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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합의
이 홍사
트럭커라고 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록키산맥을 넘어 밴쿠버까지 장거리 화물을 수송하는 대형화물차 운전사들을 현지어로 트럭커라고 했다. 그 트럭커들 중에는 한국인도 다수 있다는 걸 유튜브를 통해서 알았다. 록키산맥은 일 년에 반은 설국이다. 그 빙판길을 대형화물차는 아슬아슬하게 넘어 다닌다.
아, 스릴.
유튜브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 것이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트럭커들은 캐나다에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미국 애리조나까지 내려가 화물을 싣고 캐나다로 돌아간다. 한 번 운행하는 것이 수천 킬로는 된다고 했고 한 번 나가면 한 달 가까이 되어야 집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했다. 트럭의 우리나라의 것처럼 짧은 게 아니다. 차의 길이가 근 20M에 달하는 것이 보통이란다. 도로가 좋으니 가능한 것이겠지만 운전석 뒤에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다. 차를 제작할 적에 그렇게 만들었다. 잠을 자러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것이 졸음을 쫓는 것이란다. 그 고통스럽다는 것이 나에겐 사치로 들렸다. 그렇게 길 위의 삶을 보내는 자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종횡무진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커의 삶을 영상으로 엿보고 한 마리 잘 빠진 말을 떠올렸다.
줄기차게 달리는 야생마!
말은 달리고 싶은 본능을 숨기고 있다.
본능?
나는 말인가?
왜 이렇게 말의 본능을 숨기고 있지? 왜 이렇게 달리고 싶은 거지?
말이란 전쟁이 없는 시대를 만나야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을 수가 있다. 트럭커들의 삶은 전쟁이었다. 문득 나도 그 전쟁에 참전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낯선 대륙을 누빈다?
그런 도전을 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지는 않을까?
미완의 합의!
나는 자신과 타협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언어의 장벽이나 체력의 한계가 있을 것인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지금 몽골의 평화로운 초원에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다. 참으로 평화롭다. 말도 그렇겠지만 인간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가 있다. 누구는 가난에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 세대가 인간답게 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세대라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격동기를 지나서 전후 세대로 태어나서 보릿고개를 맛보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어 핸드폰으로 다른 나라의 뉴스를 접하고 다른 나라의 주식을 사는 세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가 고생한 이야기를 다 들었다. 굶주린 이야기까지 실감나게 다 들은 세대는 드물 것이다.
격동기.
할아버지 슬하에 형제는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담배 농사를 짓고 할머니는 고향을 지키고 계셨기 때문에 남들 일곱이나 여덟을 낳을 적에 고작 셋이 전부였다. 장손인 아버지와 네 살 터울의 작은아버지, 그 아래로 뚝 떨어져 고모가 전부다. 다산을 생의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시대적 배경으로 따져 볼 때 단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께선 격동기에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고향에 땅을 사라고 돈을 보냈는데 번번이 배달 사고가 났다.
당시의 시스템으로는 온라인으로 보낼 수는 없었고 인편으로 보냈는데 배달 사고가 나더라도 당장에 확인할 길은 없었다. 배달 사고를 낸 이는 할아버지, 당신의 매제인 고모할아버지 둘이었다. 고모할아버지들께선 만주에서 돈을 들고 내려오는 길에 평양이나 개성에서 노름판을 기웃거린 모양이다. 그곳에서 번번이 탕진하고 빈손으로 돌아오신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고향에 계신 증조부께서는 아들이 만주에서 돈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라고 동네 입구에 있는 문전옥답을 상당히 많이 계약해 두었고, 할아버지께선 고향에 이미 땅을 많이 샀을 거라고 믿고 내려오시는 엇박자의 집안이었다.
당시에는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담배 농사를 지어서 독립군의 자금을 대어주던 것이 들통이 나서 수사망이 좁혀오자 두 번이나 일본군 주제소에 가서 조사를 받고, 그렇게 크고 기름진 땅을 버리고 몸만 빠져서 고향인 구미로 내려오신 것이다. 내려와서 사태를 파악하니 대형 배달 사고였다.
그 사실을 안 할아버지께선, 그 사람들 그거 참! 이 한마디만 하고 다른 말은 일체 입에 담지 않으셨다고 했다.
미완의 합의.
더는 원망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말을 하고 잊기엔 너무나 큰돈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고 할머니는 두고두고 원망이 어린 그 말씀을 하셨다.
그 사람들 그거 참!
그 말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훨씬 넘었는데.
배달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지독하게 가난했던 내 유년기도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해방 전의 일이고, 아버지의 소년기에 일어난 일이니 내가 감히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할머니의 원망을 들으면 항상 입맛이 썼다.
할아버지께서 만주에서 돌아오시고 나서 고모가 느지막하게 태어났다.
고모는 벙어리였다.
였다?
이젠 과거형을 써야 마땅하다. 고모가 겨우 젓이 떨어지고 옹알이를 할 무렵에 전쟁이 났다. 피난을 갔는데 여름이었고 청도의 어느 하천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한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모기와의 전쟁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멀건 대낮에 하천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졌는데 고모가 그 중심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포연이 가라앉자 흙먼지를 뒤집어쓴 고모가 거기에서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 굉음에 고모의 여리디여린 고막이 나간 것이었다. 고막이 나가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귀가 들리지 않으니 말을 배울 수가 없었다. 당시의 의술로는 고막을 재생시킬 수가 없었고 그럴 경황도, 형편도 되지 않았다.
고모는 격동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비록 들리지는 않지만, 눈치로 학교에 다니며 한글을 깨친 것이다. 고모는 글씨를 참 예쁘게 쓰는 달필이었다. 당시에는 농아학교가 따로 없었다. 고모는 수화手話를 배우지 못했다. 수화를 배우더라도 쓸 일이 없었다. 시골의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수화는 무용지물이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고모는 시집을 갔다.
고모에게 장애가 있으니 장애인에게 중매가 들어와 시집을 갔는데 천안에 산다는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다. 구미에서 천안까지. 당시로서는 참 멀리 시집을 간 셈이다. 나는 고모가 시집을 가는 것을 본 기억은 없고 사진으로 보았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족두리를 쓴 고모가 함께 선 흑백사진이었는데 내 기억처럼 빛이 바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할머니가 찢어서 아궁이에 불을 태워버렸다.
그 기억은 선명하다.
당시에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시집을 간 고모가 도망을 쳐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면 꿈을 추적하는 것처럼 혼몽하지만, 기억의 파편을 꿰어맞추면 어렴풋이 전체가 그려지고 이야기가 성립된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당시의 열악한 교통으로 그 장거리를 눈치로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기억의 파편을 주워 모아 편집을 하니 그 절름발이는 다리만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성불구였고 의처증이 심해 고모는 다락방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고모를 집에 있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고모가 도망쳐온 집안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조용하면 뭔가 불안하고 폭풍전야처럼 이상한 기류가 감돌았지만 어린 나는 그게 무슨 기류인지 몰랐다.
며칠이 지나자 그 절름발이가 친구인지 깡패를 샀는지, 건장한 청년들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당시에 예닐곱 살에 불과했지만, 그날의 내 기억은 생생하다. 당시에 사랑채에 증조부모가 계셨는데 그 기억은 없다. 어디로 가셨는지. 고모는 옆집으로 피신하고 사랑채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데려가겠다. 못 보낸다. 싸움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무리가 들이닥치자 음식을 접대했던 모양이다. 싸우는 과정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으니 음식을 대접한 게 분명하다. 언쟁이 높아지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달려들어 팔을 누르고 절름발이의 바지와 팬티를 벗기고 그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을 사랑채 작은 문밖에서 꼬리뼈를 사리며 방안의 기류를 감지했다.
절름발이의 그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는 실신했던 것 같다. 확인하니 성기가 없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말라붙은 그것, 겨우 오줌 나오는 대롱에 불과했다. 그것을 확인한 깡패들인지 친구들인지 꼬리를 내리고 그냥 돌아가자고 했던 모양이다. 골목을 나서는 그 무리의 발목까지 오는 코트가 아직도 기억에 어른거린다. 당시에는 그런 옷이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고모는 후리후리한 키에 피부가 상당히 희고, 예쁘다기보다는 잘 생겼다. 말을 하지 않고 보면 시골 처녀 같지 않다. 지금 생각해도 말을 못 하는 장애가 아니었다면 여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압도적이다. 내가 고모를 기억하는 건 그때부터다. 고모는 이태를 집안일을 도우며 보냈다.
어린 나는 고모에게 가끔 손가락을 펴 보였다.
새끼손가락을 펴서 천안이라고 입을 벙긋거리고 나쁘다고 더럽다는 뜻으로 침을 뱉고, 고모를 가리키고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걸 본 고모는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난다. 내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최초의 행동으로 기억된다.
그 후 고모부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마땅할 사람이 왔다.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다. 사지가 멀쩡한 아저씨였다.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던 사람이라 고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모를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우리 집 별채 뒷방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말하자면 처가살이였는데 술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고모와는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노래를 참 잘 불렀다. 별채 뒷방으로 가면 항상 노랫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어린 마음에 그 노래를 고모가 들을 수 없음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방안에서 그런 가사가 음표를 싣고 들렸지만, 당시에 마로니에가 뭔지 몰랐다. 어린 나는 나름대로 해석했다.
지금도 마루 밑에는 피고 있겠지.
마루 밑에서 피는 게 도대체 뭘까?
그 노래를 의미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흥얼거리며 다녔다.
할머니에게 고모부가 왔는데 왜 잔치를 하지 않느냐고 졸랐지만, 잔치는 하지 않았다. 당시에 결혼식이라는 말은 없고 국수를 먹는 잔치라고 했다. 고모는 사실상 재혼이기에 잔치하면 오히려 욕을 먹는다고 했다. 이제는 이해가 되지만 당시에는 매우 섭섭했다.
고모부에게 흠이라면 고아로 자라서 가진 것이 없고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게 흠결이었다. 하긴 고모부가 고아가 아니고, 가진 게 있고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말을 못 하는 고모에게 장가를 오겠는가? 집성촌인 동네에서는 고모부를 두고 모두 박 서방이라고 불렀다. 모두가 다 그랬다. 가진 것이 없이 몸만 왔으니 당시의 우리 집 살림도 그렇고 머슴살이가 필수였다. 뒷방에서 바로 이웃에 집이 도회로 나가면서 빈집이 되는 바람에 그 집으로 독립하고 전답을 장만할 때까지 머슴살이를 해야만 했다. 고모부는 술을 많이 주는 집을 골라서 반머슴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반머슴과 머슴이 있었다.
다른 데서는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그렇게 구별해서 불렀다. 머슴은 새경을 받고 매일 그 집에서 일하는 것이고 반머슴은 격일제로 자기 일을 하면서 새경을 반만 받고 일을 하는 것인데 고모부는 자신의 전답이 없지만, 반머슴을 고집했다. 이유는 하루 벌어서 하루는 술을 마시고 놀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할머니는 그 점이 매우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지론은 술도 술이지만 반머슴을 부리는 집에서는 힘든 일은 미루어 두었다가 반머슴이 오는 날을 골라서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지당한 말씀이었다.
고모가 별채 뒷방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가 고종사촌 외선이다. 외가에서 낳았다고 이름에 외를 넣은 것이다. 그때는 내가 이미 열 살쯤 되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기를 낳으면 책임감 때문에 술을 줄일 것이라는 할머니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고모부는 술을 여전히 마셨다. 고모도 아기만 키우면서 집에서 놀지는 않았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품팔이 일을 나갔다. 모내기도 하고 밭에 김을 매기도 했다. 물론 남의 일이었다. 고모가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살림은 펴지지 않았다. 고모부가 버는 것은 술로 탕진했기 때문이다. 고모가 열심히 해서 전답을 조금 장만했다. 누가 대처로 나가면서 헐값에 내놓은 땅을 빚을 내서 사는 방법으로 장만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정보를 듣고 소개를 하고 모자라는 돈을 직접 보증을 서서 장만해서 땅을 사게 했다.
전답을 장만하고 반머슴을 하며 머슴살이하는 집의 일이 없는 날이면 집의 농사를 지었느냐?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고모부 소유의 땅의 고모 혼자서 농사를 다 지었다. 쉬는 날이면 술추렴은 여전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오래 살지 못한다.
술에 장사가 없다는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
그것은 분명한 진리다.
외선이 아래로 아들 둘을 낳고 고모부가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에는 병명도 몰랐지만 지금 짚어보니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추정된다.
간은 침묵의 장기다. 얼굴색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 당시에 고모부는 사십 대 후반이었다. 고모부를 그렇게 원망하던 할머니께서 돌변하여 지극정성으로 갖은 약을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모부가 죽고 나자 고모는 슬픔을 딛고 더 억척같이 농사를 지었다.
어린 마음에도 고모를 보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당시에 나는 모파상의 소설을 접했다. 여자의 일생, 고모가 그 소설의 주인공인 잔느로 착각되곤 하면서 고모도 소설 속의 잔느도 더 큰 불행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내 바람은 자꾸 엇길로 들어섰다.
고모가 그렇게 어렵게 아이를 키우면 아이들이 착실하게 공부를 하며 잘 따라주어야 하는데 고종사촌 둘은 대가리가 좀 굵어지자 툭하면, 학교를 빠지고 가출을 해서 고모의 속을 태웠다. 나는 그 녀석들로하여금 자유롭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서 보지 않으면 잊을 수가 있다지만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니 일거수일투족 다 간섭해야만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고향을 떠나기까지 그랬다.
고종사촌 중에서 큰놈 이름이 성식이다. 성식이가 군에서 제대하고 바로 내가 데려왔다. 고모의 간곡한 부탁으로 굴착기 기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나는 굴착기 두 대를 가진 차주였다. 나보다는 열 살이 적은 놈인데 제 아버지를 닮아서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녀석을 굴착기 기사로 키우기까지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굴착기를 좀 배우다가 다른 일을 하겠다면서 나갔다가, 잊을 만하면 또 돌아오고, 근면하고 성실한 면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두 번 그랬던 게 아니다. 배우는 태도가 그따위였으니 남들이 배우는 속도에 비해 뒤 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을 굴착기 기사로 만들면서 마음고생을 한 것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 녀석은 내가 굴착기 두 대를 가지고 있을 적에 들어와서 굴착기가 일곱 대로 불어나도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니었다.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술을 먹고 있었으니 자격증 이론 공부할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한 이치. 일은 어느 정도 하는데 자격증이 없으니 기사로 쓸 수가 없고 늘 조수였다. 한 번만 통과하면 되는데 안타까웠다. 굴착기 이론에 관한 책을 사주고 공부할 시간을 편승해 주니 또 다른 공장에 취업한다고 나갔다가 일 년이 지나서 돌아왔다. 일 년간 다른 공장에 다니면서 돈은 모았나? 전혀 아니다. 술값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시 우리 집에 데려와서 골방에 잠자리를 제공하며 저녁이면 내가 직접 강사가 되어 이론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했다. 남들 일이 년 걸리는 것인데 녀석은 십 년이 넘게 걸렸다. 아내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해서 억지로 기사를 만들어 놓으니 다른 중기 업체로 달아났다. 간섭없이 굴착기 기사로 대접을 받고 싶었겠지. 아내가 먼저 이해하고 나를 달랬다. 당시에는 굴착기 기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제대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냈으니 혼기를 놓친 것이다.
한국에서는 키가 작고, 가진 게 없는 나이 많은 굴착기 기사에게 시집올 처녀가 없었다. 소개에 소개를 받아서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에서 처녀 하나를 데려왔다. 처녀를 데려오니 고모가 그렇게 좋아했다.
고모가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개운했다.
단지, 문제는 고모가 말을 하지 못하니 베트남 처녀가 말을 배울 수가 없었다. 고부간에 사근사근 말을 하며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그게 되질 않는 것이었다. 성식이란 녀석은 그때까지 남의 집 기사였다. 다른 이들은 그 정도 했으면 다 독립해서 자가 운전으로 굴착기를 한 대씩 가지고 영업을 하는데 녀석은 꼴사납게 기사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밥을 먹고 살면 되지 욕구를 다 채울 수야 있겠는가. 그 가운데 베트남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 성식이에겐 늦게 본 아들이지만 고모가 그렇게 좋아했다.
고모는 늦게 본 손자와 떨어지기 싫어서 밭에 일을 나가면서도 베트남 며느리에게 아이를 업히고 들에 데리고 나가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돌볼 정도로 좋아했다는 말을 소문으로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고모라고 생각했으며 마음이 흐뭇했다. 아내에 아들이 있으니 이젠 성식이가 마음을 잡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작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전화가 왔다.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상당히 불길한 예감이었다. 전화를 건 이는 형님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길했는지도 모른다. 생전에 전화를 안 하는 형이었기에 불길했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으며 희한하게도, 난데없이 위화도라는 말을 떠올렸다. 거기에서 왜 그런 말이 머리에 맴돌았는지 모르겠다. 위화도가 어디에 있더라? 나는 전화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고모가 죽었단다.
고모가 위화도에서 죽었어요?
위화도가 아니고 고모가 돌아가셨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멀쩡하시던 고모가 왜 돌아가셨느냐고 묻자. 성식이가 술을 마시고 끌고 들어오는 차에 치이는 사고가 났다고 했다.
무슨 그런 일이 다 있어?
형님이 마치 그렇게 만든 운명의 여신인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언성을 높인 탓인지 거실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깨어났다. 아내를 대동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서 자초지종 얘기를 들으니 사실이었다. 성식이도 있었는데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사고의 요지는 자정이 넘어서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고모가 찾아 나선 모양이다. 며느리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고모의 집이 지금은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 대리운전자가 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까지는 대리운전자가 가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리운전자를 불러서 들어가는데 소재지까지 대리운전을 시키고 거기서 집까지는 직접 끌고 들어가는 모양인데 시골길이고 단속이 없어 이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고모가 집에서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서 정부에서 노인에게 지급하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아들을 찾으러 나선 모양이었다. 사고가 난 곳은 마을 초입이었다. 굽은 길에서 고모가 마주 오는 차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이치. 휠체어가 날아가고 성식이는 내려서 어둠 속에서 논으로 날아간 고모를 찾았다고 했다. 성식이가 경황없이 하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결말 부분을 떠올렸다.
미완의 합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성식이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 눈을 마주치지 말고 살자.
성식이와 장례를 치르는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성식이는 사고의 가해자이자 엄마를 잃은 피해자에 해당한다. 그런 사고의 선례가 없었다. 그런 경우로 따지면 법은 고무줄이다. 처벌이 늘어질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는 문제다. 아버지 형제 삼 남매 중에서 작은아버지가 살아계신다. 작은아버지의 지시대로 성식이를 천하에 없는 효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처벌을 받지 않는다. 녀석이 처벌받는다고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집안이 거덜이 난다. 작은아버지는 그걸 내다보고 계셨다.
장례를 치르는 것보다 큰일은 동네 노인을 상대로 탄원서에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장애가 있는 노모를 모시고 싶어 살림을 나지 않았다. 평소에 그런 효자가 없었다. 이런 효자는 처벌하지 않아도 평생 죄책감에서 살 것이다.
탄원서를 받는 일은 차마 성식이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한다. 누가 대신 해야 하는 일이다.
미완의 합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그랬고 그 후에 서너 번 만났지만 성식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바로 눈을 쳐다볼 자신이 나에겐 없었다. 그 눈빛을 읽어낼 기력이 쇠진하고 없다. 그래 평생 서로의 눈빛을 읽지 말고 살자.
지금은 여명의 시간이다.
고모가 사고를 당하던 날 새벽에 왜 위화도를 난데없이 떠올렸을까?
고모가 위화도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새벽 담배를 물고 생각한다.
위화도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생각은 긴박한 순간에 살짝 피신해서 정신적 충격을 완화한다고 들었다. 그 새벽 불길한 낌새에 내 뇌리는 위화도로 살짝 피신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창이 밝아오고 있다.
지금 시간이면 지구 반대편의 트럭커들은 어디서 잠을 잘까 궁리하며 길 위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대륙을 시원하게 달리고 싶은 마음이 인다. 대륙을 종횡무진하는 트럭커. 구미가 당긴다. 내가 나이가 좀 적었으면 도전을 했을까?
트럭커 중에서 한국인 부부가 하는 트럭커가 있다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알았다. 남들은 낮에만 일하고 밤이면 길 위에서 잠을 자는 시간인데도 그 부부는 교대로 달린다. 밥을 먹는 시간 이외에는 무조건 달린다고 했다. 부부 중에서 여자가 운전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운전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육중한 차가 연약한 여자의 팔에 쉽게 놀아났다. 차는 크지만 참으로 부드러웠다. 부부간에 둘이 운전대를 교대로 잡으니 말을 할 상대가 있어 외로움도 줄었다고 했고 남들이 보름에 걸쳐서 돌아오는 길을 일주일이면 주파 한다고 했다. 그 부부 트럭커는 회사의 화물차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물차를 할부로 구입했다고 했다. 그 할부금이라는 빚도 이젠 거의 다 갚아간다고 했다. 유튜브 카메라가 그 화물차를 보여주는데 차는 육중하고 멋있게 꾸며 놓았다. 장거리 트락커들은 화물차를 취향대로 꾸미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부부가 하는 트럭은 처음에는 흰색이었으나 아내의 취향에 의해서 텅스텐으로 된 고가의 범퍼를 달고 빨간색으로 다시 칠을 했노라고 했다. 흰색은 설국에서 표시가 잘 나지 않아서 아내의 취향대로 색을 골랐다고 했다. 외장 뿐만이 아니라 실내도 취향대로 꾸민다고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어느 영화광은 차의 실내를 극장처럼 꾸미고 잠을 자는 시간이면 트럭 스톱에 차를 세우고 잠이 들기 전에 갖가지 영화를 본다고 했다.
어쨌거나 좁은 나라에 살면서 달리는 데 한계가 있는 나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부부가 평생 여행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고 했다. 장거리를 나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 기분은 어떨까? 집보다는 길 위에서 사는 삶이 몸에 배었다는 부부. 그 부부는 이 시간에도 길 위를 달리고 있겠지.
길을 나서면 사계절을 보름 안에 다 본다고 했다.
설국인 토론토에서 출발해서 로키산맥을 넘는 동안은 겨울이었고 북미의 국경을 넘어서는 동안은 봄과 가을을 보고 남미로 내려가서는 여름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트럭커들은 기회가 되면 남미에서 잠깐 해수욕을 하고 올라간다고 했다. 그 재미도 보통이 아니란다. 그래서 집을 나설 적에 사계절의 옷가지를 준비한다고 했다. 트럭커들은 몇 년을 했으니 몇 킬로나 마일을 달렸다는 것이 계산으로 나온다. 계산하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 누구는 몇 바퀴 돌았다. 그런 자부심으로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륙의 한구석이냐, 아니면 섬이냐는 물음에 나는 섬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존재하는 한 비행기로도 배로도 갈 수 없는, 한쪽이 차단된 섬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언젠가 길이 열리면 대륙으로 향하는 트럭커들도 생길 것인데 아쉽다. 대형화물차를 끌고 모스크바까지 더 나아가서 유럽까지 가는 꿈의 트럭커가 생길 것인데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깝다.
고모에게 대륙을 이동하는 트럭커의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기나 할까?
그런 일을 하는 부부가 있다는 걸 알면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고모는 평생 텔레비전을 완벽하게 시청하지 못했다. 브라운관을 보기는 했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미완의 합의.
그날 이후로 말도 없이 성식이와 합의가 되었다.
평생 눈을 마주치지 말고 살자고.
이 새벽에 나는 생각한다. 녀석과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고. 녀석의 눈을 피해 캐나다로 가서 트럭커가 되어 역마살에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늙고 있다. 늙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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