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님께서 지난 모임 때 독자성에 관해 공부했던 글 <규칙 만들고 지키기>와 더불어,
지난해 발달단계 처음 시작할 때 공부했던 글 <서문1>을 읽고 모임에 참여해달라 당부하셨습니다.
다음 모임은 10월 21일 수요일 10:30-12:30 줌화상회의로 진행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접속해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신청하신 분들에게 당일 시작 전에 줌화상회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보내드립니다.
<규칙 만들고 지키기>
2015. 3. 17. 집단상담 발제 글 / 문은희 (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어제 점심밥을 맛있게 먹고 윤미 이모가 탐스런 딸기를 한 접시 내놓았습니다. 아주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동그랗게 담았습니다. 어린이집 대신 알트루사에 오는 것으로 생일 선물 삼은 동화가 상석에 앉아 딸기를 받습니다.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먹기 좋을 거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작은 것부터 이모들과 나눠먹었습니다. 동화가 남긴 밥을 먹느라고 엄마 선희님이 늦어져 큰 것 두 개가 동화 엄마, 선희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하나는 엄마가 먹었는데 나머지 제일 큰 것을 동화가 원해서 엄마가 양보했습니다. 먹기 좋게 작게 잘라주었습니다. 그런 참에 츄잉껌이 마지막 코스로 나왔습니다. 딸기를 먹으려던 동화가 딸기접시를 밀어내고 껌을 먹겠답니다. 껌은 삼키는 것이 아님을 이미 잘 아는 세 살 동화입니다. 삼켜야 하는 딸기를 껌보다 나중에 먹을 수 없음을 압니다. 껌을 지켜주기로 하니 딸기를 안심하고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씹다가 입에서 껌을 꺼내 ‘놀이 흙’을 가지고 놀듯이 손바닥에 굴려 동그랗게 하고, 다시 입에 넣고 씹는 짓을 반복합니다. 아이는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이 재미를 허용할 수 없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손에 묻은 벌레가 뱃속에 들어가 배가 아파진다”고 합니다. 아마 청결 강박증에 걸린 엄마였으면 아이 손을 데톨로 빡빡 씻어주겠지요. (그래도 98% 균을 없애고 나머지 2%의 균으로도 배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손바닥을 찰싹 때려 아이를 울렸을까요? “껌은 단물이 빠지도록 계속 씹기만 하는 것”이라는 규칙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켜야하는지, 또 그 규칙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인지 아이는 배우게 됩니다.
어른들이 청결 규칙에 매여 있는 정도에 따라 아이를 대하는 양상도 다릅니다. 그러면서 청결만이 아니라 질서, 시간 지키기 같은 공동생활에 필요한 태도를 길러줍니다. 아이의 이런 재미와 어른의 요구 사이의 격차를 어른이 얼마나 안정감 있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규칙에 대한 아이의 태도를 만듭니다. 스스로 그 의미를 알고 규칙을 지키던가, 아니면 규칙에 얽매어 살던가,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던가, 아니면 뒤에 가서 몰래 재미를 찾아 하고 싶은 짓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가 독자성을 인정받는 ‘권리’를 누리고, 질서를 지켜야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원시적인 첫 흔적이 비롯되는 중요한 대목에 이른 것입니다.
아이는 자기 요구가 무시당하지 않고, 어른들에게 존중받으며 자라서, 아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려는 의사를 달갑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욕구불만으로 소리 지르는 아이의 입을 무지막지하게 틀어막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자기들의 기준과 판단에 사로잡혀 일방으로 “어른 말은 토 달지 말고 무조건 잘 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아이는 독자성을 갖출 수 없고 권리와 의무의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규칙을 깨는 것이 멋진 일이라는 듯이 여기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매일 터지는 끔찍한 사건 사고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은 허술한 처사가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안전하게 살기 원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안전하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규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욕구를 알아보는 어른들의 여유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처한 상황이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가 심각하면 마음의 틈을 전혀 마련해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힘든 고부관계에 몰두해서 아이를 뒤로 제쳐두고 미처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어려운 경제 상황이 우선순위를 놓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 통에도, 강제수용소에서도 마음을 알아주는 정신건강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정신없이 산다”는 말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 말기같이 강대국 눈치 보면서 허겁지겁 판단하는 독자성 상실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건강하게 살고파>
2019. 2. 15. 집단상담 발제 글 / 문은희 (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읽다보면 끔찍한 일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일어납니다. 끔찍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다 한 번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한 번만 살다가 죽습니다. 그 한 번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릅니다.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그런데 삶의 여정에서 언제인가 어떤 연유로 틀어져서 제대로 자기 길을 걷지 못하게 되어 끔찍한 결과를 낳게 합니다. 어느 누가 그런 결과를 바랐을까요?
어떤 부모의 품에 태어났는지 하는 것부터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질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어느 지역에 태어났는지, 어떤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인지 수많은 요인이 우리의 일상을 주름잡게 됩니다. 지난 주 심리학교실을 끝내고 점심 먹다가 내 어머니는 아버지 흉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농담으로라도 어머니 흉을 보신 적이 없다고 했지요. 그 자리에 있었던 희영님과 양미님이 그런 부모를 상상할 수도 없다고 했지요. 그런 부모를 가진 사람을 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 부모님이 완벽하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부모 품에서 자랐습니다.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자매가 있어도 자기와 부모 사이의 관계는 또 다릅니다. 자신의 성향이 부모님과 잘 맞아 어울리는 경우에는 좋은 관계를 맺어 순탄하게 살게 됩니다. 자기가 태어났을 때 집안 일이 망했을 경우도 있고, 집안이 잘 되어 형편이 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부모라도 아이들과 관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각기 다른 경향이 나타납니다. “뭐든 할 수 있어!” 하는 자신감이 있는가 하면 “남들이 뭐라 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헤아리며 협력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 여기는 불신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정신건강 공부방을 격주로 수요일에 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알려고 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신건강 사회운동을 하면서 함께 살아왔습니다. 자신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모람들을 보면서, 서로 다른 이웃과 갈등하며 갈등을 풀어가며 함께 서로를 알아가려 해 왔습니다. 처음 여기를 찾아왔을 때에는 자기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오해하고 풀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모르면서 자기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인간관계 문제는 자기중심의 틀로 풀 수 없으니 답답하여 상담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는 안목이 좁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차츰 다른 사람의 다른 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연한 눈을 가지게 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돌쟁이를 안고 온 엄마가 이제는 그 돌쟁이가 대학생이 됩니다. 이제야 건강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습니다. 한 푼도 손해 보면 안 된다는 굳은 마음이 풀려, 전에는 손해라고 여겼던 ‘착한 마음’이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르는 사이 대학생 남매가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됩니다. 이 경우만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이 돈벌이 잘하고, 몸이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건강이 중요하고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 알게 되고 실천하려 애씁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지닌 우리가 소수여서 이 사회에서 압력을 받습니다. “정신건강 사회운동이 밥 먹여주니?” “네 식구를 위해 돈 벌이 해야지!” 압력을 받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끔찍한 일들이 건강한 마음을 지녔다면 일어날 일이었을까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백 쉰 명 아이들의 부모와 친구들이 우리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나요? 낯선 곳에 와서 서글프게 고생하는 난민의 처지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가요? 쪽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이들, 길거리에서 헤매는 젊은이들, 대학 입시 압력에 몰린 아이들, 외모로 왕따 당하는 아이들이 모두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몰고 있는 사람들이 또 우리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