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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48
3월28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a2zLBB5Eo4s
(매일 방송 미사 리스트)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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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언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조금 특별한 유랑 설교가라고 하는가 하면, 사기꾼이요 사이비 교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합해 보니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분께서 메시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랜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실 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으로 인정하며,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복음 7장 41절)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잘 나가던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경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저주받던 못배운 군중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하던 이들은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요 석학들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최고 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 뭐합니까? 결국 그들이 목숨걸고 배운 바가 그들 앞길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그 잘난’ 명함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어떤 후보의 명함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없습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별의 별것 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웬만한 이력서 저리가라 입니다. 엄청난 학벌과 화려한 이력 앞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환한 미소로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한다는 말은‘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국민의 충복(忠僕)이 되겠다.’입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신과 변절을 밥먹듯 합니다. 국민은 하나도 바라보지 않고 자신만 바라봅니다. 국민의 충복은 무슨? 국민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나름 엘리트 집단의 최고봉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공인으로서의 품위나 성숙도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유치해서 차마 봐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비참함과 추함은 노력의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 앞에서 부단히 고민하고 성찰해야 마땅합니다. 정확한 식별을 위한 기도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시금 촉각을 곤두세우고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들뿐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도 혐오스럽고 심기가 불편해지는 위선이나 이중성, 허세와 거짓, 천박함의 끝판왕, 언행 불일치의 인물은 어떤 사람인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진실성과 진정성을 갖춘 사람, 품위와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게 너무 지나친 기대라면, 적어도 기본과 상식이라도 갖춘 사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성을 갖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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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리는 보편되다>
요즘 문제가 되는 ‘박사방’이란 집단이 있습니다. 성착취를 통해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잡혀서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악마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았다면 제 발로 나왔으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힘에 지배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사방이란 단체에 속해있으면서 악마의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그 공동체가 가진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 믿음이 진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에 지배당합니다. 그러니 삶을 바꾸고 싶다면 공동체를 바꿔야 합니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엔 알코올 중독자 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이혼하고 자녀를 태운 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 자녀들을 다치게 한 뒤로, 그는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을 떠나기로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안 되어 중독자들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잠시 술을 끊었다가 모임에서 나오면 이내 다시 마시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고 믿어 술을 끊은 이후에도 계속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끊을 수 있었습니다. 절주 모임에는 ‘우리는 술을 끊을 수 있다.’라는 강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공동체에 속해있으려는 노력으로써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요한 사도가 ‘왜 어떤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것일까?’를 평생 묵상한 것의 결과물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의 권력기관인 70명의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 ‘최고 의회’(산헤드린) 사람들과 그들의 구성원 간의 혼란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 예수님을 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하여 그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믿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최고 의회 사람이면서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던 니코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라며 반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반대하는 집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성경 어디에도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주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만을 연구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올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유다인들도 성경은 연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올 수 없습니다. 성경 연구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어떤 믿음에 지배당하느냐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에 의해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증언하는 것들을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 그 순서를 기억하십니까?
세례자 요한(믿음의 공동체) => 예수님의 일(업적, 소명) => 그리스도(구원자) => 아버지 => 성경
믿음은 이 순서대로 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제자단에 들어야 예수님의 일이 표징이 되어 그 사람에게 온전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성경도 의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응집시키는 믿음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진리는 보편됩니다.” 보편 되다는 뜻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같게 진리로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나쁜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시민에게 물어보면 대다수는 나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조장하는 단체에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믿음이 결속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천지에 있는 이들이 진리가 보편 되다는 것을 안다면 당장 거짓말을 부추기는 신천지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연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첫 단추인 세례자 요한을 잘못 선택하였기 때문에 그 뒤는 다 뒤틀리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보편된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여 ‘가톨릭’이란 말을 씁니다. 진리는 보편됩니다.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 것”(天知地知我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보편성에 어긋나는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곳에는 절대 머무르면 안 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주는 믿음이 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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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7,40-53 :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초막절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고 특히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b-38)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생명수의 원천으로 말씀하시고 또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이 초대는 바로 구원에로의 초대이며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참조 신명 18,15)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하느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면 베들레헴에서 나야지 않겠느냐며 논쟁을 하고 있다. 그분이 자라나신 나자렛에 가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즉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깜짝 놀랐다.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경비병들이 또한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라고 하였을 때, 그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49절)이라고 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법을 내리신 분을 믿었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업신여겼다. 결과적으로 율법교사인 바리사이들은 눈먼 자들이 되었고,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마드신 분을 믿은 이들은 보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51절) 하였을 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란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52절)하고 니고데모에게 핀잔을 주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52-53절 참조). 이것이 비극이다. 위대한 믿음의 체험이 하나의 무미건조한 논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은 우리가 올바로 알고 향유해야하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많은 경우,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 권력이나 지식이나 교만으로 쌓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것을 다 헐어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진정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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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그 예언자”는 일반적인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표현되는 ‘예언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자이지만 ‘그 예언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미 정해져 있는 한 명의 예언자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예고하신 이 예언자를 복음은 ‘그 예언자’로 표현합니다. 종말의 때에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보내실 예언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 가장 많이 적용하는 용어로, 유다인들의 기다림을 표현합니다. 일찍이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좌에서 백성들을 통치할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미카 5,1 참조).
그 예언자와 메시아는 장차 오게 될 구원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예언자이시며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합니다. 군중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애써 그것을 부정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몰아 심판하고자 하지만 군중이 이미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하여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자렛 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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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나무에 꽁꽁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커다란 나무에 묶인 새끼코끼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 달아나려고 애를 써 보지만 매번 실패하면서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코끼리는 몸무게가 수 톤에 달하는 어른코끼리가 되어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작은 나무에 묶여 있더라도 나뭇가지 하나 움직여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거나 실패를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창조하려는 노력이 사라져 무기력하게 됩니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생각 역시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을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 겸손한 삶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매일의 삶이 새롭듯이 늘 새로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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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님]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름대로의 틀이나 관점에 사로잡혀 보게 됩니다. 한 숲 속에 사냥꾼과 약초꾼이 들어갔다면 과연 그들이 같은 것을 볼 수 있을까요?
복음 안에서도 사람들과 예수님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자주 확인합니다.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의 딸이 자리에 누워 있을 때도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고, 예수님은 ‘잠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코웃음 치지요. 자기들이 제대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1453년 이전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관점으로 우주와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것이 틀렸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는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이 위험하다고 여겨 그를 없애버렸습니다.
자기가 보는 것만이 전부이고, 나와 다른 관점과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교만은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죄입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자기가 똑바로 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만행이 지나친 확신에서 저질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장애인, 새터민이나 준 것 없이 미운 사람, 가족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요? 그들에게 다가가 당신들이 보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 달라고 청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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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강 건너 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 건너에 불이 났지만 내 앞에는 물이 있기에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이 강을 건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 건너에 불이 나서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 높은 장벽 아래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안타깝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강도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강 건너의 불일지라도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그런 관심과 도움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마더데레사 성녀는 그런 관심과 도움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사순시기는 강 건너에 있는 사람의 아픔, 고통, 슬픔, 외로움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강을 건너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되었습니다. 중풍 병자는 걷게 되었습니다.
요즘 ‘강 건너 바이러스’를 실감합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바이러스는 강은 물론 넓은 바다를 거침없이 넘어옵니다. 장벽도, 울타리도 쉽게 건너갑니다. 강 건너 불은 보이지만 강 건너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미사를 멈추게 했습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예식도 멈추게 했습니다. 강 건너 바이러스는 본당에서 준비한 사순특강도 취소하게 하였습니다. 본당 단체의 모임도 멈추게 하였습니다. 강 건너 바이러스는 우리의 마음에 공포, 두려움, 걱정을 심어 놓았습니다. 격리와 봉쇄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을 막기 위한 대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대와 협력입니다. 관심과 배려입니다. 감염지역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치료제 개발에 대한 국제적인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염 확산에 대한 책임을 묻기 전에 확진 환자를 치료해야 합니다.
우주 공간에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빛도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주에는 빛과 시간 그리고 공간이 있습니다. 그 우주에 사랑이 있고, 그 우주에 의식이 있고, 그 우주에 우리가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블랙홀처럼 나타났지만 이 또한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희생, 노력, 연대, 공감, 사랑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블랙홀을 보았습니다. 편견과 이기심이라는 블랙홀입니다. 교만과 욕망이라는 블랙홀입니다. 바이러스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편견과 이기심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만과 욕망은 계절마다 찾아오는 감기처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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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누구를>
요한 7,40-53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 누구를>
말씀을 듣지 않은
높고 잘난 사람들
말씀을 듣고 새긴
낮고 못난 사람들
말씀에 대해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가르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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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한번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누군가가 저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저는 방종우 입니다’ 혹은 ‘저는 청담동 성당의 신부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우리가 각자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답은 많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자모회를 맡고 있는 만큼 어머니들의 단체 카톡방에 소속되어 있는데, 어머니들의 아이디에는 상당수가 아이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름 없이 “누구누구 맘” 이라고 설정해 놓으신 분들도 있고 혹은 자신의 이름 뒤에 괄호가 있는 상태로 아이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표기해 놓은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분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전화를 받을 때 동네 이름으로 받는 경우입니다. 극중 인물은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성북동입니다” 혹은 “평창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곧 동네 이름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에도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디가 있고 양복에 소속된 회사의 로고를 달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제 각각의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제가 방종우 야고보 신부라고 대답한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복잡해집니다. <무엇> 이라는 질문은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저는 “평창동입니다” 혹은 “저는 성북동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좀 꼴이 우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려 보자면, “저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합니다. 제 스스로 “하느님의 도구” 라고 하기에는 거만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 것일 뿐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지고 토론합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예언자”라 부르기도 하고 “메시아”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의 신분을 가지고 논쟁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후손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이 북 갈릴래아 지역의 나자렛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통상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 2장에서 보듯 마리아와 요셉은 로마 황제의 호적 등록에 관한 명령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으로 향하게 되고 그 시기에 예수를 낳게 됨으로써 메시아는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논쟁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다면 “내가 원래 갈릴래아 출신이어야 했지만 이런 사정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소” 라고 말할 법도 한데 이러한 대화에 좀처럼 끼어들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논쟁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반면 예수님이 침묵을 지키시는 이유는, 당신이 누구인지 보다는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느님의 희생제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 만으로 당신이 어디 출신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십자가 제단으로 걸어 나갈 뿐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욕심도 미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 앞에서 우리 또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에게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리기란 그 누구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피조물이기도 하며 그분을 위한 봉사자이기도 하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어느 하나 단정지어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하고 싶지만 사랑받을 만한 인물이 되는지 부끄럽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분의 피조물로써 얼마나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겸연쩍습니다. 그분을 위한 봉사자라고 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 안에서도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은한 향기가 되고 싶기도 하고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되고도 싶은데 무엇이든 제 욕심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주님을 뵈었을 때 조금은 자신있게 내가 하느님에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끌리는 대답은 “저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라는 답변입니다. 이렇게 강론을 쓰고 나니 이것이 앞으로 제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역시 오늘 복음 앞에서 이에 대한 대답 혹은 목표를 설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하느님께 무엇입니까? 당신은 과연 하느님께 무엇이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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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기도하면서…>
예전에 영광 ‘염산’이라는 성당에서 사목할 때 밤 9시부터 다음 날 6시까지 밤샘 철야 기도했던 일정표가 나왔습니다. 그때 생명의 말씀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2개를 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밤샘 철야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신자분들이 물어오지만, 기도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랑입니다.”라는 말을 대답으로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밤샘 철야기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기도는 기쁨이 되고, 기도는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그런 기도가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염산 성당 주일 미사 참례 숫자가 100명 정도였는데, 밤샘 철야 기도했던 신자분이 60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전 경비병들도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성전 경비병들에게 윽박지르며 말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그때 니코데모도 무슨 말을 했다가 핀잔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연구해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군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니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대놓고 믿는다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를 향하여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영광)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리고 그 눈먼 이를 고쳐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몸과 마음이 낫게 하는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모신 고운님들 안에도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습니다. “아멘, 알렐루야! 믿습니다.”
그렇다면 고운님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슬프거나 허전하지 않습니다. 모든 염려와 두려움, 실패와 상처가 다 주님이신 예수님께 맡겨져 있으니 이제 정말 행복해져 보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제 인간의 힘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으니 행복합니다. 조만간에 하느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19를 극복하고, 또한 성전에서 고운님들이 사제와 함께하고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고, 그리고 미사 후에는 웃으면서 차 한잔하면서 밥도 먹으면서 웃고 떠드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코로나 19로 고생하신 모든 분에게 하느님의 위로로 보상을 주시고, 몸과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저 두레박 사제는 항상 잊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 한 분으로 충만합니다. 행복합니다.”
고운님들 안에 예수님의 생명에 말씀, 사랑의 말씀, 용서의 은총, 치유의 은사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간직하고 느끼며 살아가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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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50)
♧♧ 시편 78편 35절…
"하느님께서 그들의 바위이심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기억하였다."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바위’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상징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의 흔들리지 않는 삶의 터전이셨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도 바로 하느님이심을 인정하고 감사했다는 말입니다.(시편 19편 15절. 참조) 이것은 그 동안 백성들이 하느님을 원망하며 다시금 이집트로 되돌아가려 했던 것(민수기 14장 3-4절. 참조)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36-37절은 백성들이 그 같은 태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금 하느님을 반항하여 행동했음을 나타내 줍니다.
♧♧ 시편 78편 36절…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 그분을 속이고 혀로 그분께 거짓말 하였다."
* 그들은 입으로 그분을 속이고...
여기서 ‘속이다.’는 ‘아첨하다’라는 말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타’는 본심을 감추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한 것을 뜻합니다.(사무엘 하권 3장 25절. 잠언 24장 28절. 참조) ‘입으로...’란 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찾았음을 잘 드러내줍니다.
* 혀로 그분께 거짓말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등에 떨어진 재앙만을 피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거짓으로 속이고 죄의 용서를 청한 것(34절. 참조)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회개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 시편 78편 37절…
"그들은 그분께 마음을 확고히 하지 않고 그분 계약에 신실하지 않았다."
* 그들은 그분께 마음을 확고히 하지 않고...
여기서 ‘마음을 확고하게 한다.’라는 것은 세상 욕심을 다 버리고 하느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이만이 전영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신명기 10장 12절. 잠언 3장 1절. 요한복음 4장 24절.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러한 선택된 마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야고보서 3장 10-12절. 참조)
* 그분 계약에 신실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시나이 산 계명을 저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택된 삶을 살기보다는 여전히 자신들의 욕심과 생각대로 살기를 원했음을 나타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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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옛날 어떤 나라의 왕에게 누군가가 매 한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아주 멋진 매였지만 처음에 앉은 나뭇가지에서 벗어나지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멋지게 나는 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유능한 조련사를 붙여도 보았지만, 이 매는 나뭇가지를 떠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주술사를 부르고, 철학가를 부르고, 그 나라의 모든 현자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이 매를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매가 하늘을 멋지게 날았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누가 이렇게 했는지 물으니 아주 초라한 농부였습니다.
이 매를 날게 했던 방법을 물으니 아주 간단한 방법을 말해 줍니다. “저는 그저 그 나뭇가지를 잘랐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런 나뭇가지 하나에 몸을 맡기고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훨훨 날아서 더 넓은 세상에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의 세상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돈, 명예, 욕심, 이기심, 관계 등등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나뭇가지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나뭇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내야 더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나뭇가지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편견과 이기심이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언자라고 또 메시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과 이기심이라는 나뭇가지에서 벗어나라는 표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면서 자신의 편견과 이기심의 나뭇가지에 계속 올라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메시아나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간 성전 경비병들에게는 속았다고 말합니다. 편견과 이기심이라는 나뭇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내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그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더 넓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나뭇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참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나의 나뭇가지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그 나뭇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나뭇가지를 용기 있게 잘라버리고 당신 품으로 날아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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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어느 본당에 강의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강의 시작 시각이 다 되었음에도 성당의 빈자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아니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지? 홍보를 전혀 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본당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강사를 초대해도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요즘 사람들은 돈과 연결된 것이 아니면 전혀 참석하지 않는다며 신자 탓을 계속해서 늘어놓으십니다.
세상 안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 때,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는다며 소비자 탓만 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업의 자질이 전혀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본당에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을 오지 않은 신자 탓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제뿐이 아니라, 어쩌면 모두가 남 탓만을 하면서 사는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남 탓보다는 상대방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세상이 그래서 함께 하는 세상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닐까요?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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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
-주님과의 만남-
얼마전 무지와의 전쟁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근원적 적은 무지입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이자 무지에서의 해방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무지에서의 해방-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무지에 대한 근본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 때 나를 알아감으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이것은 평생 과정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 관한 두 가지 생각들이 대립하고 있음을 봅니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지 분별의 지혜가 요구됩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분명 이들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로 비교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반면 편견이란 무지에 눈먼 완고한 이들의 반응도 있습니다.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극과 극의 판단은 오늘 날도 정치계의 여와 야의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편견과 맥을 같이하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경비병들을 혹독하게 몰아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아는 것이 병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듯이 편견없는 순수한 군중들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들의 완고한 편견은 니코데모에 대한 반응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실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경비병들이나 니코데모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로 참으로 편견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경비병들의 고백이요, 예수님을 밤에 찾아 와 만났던 예수님께 호의적이었던 니코데모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 판단하는 것이 온당한 일임을 밝히지만 이들의 반응은 막무가내 완고합니다.
참으로 편견으로 굳어진 무지의 벽은 얼마나 두터운지요! 비단 예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날도 그대로 재현되는 현실입니다. 지역감정에, 이념들에, 잘못된 프레임에 빠져 판단이 마비됐을 때 고착된 편견의 ‘무지의 늪’에서 탈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분명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실제 만났다 해도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례미사야서는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된 사면초가의 고립된 예레미야의 하느님께 대한 호소요 간절한 기도입니다. 무지와의 싸움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독한지 바로 예언자들의 운명이라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독서의 예레미는 참 외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역시 답은 궁극의 배경이자 힘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만남의 기도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결국 무지의 악에 대한 근본적 처방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기도와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아 갈 때 겸손과 지혜요 비로소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주님의 빛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무지의 어둠을 몰아 내시어 주님의 빛 속에 편견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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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 되기를>
오래 전 도울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앟은 마음을 감춘 채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지식이 명예와 안락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알아보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에게는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헛된 바람을 지니지도 말며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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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분명 예수님인데 그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올 뿐, 정작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요한 7,40)
"저분은 메시아시다."(요한 7,41)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분의 "말씀"에서 희망을 봅니다. 예언자적이고 메시아적이며 새 창조적인 기운이 그분 말씀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비록 종교 지배층만큼 배우지 못했어도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을 알아볼 때는 지식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하게 마련이니까요.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7,41)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소."(요한 7,52)
반면 예수님의 신원을 의심하고 반대하는 이들은 오로지 "출신"에 매달립니다. 과연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구하고 다스릴 분이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는 대목이 곳곳에 등장하지요(2사무 7,12-17; 시편 89,4-5; 예레 23,5).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호적 등록 덕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성경의 내용이 이루어지게 된 섭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우리의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니코데모가 용기를 내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율법을 들어 예수님을 단죄하는 이들에게, 율법에 근거해 예수님께 일단 기회를 드려보자는 의미였을 겁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하지만 그들은 이 말조차 무질러 버리지요. 유다인들은 율법과 예언서의 권위를 철저히 믿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권위를 빌어 타인을 단죄하던 그들이, 율법에서 제시하는 절차와 과정에 대해서는 못 들은 척, 이번에는 예언서의 권위에 기대러 그쪽으로 건너갑니다. 사람을 살리려 성경 안에서 길을 찾기보다, 사람을 겨누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권력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사람이 되신 말씀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말씀까지도 손아귀에 넣고 싶은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의 기도가 계속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예레 11,19)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사 53,7)의 표상이 등장하지요.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운명이 예언자의 운명과 오버랩 됩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 예언자들이나 주님이 택하신 길은 악에게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자신을 잠자코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겼으니"(예레 11,20)
예레미야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의탁합니다. 설령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다 해도 이미 주님 손으로 넘어간 송사이니 괜찮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배려했던 변론의 기회조차 묵살된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우리는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네."(영성체송)
사람들은 예수님이 없는 데서 예수님에 대해 논하고 단죄하고 심판합니다. 이 모두를 모르실 리 없으신 예수님은 그저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꿋꿋이 견지한 어린양의 온전한 의탁은 거룩하고 순결한 피를 세상에 수혈할 영원한 제사입니다. 세상은 그 피로 씻기고 해방되고 구원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님 수난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순히 듣고, 주님과 함께 침묵하며, 기꺼이 주님의 길을 동행할 은총을 청하며 사순 제5주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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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을 채우러 오신 주님
예수께서는 고통을 치워 버리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으로써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이다. -클로델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겪었지만 힘을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 3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 13)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시어 십자가의 죽이기까지 하시어 인간의 구원을 하셨던 분께서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채우셔서 당신의 함께하시고자 하십니다.(요한 3,16 참고)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으로 확증된 겁니다. 마치 산모가 피를 흘리면서 아이를 낳았기에 엄마의 사랑의 확증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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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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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 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시요,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할 입니다.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의 ‘선입견’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알량한 지식 나부레기를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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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침반>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 많이 안다고 ~
성경통독을 10번 이상하고
쓰기도 5번 했다고 ᆢ 석사, 박사라고?? ᆢ
주님의 뜻, 그 사랑의 깊이를
성경을 통해 만났다면
'그럴리 없다' 에 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분석하고 따지기보다,
오늘 사는 나에게 주님께서 과연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 에 마음 두면,
성경은 어떤 삶의 처지에서든 나침판이 되어줍니다.
"서툴게 단정짓기보다 먼저 나침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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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 52)
주님의 길은
이와같이
편협하지 않고
다양합니다.
예언자들의
출신 목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예언자들의
메시지입니다.
사랑의 소명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직도
모르고 사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갈릴래아를
아는 것이 아닌
우리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를
새롭게 하시고
새 역사를 쓰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을
진실로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갈릴래아라는
지역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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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 52)
사순 시기는 고정관념으로 뒤틀려있는 우리마음을 바로잡는 시간입니다. 바로잡기 위해버려야 할 것은 우리자신의 고정관념입니다.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서로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 피조물에게 푸대접을 받으십니다.출신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갈 곳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비천한 존재들입니다.
그 어떤 대상도 무시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무언지를 십자가를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진정한 우리의 모습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십자가의 진리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고정관념을 벗어나 옳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정화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모두 예외 없이 비천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갈릴래아 출신인 예수님이 오히려 우리의 고정관념과 교만을 정화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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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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