날씨 먼저 쓰게 된 게 난중일기에서 였네요. (피터씨를 향해) 영국에서도 학교 다닐 때 일기에 날씨부터 써요?
피터: 늘 비가 오니까 날씨 기록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 표현들도 있어요. Red sky at night, shepherd’d delight 빨간색 하늘이면, 다음날 양치기의 기쁨, 날씨가 맑을 것이다.
최원정: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고 장마철인데요.
허준: 전 지금 류마티스입니다.
해설: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해,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 그를 기다린 건 어머니의 죽음이다. 아흔 다섯의 어머니가 아들의 투옥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급히 여수에서 아산까지 배를 타고 올라왔으나 돌아가신 것이다.
이순신: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1597.4.13), 어이하랴, 어이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으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597.4.19),
해설: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켰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의 지극한 사랑, 난중일기의 첫날 역시 어머니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1594.1.1), 일기 곳곳엔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난중일기는 아들 이순신의 애끓는 思母曲(사모곡)이었다.
최태성: 아이고~ 효자시네, 효자~
피터: 마마 보이 같은 느낌도~
최태성: 이순신과 마마보이, 매치가 되지 않는 키워드,
피터: 저의 아버지도 군인생활 했을 때에 6개월 멀리 파견된 근무가 몇 번 있었어요. 한번도 편지를 안 쓰는 아버지가 포스트 카드하고 편지를 많이 썼을 때 너무 센치해 버리는 거에요. 갑자기 너무 그립다 여기도 외롭다 그래서 이해가 많이 가죠.
이시원; 난중일기를 읽어보면은 울다 라는 표현이 굉장히 다양하게 나오더라구요. 울다 흐느끼다 통곡하다 읽으면서 진짜 눈물이 많으신 분이었구나 느낄 수 있었어요.
최태성;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쓰면서 어머니를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단어가 있어요. 그 단어가 뭐냐면? 바로 天只(천지) 하늘 天과 다만 只인데 유일한 하늘, 어머니를 부를 때, 천지 라고 부르는 거에요.
허준: 어머니만 애칭이 있는 거에요?
최태성: 이순신 장군이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 데 위로 첫째와 둘째 형님들이 일찍 돌아가세요. 희신-요신, 그러니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들을 먼저 보냈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집니까. 그러니까 이순신이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극진히 모시는 모습을 보여준 거죠. 천지(天只)! 유일한 하늘! 저도 기억 하고 있어야 겠습니다. 유일한 하늘!
피터; 아내 분이 좀 싫어하셨을 둣~
최원정; 나라와 가정을 두루두루 섬세하게 살피셨던 것 같애요.
이민웅: 몸은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가족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난지도 모르겠다(1594.8.30), 굉장히 걱정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구요. 계사년 기록에도 아들들이 여기 저기 아프다는 걸 걱정하는 글이 자주 등장합니다(1593.7.29),
이시원: 아들 勉을 잃었을 때의 일기를 보고 저도 같이 눈물을 흘렸었거든요.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 빛을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1597.10.14), 불행은 한꺼번에 같이 온다고 어머니와 아들을 잃고서 어떻게 보면 대상을 치르신 거잖아요. 그때 심정은 정말 어땠을까. 뭐라도 의지하고 싶은 한 사람의 인간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민웅: 참 고통스러운 표현이 네 글자로 나오는데 度夜如年(도야여년), 하루 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1597.10.14), 이 표현이 바로 아들 勉의 죽은 소식을 들은 날의 일기에 나옵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 점을 쳤어요. 17번 기록이 나옵니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흉한지 점을 쳤다 (1594.9.28), 아들의 병세가 염려되어서 첫째 점을 보고 난 다음에 길한 점괘가 나와서 다행이다(1594.7.13),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최태성: 좋은 점이 나오면 그걸로 위안을 삼고 그걸로 자신감을 갖고 심기일전하는 거죠.
허준: 거기까지만 하시면 괜찮은데 사랑점 같은거 잎파리 떼어내며 사랑한다 안 한다 ~ 다시! 사랑한다! (답은 정해져 있다-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 까지 시도한다),
피터: 아무리 강한 장군 이어도 의지할 데는 있어야 돼요. 미신까지는 아니지만 넬슨 제독은 종교에 많이 의지했어요. 기독교 신자였고 배에서 전투 나가기 전에 갑판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 열심히 하고 시작했어요.
최원정: 저는 죽음을 앞둔 전투 작전에는 아무 신이라도 붙잡고 기대고 싶을 것 같애요. 같은 맘 아닐까요?
이시원: 모든 게 나를 누르는 느낌이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내가 쓰러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그 부담감 이걸 매일 안고 있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다 상하잖아요. 굉장히 큰 고통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돌아갑니다.
---------------이광용: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몸이 불편하다고 기록한 건 90회 이상이나 됩니다. 그 만큼 장군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건데요. 이 난중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오늘 이순신 장군의 건강검진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검진을 도와 주실 김남일 교수님 모셨습니다.
김남일/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고개 숙여 인사)
이광용: 신기한데 난중일기만으로 이순신 장군의 건강검진이 정말 가능한가요?
김남일: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이순신 장군의 일종의 질병에 대한 기록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피곤하다 그러면 인간적인 얘기잖아요. 잠들기가 힘들다 밤새도록 머리가 아파서 앓았다, 꿈을 많이 꾸었다. 이런 식의 기록들이 계속 나와요. 이건 전형적인 어떤 환자의 모습이다. 본인이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거기다가 막 써놓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건 문진표입니다.
이광용: 난중 문진표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김남일: 그렇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이광용; 그러면 난중일기 속 문진표와 같은 기록들 가운데에 어떤 증상이 눈에 확 들어오던가요?
김남일: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식은 땀~ 땀을 흘린 거를 자한증이라고 합니다. (자한증(다한증)-비정상적으로 땀을 흘리는 증상, 지나친 정신적 긴장 등으로 유발), 식은 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1593.8.12),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1596.2.30), 식은 땀이 등을 적시어 옷 두 겹이 다 젖어 이불도 젖었다(1596.3.17), 몸이 약해졌다는 얘기죠.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굉장히 건강하시고 용맹하시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저는 환자라고 생각하고 봐야지~
이광용; 기록을 토대로 하는 거니까~
최태성; 몸이 정말 그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도 전투를 계속해서 수행하신 거예요.
김남일: 전장에서는 어떤 생활을 합니까? 정상적인 집생활이 아니잖아요. 음식을 어떻게 제때에 먹겠어요? 하루 세끼를 딱딱 먹을 수가 없잖아요. 거기다가 스트레스 받고 있잖아요. 기록분석결과 소음계통의 체질을 타고 나신 것 같애요. 소음인은 소심하고 뭔가 전략 같은 걸 잘 짜는~
이광용: 꼼꼼하고~ 치밀한~
김남일: 그러니까 몸이 속히 상합니다. 이분이 갖고 있는 증상들이 거의 다 그런 거야.
이광용: 땀이 많은 것 외에도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까?
김남일: 그게 癨亂(곽란)이라는 거예요. 토사곽란? 잘 아시네요. 토사곽란은 구토하고 설사하는 겁니다. 새벽 두시께 곽란이 일어났다.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 했다. 토하기를 십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했다(1597.8.21), 구토하고 설사하는 건 소화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소화기가 왜 안 좋냐 이건 비정상적인 생활이잖아요. 음식을 제대로 못 먹고 잠을 제 때에 못자고 맨날 스트레스 받으면서 골똘하게 전략을 짠다든지~ 이 분이 나라를 지킬려고 신경을 쓰고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1597.8.22),
이광용: 요즘도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도 스트레스 받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잠도 잘못 자고 그런 것들이 악순환이 되면서 건강이 더욱 나빠지고 이순신 장군께서 처방 받은 기록은 있습니까?
김남일: 대표적인 처방이 온백원이라고 합니다. 따뜻할 溫자에다 하얀 白자 써가지고 환백 형태로만든 거죠.
이광용; 온백원을 만드는 데 드는 재료가 되는 약재들입니까? 어떻게 잘 찾으셨네요.
김남일: (온백원-천초초, 후박, 인삼, 파두상 등 약재를 꿀로 버무려 환으로 먹는 약), 이걸 갈아가지고 환재로 만드는데 이 꿀로 버무려 가지고 환으로
이시원: 그거 제가 먹어야 해요, 저 소음인이거든요.
이광용; 몇 알 정도?
김남일: 네 알 정도 복용하셨다고 써있더라구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네 알을 먹었다 (1593.5.18),
이광용: 땀이 많다. 가끔 토사곽란 한다 간 밤에 토사곽란 하신 분?
이시원: 이순신 장군과 증상이 비슷해요. 저도 몸이 허하거든요. 저는 토하거나 식은 땀을 흘리고 평소에 몸이 차고 잠도 잘 못 자고! 받아먹을까요?
김남일: 지금 안 돼요. 처방을 받아 가지고~
최태성; 이순신 장군은 저와 체질이 다르네요. 저는 몸에 열이 워낙 많거든요.
이광용; 몸에 열이 많다. 그런 분은 온백원을 드시면 큰일 납니다. 만약에 지금 이순신 장군이 김남일 교수께 왔다 그럼 어떤 처방을 내리시겠어요?
김남일: 일단은 휴식, 다시 말하면 입원입니다. 입원~ 쉬면서 요양을 하시면~
이광용; 지금 전란 중에 입원이라니~? 입원은 투옥과도 같은데~
김남일: 그 정도 몸 상태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셔서 계속 하셨기 때문에 저런 증상이 계속 이어진 거예요. 일기에는 아프다고 적어놓고~ 자기가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이 딩굴겠지만 얘기를 안하는 거예요. 밑에 부하들이 마음이 약해져서 전쟁을 안할까봐
최태성: 너무 가슴 짠하다.
김남일: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분이에요. 그러니까 이 분은 휴식처방을 해야 되고 약을 먹고 쉬시면 좋아지지 않을까.
최태성; 아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순신 장군이 그럴 꺼예요, 됐소~ 아웃~
이광용: 내가 지금 어찌 쉬겠소? 이거죠. 자랑스러운 역사만 생각하다가 당신의 몸 상태의 얘기를 들으니까. 좀 뭉쿨하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김남일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허준: 사실 총사령관이 자기가 아프다고 드러내기는 쉽지가 않아요. 예전에 제갈공명이 사마달에게 아픈 걸 들키지 않을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던 모습이 있잖아요. 그때 당시에는 일본군들은 첩자를 많이 풀어놨을 때니까 그 누구한테도 얘기를 못 하고 내가 여기가 아픈데 라고 쓸 수 밖에 없었던 거죠. 한약이라도 한 재 지어다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최태성: 보약도 보약이지만 진짜 이걸 많이 드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술~ 아마 이걸 많이 드시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장군께서 술을 많이 드세요. 過夏酒(과하주) 라는 술이 있어요. (여름을 지나는 술), 지나가는 거예요, 어디를? 여름 夏자, 여름을 지나는 술입니다. 향 너무 좋죠?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손님들이 와 가지고 술을 마셨다. 술을 대접했다.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무려 90회 이상 나와요. 이순신 장군께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다 보니까 이렇게 달달한 맛으로 정신이 반짝할 수 있는 그런 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시원: 왜 스트레스 받으면 단 게 당기잖아요.
최태성; 그러니까 술을 먹다보면 사실 실수할 수도 있지 않나요?
이민웅: 만취했다는 기록도 여러 번 나와요. 그 다음에 주취라 그러죠. 주취로 인한 실수도 있습니다. 크게 취해서 돌아와서 밤새도록 토했다. 경상 좌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마셨다. 전송 후에는 취해서~
최태성; 방에 못 들어가시고!
최원정: 현관에서 뻗으신 거군요.
허준: 신발 못 벗으셨어~
이민웅: 종일 쉬시고 어두어져서 돌아왔다.
피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하셨잖아요. 사실 술 때문이 아닌가?
이민웅: 관련성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태성: 밥도 든든히 드시고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가 술을 드시다 보니까 게다가 몸이 허약하시니까~
이민웅: 장수들과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의논했다. 그런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목적이 부하들과의 소통, 리더쉽적인 측면에서 활용한 측면이 많았어요.
허준: 단합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말을 털어놓고 속에 있는 얘기도 하고 끈끈해 지죠. 이순신 장군은 본인이 희생해서 많은 사람과 회합을 가지셨던 것이죠.
최원정: 우리 매주 회식 하잖아요. 이순신 이순신 하잖아요.
최태성: 이순신 장군 따라하기~
최원정: 병사들과 함께 소통을 나누면서 전쟁일기에 남긴 이순신 장군, 그런데 전쟁을 일기로 남기지 못하고 성웅으로 남으셨습니다.
-------------(동영상) 해설: 1598년 11월, 왜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명과의 밀약을 통해 탈출을 도모했다. 난중일기엔 이때 왜군이 명에 바친 물건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1598.11.16),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줄 수 없었다.
명제독/代役: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네 놈이 나에게 칼을 겨누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이순신/代役: 두려울 것 없는 목숨이오! 조선 수군의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명나라 도독이 아니라 하늘이라 해도! 내 가차없이 베고 전장으로 나갈 것이오!
명도독: 네, 이놈!
해설: 탈출하는 왜선 추적을 명하는 이순신 장군
-------------------------XXXXX---------------------------
조선군관: 명나라 진영으로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순신: 잡아라
해설: 왜적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 까지 추격하였다. 1598년 11월 17일, 이날의 일기가 그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 했다(1598.11.17/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그리고 이틀 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숙연해 지는 분위기).
최태성; 이건 보고 싶지가 않아요.
이시원: 마지막 (조선 해군의 승리까지)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텐데~
최원정: 그런데 그런 마음이 안 들어요. 마지막 퇴로를 열어주고 전투를 안 치렀으면 저렇게 전사도 하지 않으셨을텐데~ 근데 이제 무사로서 정의감과 의지가 투철하셨던 거죠. 이 땅을 짓밟은 왜군을 어떻게 그냥 보내요.
이민웅: 정유재란이 임진왜란하고 성격이 다른 게 전쟁 목표 자체가 달랐어요. 조선 땅을 목표로 조선 백성들을 다 죽이고 코 베어가고 귀 베어간 전쟁이 정유재란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원수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거예요. 올 때는 너희들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맘대로 못간다. 아마 그런 마음에서 노량 해전을 펼치지 않았을까.
최태성: 죽음의 그 순간 남기셨던 너무나 그 유명한 문구? 뭘까요 허준씨?
허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아라.
이시원: 아냐, 아니에요. 나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최태성; 그렇죠, 맞습니다.
이민웅: “戰方急愼勿言我死” (전방급신물언아사) 전쟁이 바야흐로 급하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최태성: 전쟁 중 장수가 죽으면 부하 군인들이 동요할 거 아녜요. 그 동요를 막기 위해서 그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는데 결국 이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동요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것 같애요. 결국 돌아가던 왜선 500척 중에서 200척을 격파하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50척 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어가면서 죽지 않았던 이순신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이시원: 죽어서도 대승을 거두셨다,
허준: 살아 남으셔서 노량 해전의 기록을 두번 세번씩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피터: 제 생각에 넬슨 제독도 전쟁 하면서 전사 했잖아요. 언젠가 그런 글이 있었을 거에요. 그렇게 되니까 전설이 되는 거구 끝까지 싸우는 거죠. 그 모습이 너무 좋아요.
최원정; 사실 난중일기라는 게 친구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 처럼 미래를 준비해서 후환을 없앤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기록을 남긴 것 같애요. 그런데 의미가 되는 건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귀한 유산이 아닌가.
이시원;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이번 인생 망했어, 근데 이순신 장군을 보면 정말 울음도 많고 몸도 많이 아프시고 불행도 많았던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기를 통해서 스스로 단련하고 성장시킨 그 위대한 인물이 스스로 되신 분인 것 같다는 걸 난중일기를 얘기하면서 알 수가 있었구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후손이잖아요. 이런 정신으로 뭔가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성; 기록은 정말로 중요하구나 기록은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그 기억이 바로 역사가 되는 구나. 많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피터: 진짜 너무 인간다운 모습을 보니까 약점도 보게되고 그런 거는 더 존경하게 만드는 것 같애요. 진짜 사람이니까 나와 똑 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위대한 일을 했던 게 너무 기록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이민웅: 난중일기는 나라를 구한 영웅의 숨겨진 이야기 보물창고다. 앞으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 같애요. 연구는 계속된다.
최원정: 항상 만나 뵐 때 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통해서 알아봤고요.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8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① 진짜 이순신의 기록, 난중일기에서 정리)
①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격적인 조선 침공을 명령한다, 조선군은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20여만 명의 왜군 앞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를 당하여 순식간에 온 나라가 유린 당했다. 하지만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은 23전 23승을 거두며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에 실패하고 만다. 불패신화, 이순신 장군! 그는 1592년부터 1598년 11월, 눈을 감기 이틀 전까지 무려 2539일 간의 기록을 난중일기로 남겼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1597.9.15, 7년이나 이어진 장군 이순신의 모습부터 한 없이 약했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까지~
② 하루 종일 비가 뿌렸다. 거적 지붕 아래서 깊은 회한을 걷잡을 수가 없구나-1597.9.12, 그가 남긴 13만여 자의 진솔한 기록, 난중일기는 조선 수군을 이끈 한 장군의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 세계가 함께 보존해야 할 기록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조건-훼손되거나 소멸할 위기에 처한 귀중한 기록문을 보존, 이용하기 위해 선정,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에 우리의 난중일기가 등재되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난중일기는 1962년 국보 76호로 지정, 초등학생도 알법한 난중일기,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은 찾기 힘든다는 난중일기~
③ 이순신이 영국 넬슨 보다 유명한 건 적은 병력으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세계 기록유산을 선정할 때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야 하고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로 기록한 임진왜란은 일본이 동북 아시아로 세력 확장을 위하여 일으켰던 침략전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이 모두 참전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아시아 최초의 세계 대전, 즉 국제전쟁이다. 네델란드의 안네의 일기는 사춘기 소녀가 2차 세계대전 중에 6년여 동안 기록을 한 거다.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들이 독일의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16세의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의 일기다. 안네의 일기를 통해 독일이 네델란드를 점령할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모습들을 보는데 굉장히 중요한 기록물이다. 난중일기도 마찬가지다! 전쟁준비 과정이라든지 전쟁상황 이런 것들이 정말 상세하게 적혀 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사람 이순신을 알 수 있다.
④ 한국은 세계기록유산이 16편이 등재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 외에 다른 국보 기록을 남긴 게 있는데 그게 임진장초(壬辰狀草)다. 난중일기는 하루의 일정이나 공적-사적 만남, 개인적 생각 감정 이런 것들을 담고 있고 글씨는 빠르게 흘려 쓴 초서로 되어 있다. 반면에 임진장초는 국왕에게 보고한 공식문서다. 난중일기 제목은 정조 19년에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될 때 이순신의 일기 친필 초고를 해독하면서 편찬자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亂中日記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치열했던 7년의 기록, 7년 동안 전란이 이어지는데 정말 이순신 장군은 기록하는데 진심이셨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총130일), 5월초 까지 일기가 쭉 이어지다 중간에 끊킨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어있는 일기 (1592.6.11~8.23)는 한산도 대첩이~
⑤ 1595년 을미년 일기가 원본은 없다. 원본이 없어졌을 뿐이지 이 춤무공 전서를 편찬할 당시에 근거해서 볼만한 자료들이 있었다. 1597년 (총266일) 정유년 석 달이나 앞쪽이 비어 있다. 거의 다 1월부터 일기를 써나가셨는데 이 때는 앞쪽이 비었다. 이순신이 출병 명령을 따르지 않자 대노한 선조, 죽여야 마땅하다, 명령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罷職, 投獄, 이순신 죄수복으로 수레에 실려 끌려간다. 백성들 대성통곡,일본에 대항해서 수군을 이끌고 저들을 물리쳐라 라는 선조의 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직되고 투옥됐다. 다행히 사형만은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 장군, 그 시기 감옥에 갇혀 있어서 일기를 못 썼다. 중요한 것은 백의종군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다시 이어진다.
⑥ 1597.4.1. 晴(맑음) 得出圓門 (옥문을 나왔다) 라고 시작, 조카와 아들…(중략)…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이 정도의 착잡한 표현이다. 이날 저녁에 주위 사람들이 술을 많이 권해서 많이 마셨다. 몹시 취했다 라고 기록. 이순신은 조선 성리학이 낳은 참 인재다. 忠과 孝로 똘똘 뭉쳐 있다. 난중일기 어디에도 선조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한 표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 이때 일기를 두번씩 쓴다. 왜냐 우리가 가장 자랑스러운 전사로 기록하는 鳴梁大捷이 있다. 난중일기 7년 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일기를 쓴 날이 명량대첩 당일 일기다. 먼저 일본에 대해 자세하게 썼고 두번째 정유일기는 그것보다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추가되어서 보완적인 부분이 있다.
⑦ 이순신 장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문구~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세계 해전사를 다 뒤집어 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말 극적인 역전 드라마가 쓰여진 이 명량대첩, 백의종군으로 돌아온 전날 1597.9.15, 그의 앞에는 궤멸 직전의 조선 수군만이 남아 있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필사칙생 필생칙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이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 나를 따르라 (1597.9.15), 하지만 이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조선 수군의 배는 단 13척, 하지만 일본군의 배는 무려 330여 척이나 되었다. 엄청난 숫적 열세에 조선 수군의 사기는 이미 껶여있었다(1597.9.16),
⑧ 초요기를 올려라! 안위야, 군법에 죽겠느냐 아니면 싸우다 장수답게 죽겠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1597.9.16), 칼집에서 칼을 뽑아라! 장군의 독려로 다시 전장으로 뛰어든 조선 장수들, 그날의 일기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1597.9.16). 이순신은 이 날의 승리를 이렇게 기록했다. 차실천행 (此實天幸) 이것은 실로 하늘이 도운 기적 같은 승리였다(1597.9.16). 우리가 동네에서도 1:17로 싸웠다 해도 안 믿는데~이것도 기록으로 안 남겨놨으면 13대 333 누가 믿을까. 기록이 있으니까 우리가 믿고 추앙하는 거다.
⑨ 처음 쓴 정유일기를 보면 이른 아침에 정찰부대가 적출현 보고, 출전해 나가고, 살짝 위험하게 되었다가 다시 역전하는 순간 값진 승리를 거두고 그날 방사도 까지 후퇴하는 그런 모습을 시간 순서대로 꼼꼼하게 적어 놨다. 근데 그 뒤에 적은 속편인 정유일기2에는 적장을 참수한 후에 적의 사기가 껶였다. 그 다음에 진자 현자 총통을 쏴서 31척을 격파했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사실 대로 기록을 추가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1597.7.14)이 불과 2개월 전에 있었다. 두 달 후에 명량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장수들이 일단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장수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여러 배를 돌아보니 이미 일 마장쯤 물러나 있었다. 일 마장은 1리, 400미터 정도됩니다. 많이 물러나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묘연했다. 보일등 말등 했다.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중략) 사세가 낭패 될 것이다(1597.9.16). 대장선도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없어서 내 배를 돌리지는 못하고 이런 아주 생생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⑩ 난중일기를 보면 진짜 이순신 장군은 당근과 채찍을 너무나 잘 쓰는 장수였다. 당근은 적당한 크긴데 채찍은 엄청나게 컸다.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1592.1.16),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 왔기에 주모자 3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1594.7.26), 굉장히 엄격하시고 군법에 따라 다스리시는 혹독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워낙 전시다 보니 작은 실수가 위험에 처할 수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엄격해 지셨다. 원래 군형법이 일반 형법보다 훨씬 중한 처벌을 하는데 전쟁 중이니까 강할 수 밖에 없다. 다 이해하고 너무나도 존경합니다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병사들은 참 힘들었을 것이다. 수군병사들이 일을 잘 하면 소 5마리를 먹이도록 명했다(1597.9.9) 쌀을 줬다 라는 내용들이 나온다. 규칙만 잘 지키면 하라는 것만 잘 하면 된다. 거두절미하고 이순신의 전승은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끝에 얻은 기적 같은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였다. 이건 철저한 준비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⑪ 1594년 갑오년 5월 9일부터 시작해서 13일 잠시 주춤했다가 14일부터 다시 장맛비가 종일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장마는 5월말이 되어서야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1594년 음력 5월 9일은 양력 6월 26일경이다. 현재 장마기간과 유사하다. 이순신 장군 일기를 보면은 날씨를 안 쓴 날이 고작 전체의 42일이다, 2.6%에 불과 하다. 16세기 장마기간이 지금과 비슷하다. 18일에서 33일이니까 현재와 비슷하다. 요즘에도 게릴라성 폭우가 밤에 야행성으로 집중이 되는데 그때도 오전 보다는 오후가 밤에 많은 비가 내렸다. 난중일기의 자세한 날씨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자료로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기상이변이나 재해 등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난중일기 처럼 해안지역 날씨변화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거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쓸 때 날씨 표현을 정말 다양하게 표현을 했다. 무더운 날씨 습도가 높은 날씨는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1594.6.11), 큰 섬이 찌는 듯 하다(1594.6.22) 라는 표현을 썼다. 아주 추울 때에는 혹한기에는 추워서 살을 도리는 것 같았다 (1596.1.9), 추위가 갑절이나 심했다 (1597.11.26), 바다를 호령했던 장군답게 정말 하늘을 살피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⑫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해,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 그를 기다린 건 어머니의 죽음이다. 아흔 다섯의 어머니가 아들의 투옥 소식에 위중, 이순신은 급히 여수에서 아산까지 배를 타고 올라왔으나 돌아가신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1597.4.13), 어이하랴, 어이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으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597.4.19),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켰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의 지극한 사랑, 난중일기의 첫날 역시 어머니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1594.1.1), 일기 곳곳엔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난중일기는 아들 이순신의 애끓는 思母曲(사모곡)이었다.
⑬ 난중일기를 읽어보면은 울다 라는 표현이 다양하게 나온다. 울다 흐느끼다 통곡하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쓰면서 어머니를 天只(천지) 라고 표현한다. 하늘 天과 다만 只인데 유일한 하늘, 어머니를 부를 때, 천지 라고 부른다. 이순신 장군이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 데 위로 첫째와 둘째 형님들이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니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들을 먼저 보냈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순신이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극진히 모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라와 가정을 두루두루 섬세하게 살피셨다. 몸은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가족의 곁에 있었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난지도 모르겠다(1594.8.30), 굉장히 걱정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계사년 기록에도 아들들이 여기 저기 아프다는 걸 걱정하는 글이 자주 등장한다(1593.7.29), 아들 勉을 잃었을 때의 일기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 빛을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1597.10.14), 어머니와 아들을 잃고서 뭐라도 의지하고 싶은 한 사람의 인간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⑭ 고통스러운 표현이 네 글자로 나오는데 度夜如年(도야여년), 하루 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1597.10.14), 이 표현이 바로 아들 勉의 죽은 소식을 들은 날의 일기에 나온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 점을 쳤다. 17번 기록이 나온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흉한지 점을 쳤다 (1594.9.28), 아들의 병세가 염려되어서 첫째 점을 보고 난 다음에 길한 점괘가 나와서 다행이다(1594.7.13), 내가 쓰러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그 부담감 이걸 매일 안고 있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다 상한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몸이 불편하다고 기록한 건 90회 이상이다. 그 만큼 장군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순신 장군의 건강검진을 해본다. 난중일기만으로 이순신 장군의 건강검진이 가능하다.
⑮ 이순신 장군의 일종의 질병에 대한 기록이다. 피곤하다 그러면 인간적인 얘기다. 잠들기가 힘들다 밤새도록 머리가 아파서 앓았다, 꿈을 많이 꾸었다. 이런 기록들이 계속 나온다. 이건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이다. 본인이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써놓고 있다. 문진표다. 난중 문진표다. 난중일기 속 문진표에는 식은 땀~ 땀을 흘린 거를 자한증이라고 한다. 식은 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1593.8.12),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1596.2.30), 식은 땀이 등을 적시어 옷 두 겹이 다 젖어 이불도 젖었다(1596.3.17), 몸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기록을 토대로 이순신 장군은 환자다. 몸이 정말 안 좋은 상태에서도 전투를 계속해서 수행하였다. 전장은 정상적인 집생활이 아니다. 음식을 하루 세끼 제때에 먹을 수 없다. 거기다가 스트레스 받고 있다. 분석결과 소음계통의 체질이다. 소음인은 소심하고 꼼꼼하고 치밀한 전략 같은 걸 잘 짠다. 그러니까 몸이 속히 상한다.
ⓐ 땀이 많은 것 외에도 癨亂(곽란)이 있다. 토사곽란은 구토하고 설사하는 거다. 새벽 두시께 곽란이 일어났다.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 했다. 토하기를 십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했다(1597.8.21), 구토하고 설사하는 건 소화기가 안 좋아서 그렇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킬려고 신경을 쓰고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1597.8.22),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처방이 있다. 대표적인 처방이 온백원이다. 따뜻할 溫자에다 하얀 白자 써가지고 환백 형태로 만든다. 재료가 되는 약재들은 천초초, 후박, 인삼, 파두상 등 약재를 꿀로 버무려 환으로 먹는 약이다. 하루에 네 알 정도 복용하셨다.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네 알을 먹었다 (1593.5.18),
ⓑ 이순신 장군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단은 휴식, 입원을 해야 한다. 쉬면서 요양을 하셔야 그런데 지금 전란 중이라 나쁜 상태를 가지고 계속 전쟁에 나가셔서 저런 증상이 이어진 것이다. 일기에는 아프다고 써놓고 자기가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이 딩굴겠지만 얘기를 할 수 없다. 밑에 부하들이 마음이 약해져서 전쟁을 안할까봐. 너무 가슴 짠하다. 사실 총사령관이 자기가 아프다고 드러내기는 쉽지가 않다. 이순신 장군은 술을 많이 드셨다. 술을 많이 드시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장군께서 過夏酒(과하주) 라는 술을 많이 드셨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손님들이 와 가지고 술을 마셨다. 술을 대접했다.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무려 90회 이상 나온다. 이순신 장군께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다 보니까 이렇게 달달한 맛으로 정신이 반짝할 수 있는 그런 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만취했다는 기록도 여러 번 나온다. 주취로 인한 실수도 있다. 크게 취해서 돌아와서 밤새도록 토했다. 경상 좌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마셨다. 종일 쉬시고 어두어져서 돌아왔다.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과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의논했다. 그런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목적이 부하들과의 의사소통, 리더쉽적인 측면에서 활용한 측면이 많았다. 단합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속에 있는 얘기도 해야 끈끈해 진다. 이순신 장군은 본인이 희생해서 많은 사람과 회합을 가지셨다. 병사들과 함께 소통을 나누면서 전쟁일기에 남긴 이순신 장군, 그런데 전쟁을 일기로 남기지 못하고 성웅으로 남으셨다.
ⓒ 1598년 11월, 왜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명과의 밀약을 통해 탈출을 도모했다. 난중일기엔 이때 왜군이 명에 바친 물건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가져와 명도독에게 바쳤다(1598.11.16),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줄 수 없었다. 탈출하는 왜선 추적을 명하는 이순신 장군, 왜적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 까지 추격하였다. 1598년 11월 17일, 이날의 일기가 그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 했다(1598.11.17/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그리고 이틀 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유재란이 임진왜란하고 성격이 다른 게 전쟁 목표 자체가 달랐다. 조선 땅을 목표로 조선 백성들을 다 죽이고 코 베어가고 귀 베어간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이순신 장군은 원수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올 때는 너희들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맘대로 못간다. 아마 그런 마음에서 노량 해전을 펼치지 않았을까.
ⓓ 죽음의 그 순간 남기셨던 너무나 그 유명한 문구 전방급신물언아사 (戰方急愼勿言我死) 전쟁이 급하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전쟁 중 장수가 죽으면 부하 군인들은 동요한다. 그 동요를 막기 위해서 그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는데 결국 이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동요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었다. 결국 돌아가던 왜선 500척 중에서 200척을 격파하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50척 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어가면서 죽지 않았던 이순신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보여 주셨다. 죽어서도 대승을 거두셨다, 난중일기는 미래를 준비해서 후환을 없앤다 라는 의미에서 분명히 기록을 남긴 것 같다. 의미있는 건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귀한 유산이 아닌가. 이순신 장군을 보면 정말 울음도 많고 몸도 많이 아프시고 불행도 많았던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기를 통해서 스스로 단련하고 성장시킨 그 위대한 인물이 스스로 되신 분인 것 같다는 걸 난중일기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후손이다. 이순신 정신으로 뭔가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기록은 정말 중요하다 기록은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그 기억이 바로 역사가 된다. 난중일기는 나라를 구한 영웅의 숨겨진 이야기 보물창고다. 앞으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 같고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