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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산(冠岳山) 연주대(戀主臺)
서울시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과천시에 걸쳐 있는 산.
관악산은 서울의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현(果川縣)에 속하였으며,
금양(衿陽) 방면에 있는 삼성산(三聖山), 호암산(虎巖山, 虎壓山)이라고도 한다.
2022-12-07(첫째 수요일 / 맑음/흐림)
코스 : 건설환경종합연구소 - 자운암능선갈림길 - 연주샘 - 깔딱고개계단 - 조망터(점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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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 청마(靑馬)
관악산을 가기위해 대전에서 오전 8:00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무궁화호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려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 서울대입구역에 내려서 5511(5513)을 타고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서 조금 오르다보니 간밤에 내린눈이 쌓여 올들어 첫 눈 산행이 된다. 구간구간이 얼어 조심을 해야했고 다행이도 많이쌓이지 않아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산행하는데는 큰 무리없이 할수가있다.
사당역에서 산행을 마무리 하고 영등포역 주변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고 영등포에서 18시 51분차를 타고 종착역인 대전에 20시 48분경에 도착을 하여 즐거웠던 관악산 산행을 마무리한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5악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관악산(冠岳山)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한남정맥이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에서 달기봉, 광교산 등을 걸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한강 남쪽에 이르러 솟구친 산으로, 동봉에 관악, 서봉에 삼성산, 북봉에 장군봉과 호암산을 아우르고 있다. 곳곳에 드러난 암봉들이 깊은 골짜기와 어울려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관악산에서는 안양천과 양재천 수계(水系)가 발원하는데, 그 상류지역 계류에는 담수어류가 서식한다. 그 중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연습림으로 흐르는 계류를 비롯하여 안양천 수계의 갈현천, 양재천 수계의 홍촌천·관문천·삼거리천·부대천·돌무께천·막계천·세곡천 등의 8개 하천에서 버들치·피라미·왜몰개·참붕어·비단잉어·붕어·미꾸리·미꾸라지·송사리·얼룩동사리·밀어 등 총 11종의 어류 서식이 확인되었다.
관악산 상봉에는 용마암(龍馬庵)·연주암(戀主庵), 남서사면에는 불성사(佛成寺), 북사면에는 자운암(自運庵), 그 아래 서울대학교가 있다. 관악산 서쪽에는 무너미고개를 사이에 두고 삼성산(三聖山, 481m)이 솟아 있고, 여기에는 망월암(望月庵), 남사면에는 염불암(念佛庵), 남동사면에는 과천시, 동쪽에는 남태령(南泰嶺)이 있다. 등산 코스는 신림동, 사당동, 과천, 안양, 시흥 등 다양하지만, 신림동에서 과천을 잇는 코스를 주로 이용한다. 대표적인 등산로는 서울대입구·계곡·연주대·정상코스이다.
산세는 험한 편이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도심에서 가까워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해마다 철쭉이 피는 기간에는 매년 관악산 철쭉제가 개최되는데, 올림픽 맞이 관악구민 화합 대축제라는 이름으로 1988년 6월 18일관악산 제1광장에서 처음 열렸다. 이후 철쭉제는 관악구 구민의 전통문화와 지역의 역사성이 담긴 특성 있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매년 구민의 날인 5월 1일에 맞춰 개최되고 있다. 관악산 철쭉제라는 명칭은 제2회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2003년부터는 기존의 관주도의 행사에서 탈피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여 관내 시민단체와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지역축제로 정착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관악산은 1968년 1월 15일 건설부고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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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에 신령스런 구슬이 있는 별천지가 있으니 이곳이 바로 관악산 연주암이다. 해발 629m의 기암 절벽위에 위치한 연주대는 한번 오른 사람들은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듯 가슴이 탁 트이고 번뇌가 사라지는 즐거움을 느낀다. 항상 스님들의 독경 소리와 중생들의 예경이 멈추지 않는 연주암은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관악사라 하였으며 관악산 정상에 영주대(靈珠臺)를 쌓아 신령스런 별천지를 열었다.
연주암은 조선 초 효령대군에 의해 중창되는 등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불교 공부와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연주암은 조선 초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효령대군 영정을 효령각에 봉안하고 있다.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큰 체격의 효령대군이 지휘관을 상징하는 등채를 오른손에 잡고 용좌에 앉은 당당한 모습이다. 효령각 주련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대군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출자왕국통불역(出自王宮通佛域) 앙첨천국상선대(仰瞻天國上仙臺), 스스로 왕궁을 나와 부처님 계신 곳 왕래하니 영주대 높은 곳에서 우러러 불국을 바라보네.”
원래 관악산 연주대(戀主臺)는 의상대사가 화엄의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대(臺)를 만들어 영주대(靈珠臺)라 불렀다. 영주는 <화엄경>의 “파도 밑에 신령한 구슬이 숨어 있다네(波底隱靈珠)”란 말에서 나온 이름이다. “식(識)의 물결과 파도 속에는 마음의 진주가 절로 숨어 버리지만, 마음의 티끌 속에 깨달음의 자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비유해 결국 영주는 불성(佛性)을 상징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6월 성간(成侃)은 ‘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에서 “서쪽 비탈로부터 오르기 시작하여 가다가 또 북으로 휘어드니 산 형세가 날카롭게 솟았다. 그래서 넝쿨을 부여잡고 겨우 올라가 보니, 집채 같은 바위가 빙 둘러 있는데, 그 밑은 거의 천 길이나 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정신이 아찔했다”며 영주대에 오른 느낌을 전하고 있다.
조선중기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은 ‘관악산으로 스님을 찾아감(冠岳尋僧)’이라는 시(詩)에서 “암자가 산속에 숨었으나 종소리는 감출 수 없다네. 누가 — 구름 뚫고 공색을 찾는가”하여 관악산을 멋지게 노래했다. 정탁(鄭琢)이 말한 <반야심경>의 공(空)과 색(色)을 떠난 세계가 바로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곳인 영주대이다. 또한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과천에서 은거하며 ‘관악산 영주대에 올라(上冠岳山靈珠䑓)’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기언(記言) 허목(許穆, 1595~1682)은 1678년 4월 8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악산을 유람하고 “영주대는 세조(世祖)께서 예불하던 곳으로 관악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했고, 좌상(左相) 권시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주대 절정에 올랐는데, 산의 돌이 매우 위태롭고 험하였으므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아찔하고 두렵소. 그러나 세상살이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탄한 길이라 할 것이오”라고 말해 세상살이의 위태로움을 영주대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조선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가 쓴 ‘관악산 유람기’에 “관악산은 영주대가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고 산승(山僧)이 말하자, 북쪽으로 올라 의상봉, 관악사와 원각사 두 절을 지나서 영주대 아래에 이르러 영주암(靈珠菴, 현 연주암)에서 쉬고,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 돌을 뚫어서 층계를 만들었는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바위틈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금씩 올라가 빙 돌아서 대의 꼭대기에 이르니, 삼면은 막힘없이 전부 바라보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서 있었다.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고 다시 돌로 처마를 만들어 불상을 덮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을 쌓았는데 돌을 쌓고 흙을 채워서 50여 명은 앉을 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 또 구멍을 파 등불 밝힐 곳을 만들었다”고 영주대를 둘러본 일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괄허취여(括虛取如, 1720~1789)스님은 ‘관악산 영주대(冠岳山 靈珠臺)’라는 시를 지어 부처님의 가피 충만하시기를 기원했다.
“관악산에 올라서 한양 도성 바라보니(冠岳登臨望漢城)
푸릇푸릇 맑은 기운 멀리 우뚝 서리네(蔥蔥佳氣遠崢嶸)
북쪽 호위 삼각산은 천년동안 변함없고(三山擁北千年屹)
남쪽 두른 한줄기 강 만고에 푸르러라(一水圍南萬古淸)
팔만가지 장안에 햇살 가득 비추니(八萬長安天日照)
삼천세계 부처님 등불 밝게 빛나네(三千世界佛燈明)
멀리 바라보니 푸른 바다 아득한데(遙看碧海蒼茫外)
지는 해 노을 가에 백로가 비껴나네(落照紅邊白鷺橫)”
이처럼 창건부터 1700년대 중순까지 ‘연주대’는 ‘영주대’였음을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연주대로 바뀐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여 진다. <일성록>에 을묘(1795) 윤2월16일 정조대왕이 수원에서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하에게 묻길 “관악산이 저기에 있구나. 연주대는 어디인가?”하여 연주대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해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어 보인다.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에 비추어 불교적인 이름 영주암과 영주대로 고쳐 부르는 것은 어떨까?
또한 과천 연주암에는 보경당(寶鏡堂) 보현(普現)스님이 근대 새로운 도상과 기법으로 1932년에 그린 불화가 있다. 보현(普現)스님은 축연(竺演)스님을 비롯한 서울·경기지역 화사들의 계보와 화풍을 잇는 화사로서 주목되는 스님이다. 아마타회상도는 중앙의 설법인을 취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뒤쪽에 가섭과 아난존자가 시립하고 있고 앞쪽에는 아미타불을 보관에 모신 관음보살이 연꽃위에 정병을 안치한 연꽃가지를 들고,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정병을 모시고 흰 연꽃을 들고 있다. 그 옆에는 좌우로 미륵과 지장보살, 문수, 보현보살 등 6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신중도는 중앙에 금강저를 두 팔에 감싸고 합장한 동진보살이 화려한 깃털 투구를 쓰고 있다.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뒤쪽에 제석천과 범천, 일월천자, 동남동녀가 자리하고 있고, 앞쪽에는 사천왕, 여래팔부중, 산신 등 선신들이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冠岳山), 화기(火氣)가 강한 산
관악산은 서울의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현(果川縣)에 속하였으며, 금양(衿陽) 방면에 있는 삼성산(三聖山), 호암산(虎巖山, 虎壓山이라고도 한다)도 관악산의 일부로 간주된다. 일찍이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의 고승들이 일막(一幕), 이막(二幕), 삼막(三幕) 등의 암자를 짓고 이 산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이 세 암자 중 삼막에는 677년(문무왕 17)에 원효가 삼막사(三幕寺)를 창건하였고,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호암사(虎巖寺), 망월사(望月寺), 염불암(念佛庵), 성주암(聖主庵), 연주암(戀主菴) 등의 암사(庵寺)가 있다.
관악산은 교가(校歌)에 단골로 등장하는 산이다. 서울 영등포 권역(구로동부, 영등포, 관악, 금천, 동작)과 경기 광명, 안양, 과천 지역에 있는 초중고교들의 교가(校歌)에 공통적으로 “관악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연세대의 교가에도 관악산이 등장하니, 관악산은 서울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의 규모도 위압적이지 않고 거리도 가까워 1년에 무려 700만 명이나 찾는다. 특히 봄이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펴서 철쭉제가 유명하다.
관악산은 풍수상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에 해당하기 때문에, 화기(火氣)가 강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화기를 누르는 압승책(壓勝策)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숭례문 바깥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연못을 두고 관악산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었다. 그러나 관악산의 화기가 더 강했는지 끝내 숭례문은 불에 타고 말았다.
산 정상인 영주대(靈珠臺)는 세조 등이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인데, 조선 후기에도 관악산에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또, 관악산 도적 떼가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관악산은 도봉산이나 삼각산과 비교해 유람을 즐겨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유기(遊記)나, 시문(詩文)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었다.
이해 2월 아무 날에 삼각산에서 방향을 돌려 관악산(冠岳山)에 들어갔다. 관동(冠童) 두서너 명과 함께 동강(東岡)을 넘어서 불성암(佛成菴)에 이르러 노승(老僧)과 이야기하였는데,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관악산은 영주대(靈珠臺)가 실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습니다. 그다음 가는 것은 자하동(紫霞洞)인데, 자하동이라고 이름 붙인 동이 네 군데 있습니다. 불성암에서 남쪽 아래에 있는 것을 남자하(南紫霞)라고 하고, 남쪽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을 서자하(西紫霞)라고 하는데, 모두 특별히 칭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영주대 북쪽에 있는 북자하(北紫霞)는 자못 맑고 깨끗하지만 그래도 동자하(東紫霞)의 기이한 경관만은 못하니 거기에는 못도 있고 폭포도 있어서 영주대의 다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절이나 봉우리 등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곧 저물녘에 서암(西巖)에 올라 일몰(日沒)을 보고 그대로 암자에서 잤다. …하략… 이익(李瀷),「관악산 유람기[遊冠岳山記]」
영주대(靈珠臺)는 연주대(戀主臺), 염주대(念主臺) 등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이 전한다. 이곳에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좌선했다고 한다. 다른 이름인 연주대는 고려의 유신들이 여기에 올라 개성(開城)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이후 효령대군이 수행했고, 세조가 기도했던 곳이라 한다. 연주암에는 아직도 효령대군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이익은 29살이던 1710년 봄에 관악산을 등정하고 유기를 남겼다. 이 글을 보면 관악산의 전체적인 승경(勝景)을 그려볼 수 있다. 관악산의 정상은 영주대이고 이를 중심으로 자하동(紫霞洞)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하(南紫霞)는 안양(安養) 쪽 경계에 해당하며, 서자하(西紫霞)는 삼성산(三聖山)의 삼막사(三幕寺) 일대, 북자하(北紫霞)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일대이다. 산승이 자하동(紫霞洞) 중에 으뜸으로 친 동자하(東紫霞)는 과천(果川) 일대를 말한다. 신위(申緯)의 호도 자하(紫霞)인데 자하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가 살았던 자하동(紫霞洞)과 서울대에 있는 자하연(紫霞淵)도 마찬가지다. 영주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꼭대기에는 평평한 돌이 깔려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수가 있었다. 그 이름은 차일암(遮日巖)으로 옛날 양령대군이 동궁 자리를 피하고 관악산에 왔을 때, 자주 이곳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던 곳이다. 해가 뜨거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작은 장막을 펴고 앉았다. 바위 귀퉁이에 구멍을 파서 요(凹)의 모양을 한 것이 넷이 있는데, 대개 장막 기둥을 매었던 것이다. 구멍은 지금도 완연하다. 대를 연주(戀主)라 하고, 바위를 차일(遮日)이라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채제공, 「관악산을 노닐다[遊冠岳山記]」
채제공의 유기에는 영주대 정상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양녕대군이 왕위를 아우 충녕대군에 물려주고 관악산에 머물렀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한 자취가 그것이다. 권력을 한사코 마다한 충녕대군이 햇살을 피했다는 전설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서울 쪽 하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포기한 권력을 아쉬워했을까? 동생을 선치(善治)의 기원했을까?
바위 벼랑 부여잡고 가파른 봉우리 올라
높고 높은 이 영주대에 올라왔네.
생각건대 여기서 하늘이 멀지 않으리
우러러보니 머리 위에 삼태성이 있으니
攀巖捫壁陟崔嵬 來上靈珠上上臺
想得去天應不遠 仰看頭上有三台
이응희(李應禧), 「관악산 영주대에 올라[上冠岳山靈珠䑓]」
관악산 정상까지는 노약자에게 그리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2014년~2016년 동안 관악산에서 633건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나온다. 이응희는 바위와 벼랑을 잡아가며 정상에 올라왔다. 올라와 보니 머리 위에 삼태성이 있는 걸 보니 하늘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덧없는 세월 가을 깊어 가는데
쓸쓸하게 올해도 함께 저무네.
올라서는 원기만 느끼면 되지
서울이 어디인지 따져 무엇하리
牢落秋將晩 蕭疎歲共遒
登臨但一氣 不復辨皇州
윤휴(尹鑴), 「관악산에서 가을에 바라보다[冠岳秋望]」
가을이 되면 한 해가 끝자락에 서 있게 된다. 정상에서 느끼는 쇠락한 계절의 감회란 결국 성취감과 허망함을 각성케 한다. 서울 쪽을 향해 기웃대지 않으리란 결심을 해본다. 권력과 욕망을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저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본다.
연행록에서는 송골산(松鶻山)을 자주 관악산과 비교했다. 이덕무의 「입연기」에는 “도중에서 북으로 송골산(松鶻山)을 바라보니 솟은 봉우리가 불꽃 같아 흡사 우리나라의 관악산(冠岳山)과 같았다. 그러나 빼어나고 윤택하기는 이 산이 더한 것 같다.”라 나온다. 이렇게 관악산은 흔히 연상되는 산이었다.
그러나 관악산은 긍정적인 함의보다는 부정적인 함의가 더 컸다. 이러한 평가에는 관악산의 화기가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악산 근처나 관악산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서 자란 규수와는 혼인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관악산을 마주했기 때문에 여자가 불같은 성미를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악산에 대한 기록은 남인(南人)들이 많이 남겼다. 출사(出仕)의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이 관악산에 올라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관악산은 끝내 버릴 수 없는 욕망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하는 쓸쓸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함께한 시간들이 넘 즐거웠답니다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