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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강 창세기 22:1~13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59.16
26.10.10(토)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시험장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삭 헌제장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드렸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이 창세기 22장 내용은 사실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22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그 일 후에
이런 단어가 나오면 항상 그 일이 뭔지 분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일 후에 이 말은 지금이 이후에 나오는 내용 전체가 그 일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일이 뭔지 뭔지 21장 33절을 보십시다.
21장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지난 시간에 살펴봤죠. 아브라함이 자기가 거하고 있는 땅 왕인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평화의 협정을 맺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지식이 계속 성장하다가 절정에 이르렀단 말이죠.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만났던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 그러죠. 자식 한 명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씨를 주고 자식을 주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어지기 위해서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은 건강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믿음의 동기일 수가 있다고 그랬죠.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마지막 골인 지점은 아닙니다. 그저 내가 복 받기를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언제나 자기 생각 속에 가두어두려고 그러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만 하나님 뜻이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란 말이죠.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늘 낙담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 가르쳐 주신 것이 뭐죠.
창세기 17장 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가 살던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까 아 우리 집 종 엘리에셀을 내가 양자로 삼아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그것 아니다. 그러시니까 아내의 권유를 따라서 자기 집 여종 하갈 사이에서 서자를 먼저 얻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예 아브라함아 그거 아니야 나는 너하고 달라 너처럼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야
네 아내 경수 끊어졌지 네 아내를 통해서 자식을 낳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능한 하나님임을 일깨워 주심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와 동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는 늘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 왜곡된 이미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친 뒤에 이삭도 얻고 이삭이 젖을 떼기까지 건강하고 그리고 또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아브라함이 알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마지막 지점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에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 왜 예배당 안에서의 삶과 예배당 밖에서의 삶이 괘리를 이룹니까? 왜 우리 믿음과 현실이 일치되지 못해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못 믿는 거예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내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목적이 되는 것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이 세상이 목적지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세상을 뛰어넘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오랜 교제 끝에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장 34절이 이렇게 증거하지요.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 여러 날을 지냈다. 그래서 뭐 한 10일 20일 100일 200일 그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날들이라 그랬습니다.
여러 히브리 말라 라브라고 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지금 창세기 21장 하반절 이야기는 이삭이 젖을 뗄 때의 이야기니까 유대인들은 서너 살 때 젖을 뗐다고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야기인데 나중에 가서 살펴보겠습니다마는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자기 어깨에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갔거든요.
그래서 창세기 22장은 최소한도 이삭이 15살 정도 되었을 때로 생각을 합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렇다면 지금 여러 날이라고 하는 그 여러 날은 최소한 10년 이상을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거했는데 거기에 지냈더라 하는 이 히브리어 동사 구르는 정착민이 정착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가 아니라 여행객이 경주지를 경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나니까 이 땅에서 사는데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니에요.
내가 어디에서 살든 이 땅은 경유지에 불과하단 말이죠. 바로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믿음을 지닌 후에 이 말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시는 것이죠.
22장 1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칭할 때에 그냥 하나님이지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붙을 이유가 없죠.
그런데 바로 22장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할 때 이 하나님 앞에는 하라고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누구냐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75살 때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이 수없이 실수하고 실족했지만 끊임없이 그를 이렇게 세우시고 당신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시고 경수가 끊어지고 늙은 아브라함 부부로 하여금 이삭을 얻게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다른 하나님이 시험하면 그 시험을 노할 수 있죠.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까지 살아오시면서 여러분들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인생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건너올 때 그 고비를 하나님께서 넘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어제와 다른 하나님이 아니에요.
10:02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여러분들 왜 절망합니까? 어제 나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내일도 함께 하신다면 내 계산이 어긋난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과거에 책임져 주셨던 것처럼 내 삶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귀결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시험하다라고 하는 이 동사가 히브리 말로 낫사인데 여러분들 새 신자반에서 배우셨습니다마는 이 시험하다라고 하는 것은 주체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시험하는 주체가 사탄이 되면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템트 유혹하는 거예요. 사탄의 시험은 언제든지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명사로는 템프테이션이 되겠죠.
그러나 이 시험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시면 첫째로 문자 그대로 시험 테스트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왜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테스트 합니까? 장난치시려고 골리시려고 실족시키려고 아니죠.
시험을 쳐야 실력을 압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험을 쳐야 답을 압니다. 학생들한테 시험치지 않아 보십시오 실력이 안 늡니다.
왜 답을 알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테스트 시험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믿음의 답을 주시기 위해서 테스트 하시는 거예요.
두 번째로 그 낫사라고 하는 그 동사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실 때에는 훈련 디스플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까닭은 훈련하시기 위함이에요.
훈련의 목적은 뭡니까?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건강한 육체로 사느냐 병약하게 사느냐 하나님께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난하던 부하든 병약하든 육체적으로 강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만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셔요. 훈련하셔요.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우리를 파멸시키는데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믿음의 해답을 주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심이 위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에는 반드시 피할 길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감당한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거 의미를 모르고 보면 하나님이 꼭 장난치시는 것 같죠. 차라리 시험하시지 말지 시험하는데 너희들 감당할만큼만 시험주고 또 시험 당할 때 능히 피할 길을 주신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훈련하시지만 목적은 세우시기 위함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은 절대로 우리를 쓰러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결과를 책임져 주셔가면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거예요.
1절을 다시 볼게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부르시되 공표를 한번 해 보십시다.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저기 김집사님이 계시는데 제가 김집사님을 부른다. 부른다 하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일단 소리치는 거예요. 집사님 소리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야 아브라함아 이러신 것처럼 들려요.
그런데 히브리 말로 부른다라는 동사는 카라입니다.
지금 원전에 이 부르신다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이 동사는 카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소리로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상 대화를 나누시듯이 아브라함아 말씀하셨을 뿐인데 아브라함이 즉각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했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큰 소리로 부르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일 예배를 통해서 수요성경 공부를 통해서 구역 공부를 통해서 또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소리로 나를 향해 외치심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영적 둔감성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죠.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지금 이제 말씀하시는데 그 시험 출제하신 시험 문제가 뭔가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그 독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 쉬운 문제였습니까?
여러분 번제 아시잖아요. 그죠. 그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서 명령하신 제사 가운데에 번제의 특징은 제물을 완전히 소각해 버리는 겁니다. 제물의 안팎을 한 조각도 남기면 안 돼요. 완전히 태워서 재로 없어야 합니다.
내장도 다 씻고 뭐 다 사지를 절단하고 살고기를 전부 다 각을 떠서 다 태워야 돼 그러니까 그 100세에 얻은 그 아들을 그런식으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시험 문제를 출제하시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무엇으로 부르셨습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한 사람은 내 자식을 나의 소유가 아님을 고백해야 돼 내 자식이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내 삶으로 답변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시험 문제 주시는 거예요. 이삭을 네 자식으로 삼을래 내 자식으로 삼을래 네 혈족의 조상으로 살래 믿음의 조상으로 살래 한번 답을 써봐라
그래서 2절 보면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우리말은 다 붙어 있잖아요.
히브리 원전은 이게 떨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을 네 사랑하는 독자를 이삭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네 아들을 어떤 아들인가 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
여러분 내가 만약에 기업인으로서 하나님 내가 크리스천 기업인으로 살길 원합니다. 내 기업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슨 시험 문제를 출제해 주시겠습니까?
20:00
네 기업 자체가 네 것이 아니라 네 소유가 아니라 나의 소유임을 네 삶으로 고백해 보라 시험 문제가 주어지겠죠.
내가 내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에게 딸려 있는 모든 가족 권속이 네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네 삶으로 한번 보여봐라 시험문제 주시겠죠.
그러니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이 시험 문제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죠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시험을 치르는데 아무데서나 치르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땅 내가 지정해주는 바로 그 산. 거기에서 너는 응시해야 돼요. 시험 쳐야 돼
여러분 에이 회사의 시험치는 응시한 지원자가 시험 날 비회사에 가서 앉아서 시험 치면 그게 되겠습니까? 에이 회사의 응시한 사람은 에이 회사에서 시험을 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은 하나님의 테스트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를테면 내가 내 기업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시험은 나의 기업 그 현장에서 보는 겁니다. 부도가 나도 도망가면 안 돼요.
내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이 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시험은 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정을 등지고 도망가면 안 돼요 왜 내가 기업 기독 기업인이 되기 원한다면 해답은 내 기업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내 가정 속에서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도 능력도 책임지심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지시하는 곳 그 산에서 네 아들을 바쳐라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는데 모리아산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의 시험을 치렀던 바로 그곳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삭은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100살에 낳은 내 아들을 나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입니다 하고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바치는 거잖아요.
이삭만 바치는게 아니죠.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겁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성전이 섰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참 의미가 뭔지 알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다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계속되게 되는 것이죠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데리고 공표 한번 보십시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라 히브리 원전에는 보면 데리고 가라는 동사가 제일 앞에 있습니다. 데리고 가라 누구를 네 아들을 이렇게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는데 히브리어 원전에는 데리고 가라는 바로 그 뒤에 원컨대라는 의미의 히브리말 나아가 붙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말 보면 데리고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명령형이잖아요. 그런데 히브리 말에는 원컨대라는 의미의 나가 붙으면 명령형 단순 명령형이 아니라 그 명령에 대한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주는 권고형으로 바뀌어집니다.
명령형은 무조건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권고형은 너 한번 해보지 않을래 권고 그리고 결정은 네가 해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 원전 말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런 말이 됩니다. 아브라함아 너 내가 지시하는 땅 내가 지정하는 그 산으로 가서 너 아들 있잖아 네 사랑하는 외 아들 말이야 이삭이라고 이름 지은 그 아들 말이야 그 아들을 나한테 한번 번제로 바쳐 볼래 이 말입니다.
한 바쳐 보렴 그러니까 선택권을 아브라함에게 줬으니까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들여도 되고 안 받아들여도 돼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늦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이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준비하게 하고 그것을 메개하고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권고하셨습니다.
넌 네 아들 한번 바쳐볼래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권고를 권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절대 순종해야 할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인데 이 성경은 문학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술형도 있고요. 반어법도 있고요. 시적 표현도 있고요. 감탄문도 있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 이렇게 하라라고 명령으로 말씀하시지 않은 모든 말씀도 나를 향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습니다.
4절 제 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것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이 있던 브엘세바에서 그 모리아 산까지는 약 75km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나귀를 끌고 걸어가면 사흘 길이라는 거예요.
지금 사흘째가 되는 날이니까 이제 모리아산 바로 기슧까지 갔죠. 갔겠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가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할 그 모리아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흘 동안 아브라함이 큰 번민과 갈등과 고민 속에서 걸어갔으리라고 설명하는 그런 설명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을 네가 번제로 바쳐야 된다. 얼마나 갈등 했겠는가 고민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3절만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조금도 번민하지 않습니다. 주저주저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밤새도록 야 이 일을 어떻게해야하냐 바쳐야 되느냐 마느냐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밤을 꼬박 세웠더라면 아침 일찍 못 일어나죠.
해가 뜬 뒤에 두 눈으로 일어나서 안장도 천천히 지우고 이랬을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전부 과당이 성립이
안되어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5절 말씀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30:05
5절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지금 종들이 번제에 쓸 나무를 운반해야 되니까? 지금 아브라함을 도와서 모리아산 기슰까지는 같잖아요.
그런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는 그 종들한테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라 왜 그렇습니까?
시험은 아브라함 자기가 지금 받아야 되는 거거든요. 내가 시험을 치는데 남이 나를 도와줄 수 없어요. 학교에서 시험 치면 내 시험은 내가 쳐야 합니다.
그래야 내 실력이 늘고 내가 답을 아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시험을 치르는데 어떤 사람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라 내 자식이 시험을 치르는데 하나님을 시험을 통과하는데 부모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자식이 통과해야 돼요.
그래서 그 자식은 신앙의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도와줄 수 있다면 시험을 함께 받아서 도와주는게 아니라 기도로 돕는 것이죠.
내 가족 누가 시험을 당할 때에도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밖에 없어요. 시험은 모든 사람 그 개개인이 받아야 되는 것이거든요.
5절을 다시 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누가 우리가 공표하십시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 문제가 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번제는 머리칼 뽑아서 드리는 거 아니에요. 완전히 죽이는 겁니다. 완전히 재로 만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면 돌아올 때는 누가 돌아와야 돼요. 나 혼자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분명히 이삭을 번제로 바치러 올라가는데 그 예배가 끝나고 나면 우리가 내가 아들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이게 지금 아브라함이 공연이 한번 해보는 소리인가 허풍 치는 소리인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릴게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모리아산을 찾아가서 아들을 바치느냐 하나님께서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너에게서 태어나는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상대로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자신이 번제를 바쳐서 이삭이 죽어버린다. 하나님이 거짓말쟁이 되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대해서 변개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설령 번제로 바쳐서 재를 태워서 재가 되어서 완전히 없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사흘길을 번민 속에서 갔다 전혀 아닌 거죠. 아브라함은 그 믿음 속에서 갔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우리가 가서 예배드리고 우리가 돌아 올 것이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고 난 이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22장 1절이 그 일 후에 하고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자식 사랑 한 명 자식 한 명 사랑도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키워야지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키울 수가 있겠습니까?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그때까지 하인들이 매고 있던 번제 나무지게를 아들에게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최소한도 15살 이상은 이제 되었다고 보는 거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불과 칼은 뭐예요.
지금 아들을 번제로 잡을 칼 그리고 아들을 태울 불인 것이죠.
7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여러분 이삭이 아버지한테 아버지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나의 아버지요.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들아 이러면 되는데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뭘 강조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끈끈한 부자지간의 사랑을 이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 지금이 부자지간이 모리아산으로 함께 올라가는 겁니다.
7절 하반절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보니까 이상하거든요.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데 불과 나무 칼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제물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8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공표합시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삭아 걱정하지 말거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데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삭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죽어도 살려주실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삭 대신에 번제할 제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언약을 위해서 신실함을 위해서 반드시 준비하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신실하심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제 거기에 주위에 이렇게 나 뒹구는 돌멩이를 모아서 제단을 만들었겠죠. 그 위에 나무를 벌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자 여기에서 이상한 걸 우리 느끼게 됩니다. 이때 이삭이 몇 살쯤 정도가 됐다구요. 최소한도 15살
그러면 아브라함은 몇 살입니까? 115살 노인입니다. 노인이 어떻게 15살짜리 애를 묶어요. 아버지 제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당신을 위해서 믿고 갔는데 아버지가 야 너다 이러고 결박하려면 그 아들 도망가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결박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삭이 결박을 당해 준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에게 계속 전이되는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40:01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합니다.
이삭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삭아 아빠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 하나님은 절대 너 죽이지 않으실 거야
만약에 아빠가 칼을 너를 찔러서 죽어도 하나님이 너를 살리신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 있는 여러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들이 많지만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에 하나가 이 장면입니다.
나이 어린 15살 이삭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115살 된이 아브라함은 75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40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영원하신 하나님까지 믿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 이삭은 눈에 보이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하고 아들이 아버지 알겠습니다. 나도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결박해서 제단 위에 올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과 이런 관계여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 자식들이 교회 학교 와서 선생님들이 재미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외에 그 아이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내가 믿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자식들이 될 때 우리가 믿음을 조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우리 성경에는 주어 번역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전에는
10절 제일 앞에 아브라함이하고 또 주어가 또 있습니다. 강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서 칼을 잡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여요. 아브라함이 잡았습니다. 뭐 하려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잡는게 뭐예요.
손으로 잡는 것 아니잖아요. 잔치에 잔치 때 소 한 마리 잡자 그러면 자르는 거죠. 지금 번제로 잡기 위해서 죽이겠다고 칼을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한다라고 하는 것은 칼을치켜 들어서 그 아들의 심장을 향해서 지금 내려 꽂기 직전인 것이죠.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을 한 번 부르지 않았습니다.
두 번 황급하게 급히 제지하시는 것이죠.
누가 여호와의 사자가 그 사자가 누구신가
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 누구에게 아끼지 않았다고요. 내게 아끼지 않았다.
또 15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음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겠다.
그래서 이 구약 성경에서 얘기하는 여호와의 사자 말라크는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 하시기 이전의 제 2위의 하나님 그리스도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보여줄 보이실 때 말라크라는 단어를 썼거든요.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아 아브라함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때에도 11절 하반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즉각 응답했습니다.
12절 사자가 이르되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
네가 네 독자 100세에 얻은 독자를 너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의 것으로 네가 믿고 행한다는 것을 내가 이제 알았다 네 믿음을 이제 봤다. 확인했다. 너 시험 통과했어 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언제 야 너 믿음 이제 됐다라고 확인해 주셨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다음날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을 때 두 종을 데리고 이삭을 데리고 집을 출발할 때 사흘 동안 조금도 흔들림 없이 모리아 산을 향해서 걸어갈 때 모리아산 기슧에 닿아서 두 종에게 너희들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빠이 빠이하고 우리 다녀올게 이야기할 때 모리아산으로 걸어 올라갈 때 제단을 만들 때 아이를 설득해서 결박해서 제단위의 눕힐 때 칼을 뽑았을 때 치켜 들었을 때 아닙니다.
그 치켜 든 칼을 가지고 아이를 찌르기 직전이었습니다. 믿음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변치 않는 마음을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 이젠 네 믿음을 봤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항상 내가 정해요. 여기까지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그건 넘으면 안 돼요.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까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뭐 그런데 내 아이는 아니야 세속적인 관점에서 출세해야 돼 여러분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오래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히브리 말로 하나님을 믿는다. 신뢰한다는 말이 바타흐 그랬는데 그 바타흐라는 동사는 기댄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건 하나님께 기대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저 벽에 내 몸을 가서 기댄다면 내가 기댈 때 저 벽이 나를 버텨준다고 믿기 때문에 가서 기대지
저게 흔들흔들 하는 합판이면 합판인 줄 알면서 난 절대 안 기대지요. 내가 기댔습니다. 하나님께 기댔는데 나를 버텨 주실 줄 알았는데 안 붙여 주셔요. 꼭 내가 넘어가네 그래도 기대는 겁니다. .
언제까지 땅바닥에 넘어질 때까지 기대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그 상태인 겁니다. 땅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칼을 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네 믿음을 보았다.
그래서 이사야서 26장 3절이 이렇게 증거해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하나님께 기대는데 심지가 견고한 사람만 평강하다 그 말이에요. 왜 내가 기대는데 쓰러져요. 그래도 굳은 심지로 나는 믿어 쓰러질 때까지 기대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평강이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데리고 번제로 바치러 가면서도 그 마음속에 불안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매일 마음속에 불안이 있고 평강이 없고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해요. 내가 정한 선까지만 기대고 더 이상 안 기대거든요. 심지가 견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되 네가 이제 나를 이제 경외하는 줄 알았다
네 아들한테 손대지 말라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었습니다.
뭐 하려고 살펴본즉 눈을 들어서 좌우를 살폈습니다.
살펴본즉 한 순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숲에 걸려 있는지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 믿음이잖아요.
50:00
그런데 내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 아브라함의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아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안 죽여도 된다는 거야 그러면 준비하신 제물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즉각 머리를 들고 눈으로 살폈습니다. 아니나 다들까 뒤에 숲에 양 한 마리가 뿔이 숲풀에 걸려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수풀 하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사계절이 있고 강수량이 많은 우리나라의 수풀로 생각하기가 참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수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세바크라고 하는 히브리 말은 덤불이라는 말입니다. 무창한 숲이면 그 조그만 낮은 양 뿔이 걸리겠습니까?
낮은 덤불 더미인데 그 덤불에 양이 걸려 있는 것이죠.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일평생에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렸겠지만 이날보다 더 감격적인 예배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현장에서 아버지의 믿음이 이삭을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제물을 바쳐서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립니다.
믿음의 정신인 것이죠. 자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출제하신 시험을 통해서 여러 가지 답을 얻었습니다. 첫째 답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자식이 하나님의 믿음을 삶으로 고백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기업이 믿음의 기업이 되기를 원한다면 나의 기업이 하나님의 기업임을 나의 삶으로 고백하고 실천해야 돼요.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믿음은 끝까지 믿는 겁니다.
오늘 안 되었다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는 거예요.
언제까지 믿는가 죽을 때까지 사도 바울이 죽을 때까지 믿었잖아요. 그게 순종입니다. 내 목이 떨어져 나가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켜 주실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면 만날 것이지 않습니까? 믿음은 끝까지 믿는 거예요.
세 번째 아브라함이 얻은 다음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언약을 믿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신다 그 말이어요 그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후에 이 이전에 아브라함이 여러 번 실족하고 실수하지만 이 이후에 아브라함이 그런 실수 안 하잖아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숙한 경지에 올라가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얻은 답은 세바크는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라는 거예요. 지금 수양이 걸려 있는 것이 세바크 덤불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지금 모리아 산에 가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도이고 거기에 도로도 있고 길도 있고 다. 잘 닦여 있죠.
아브라함이 그때 이삭을 바치러 4000년 정도 돼서 모리아 산에 갈 때는 길이 없잖아요. 아무도 올라가지 않은 산이잖아요.
온 산이 세바크 덤불로 덮여 있을 거란 말입니다.
길이 없으니까 그 덤불 사이를 헤치고 올라가려고 하면 얼마나 귀찮을까요.
그 덤불 때문에 걸음이 더뎌졌겠죠. 그 덤불 때문에 산을 올라가는데 더 힘들었겠죠. 그 덤불이 산행에 제일 큰 장애물이 되었겠죠.
그런데 그 덤불이 없었으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양이 걸려들 수가 없습니다. 올라갈 때는 내 인생 행복의 장애물처럼 보였는데 고통처럼 보였는데 아픔처럼 보였는데 힘듦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세바크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세바크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세바크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세바크일 수도 있어요.
내가 지금 정말 피하고 싶은 어려운 세바크들이 우리에게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세바크는 때가 되면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해요.
내가 지금 육체적인 세바크에 있다고 하면 내가 지금 육체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내가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위대한 믿음의 답들을 어떻게 얻었는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시험을 멋지게 통과하고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알게 된 그 해답들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명실상부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모두 그런 복된 믿음의 조상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더 깊은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또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켜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거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에 참으로 귀한 해답들을 얻었습니다.
그 해답들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도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시험을 거치게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시험을 거칠 때마다 분명한 해답을 더 분명하게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든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입으로뿐만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는 해답을 얻어가게 도와주옵소서
믿음은 내가 정한 선까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는 것임을 아는 해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삶의 해답으로 확인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혹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에 원치 않는 세바크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까?
주님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세바크야말로 단순한 덤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은혜가 걸리는 하나님 은혜의 손길이라는 해답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시간이 지나갈수록 믿음이 더 성숙해지고 더 원숙해짐으로 인하여 우리로 인해 우리 자녀들의 삶이 새로워지게 도와주시고
우리로 인해 우리 주위가 새로워지게 도와주시고
우리로 인해이 사회가 맑게 정화되게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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