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리 계곡 최 건 차
올해는 한국전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설마리 계곡을 찾아 산화한 영국군 장병들을 애도하려니 ‘오, 데니보이 Oh, Danny Boy’의 원문이 떠오른다. “오, 사랑하는 데니야 고적대가 너를 부르는구나/ 골짜기에서 산기슭 아래로 여름은 가고 장미들도 시드는데/ 우리는 남아 너를 기다린다/ 꽃들이 시들어 가면 언젠가 네가 돌아오겠지/…데니보이, 오 나의 아들 데니보이 너를 사랑한다.” 전쟁터에 나간 사랑하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영국 사람들의 애틋하고 간절한 노랫말, ‘오 데니보이’를 부르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유엔군이 낙동강에서 적을 물리치고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이 수복되고 아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영국군은 임진강일대를 경계하게 되었다.
영국군 29여단이 파주시 감악산과 적성면 일대를 맡아 제1대대 글로스터(Gloster)부대가 마지리와 설마리 계곡에 배치됐다. 제2대대 후시리어(Fusilier)부대는 임진강 서쪽 어유지리 일대에, 29여단에 배속된 벨기에 대대가 임진강 북쪽에 배치되었다. 제3대대 얼스터(Ulister)부대는 여단본부와 함께 구룡리에 집결해 있었다.
북진을 계속하던 미군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중공군 기습이 시작됐다. 북한의 산악지역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중공군이 은밀하게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두더지 같은 중공군은 밤이 되면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인해전술로 미군을 공격해 왔다. 미 해병1사단은 한겨울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수천 명이 얼어 죽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미군이 게릴라식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회복됐던 북한지역을 다시 내어주고 후퇴하는 사상초유의 흥남철수작전이 감행되었다.
중공군은 서울을 신속히 빼앗을 제1차 춘계작전에 들어갔다. 1951년 4월 21일 주공격부대 인 63군단의 3개 사단 4만2000명이 임진강을 건넜다. 쓰나미처럼 밀려든 중공군은 파주시 적성면 일대와 감악산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곧이어 서울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설마리 계곡에 들어서려다가 뜻밖의 복병을 만나 주춤거렸다.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부대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글로스터부대의 설마리 작전이 전개되었다. 중공군은 설마리 계곡을 통과한 후 양주와 의정부를 단숨에 내려가 미아리 고개를 넘을 참이었다. 설마리 계곡 주변을 2중3중으로 포위하고 옥조여드는 중공군에 맞서고 있는 글로스터부대는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음을 각오한 혈전으로 4월 22일부터 3일간 설마리 계곡을 틀어막고 있었다. 4일째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보급지원은 물론 포병의 지원사격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여단장 부로디 준장은 비통한 심정으로 글로스터부대장 카네중령에게 자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여단에 합류하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투항하라는 권고의 명령을 내렸다.
1957년 제작된 영화‘콰이강의다리’와 같은 상황이 전게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 미얀마 정글에서 영국군 1개 공병대대가 일본군에 완전 포위되었다. 상급부대에서 구출작전이 불가능해지자 투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그대로 실행 됐다. 설마리 계곡에서 4일간 포위된 채 싸우고 있는 글로스터부대장 카네 중령은 투항대신 명예로운 최후를 택했다. 포병 사격이 중단되자 중공군들이 벌떼처럼 밀려오는 것을 보고 카네 중령은 생존해 있는 부하들을 향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대영제국의 용사들이여 우리는 적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지만 우리 또한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각자가 알아서 탈출하라. 나는 부상병들과 이곳에 남을 것이니 제군들은 부디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 주기 바란다. 신의 가호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리게 됐다.
기록에 의하면 부대병력 652명 중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나머지는 전사했거나 부상을 당한 채로 포로가 되었다. 글로스터부대의 용감한 혈전으로 중공군의 남진 계획이 큰 차질을 빗게 되었고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전역사상 단위부대로서 글로스터부대는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대통령이 부대표창을 했고, 영국정부는 글로스터부대 전원에게 무공훈장과 전공이 큰 6명에게는 영국최고의 빅토리아크로스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정전 후 설마리 계곡에는 글로스터부대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전적비가 세워졌다. 해마다 4월이면 전사자들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열리고 파주시는 글로스터부대의 추모공원을 건립했다. 설마리 계곡은 촬스황태자와 고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찾았고 지금도 수많은 영국인들이 찾아들고 있는 곳이다.
한국전 정전 60년을 되돌아본다. 유엔군이 흘린 고귀한 피와 글로스터부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준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고 있다고 믿어진다. 설마리 계곡에서 산화한 글로스터 용사들은 조선말기 대동강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존재들이다. 글로스터 시는 설마리을 잊지 않으려고 한국전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파주시에서도 우정의 건립기금을 모아 시장일행이 현지를 찾아 전달했다.
핵무기를 가졌다는 북한의 도발이 어느 때보다 우려는 시점이다. 설마리 계곡은 혈맹의 우방 위대한 영국이 머물면서 우리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곳이다. 그리고 한번쯤 찾아 볼만한 풍광 좋은 휴양지다. 201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