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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아라!"
어렵게 이어가던 공장문을 닫게 되고
우리 3식구는 몇벌의 옷을 싸들고 전남 시댁으로 내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 길로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곳은 월세를 내는것이 아니고 1년치를 한번에 내고 입주하는 식의 계약이었다.
시골 환경도, 남편도, 주어진 생활도 다 낯설기만 한 날들이었다.
생활은 어렵고 남편의 술취함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잦은 술취함과 취한 날엔 밤이 늦도록 주정이 이어진다.
처해진 현실에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불평,
장애인 딸 부모 입장에서 이렇다할 관심이 없다고, 경멸하듯 장인 장모를 향한 원망으로 일관했다.
그 앞에서 난 그저 고개숙이고 묵묵히 앉아있는것 외에는 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사랑으로 만났을 거라 믿었는데, 의외의 사랑하는 사람의 속내를 확인 할 수 있었음에
한편으로 더욱 가슴이 먹먹했었다.
사랑하리라는 믿음이 금이 가는 실망감으로 한동안 그를 바로 처다 볼 수 도 없고 마음도 아팠지만
돌아 보고 확인해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는 삶의 전부였다.
상처가 깊어지고 곪아진다 해도 벗어날 수 가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앞에 스스로 참아내는 방법뿐이었다.
사면 초가 같은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곤 한다.
그렇게 쉬 정응되지 않은 몇 개월이 지난 어느날 그는 시골에는 일할 곳이 없다며 서울로 올라 간단다.
생활비가 필요했었고, 그는 그렇게 두 모녀는 낯선 곳에 남겨두고 떠났다.
식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엄마로써의 용기가 필요한 현실이었다.
집 앞 행길 건너 쌀집에서 혼합 곡 20k를 외상한다.
반찬은, 멀건 된장국 아니면 고추장이었다.
시어머니께서 꽤 많은 장을 항아리채 주셨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론 리어카로 야채 판매하시는 아저씨께 외상도 한다.
때론 식품집 앞에서 서성이며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서기도 한다.
어느땐 뒷뜰 담 을 타고 오른 호박 잎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 먼저 회개하며 몇잎을 조심스레 딴적도 있었다.
하루 3끼 이어가는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지인분을 보내셔서 우리의 처해진 상황을 확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딱 한번 말린누룽지 한봉을 보낸 후론 그 어떤 관심도 없으셨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어릴적부터 '내일은 내가' 라는 의식속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견뎌내려 했다.
다행히 동네의 수출품 쉐타 무늬 넣어 짜는 부업을 할 수 있었다.
그 일도 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런 일거리였다.
한달이 지나 두달이 되어가도 그에게서는 연락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둘째 아이는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덧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이가 들고 있는 찐 감자도 그렇게 먹고 싶을 수 가 없었다.
주변에선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그에 대해서 묻기도 한다.
한집 아줌마들이 나보다 더 걱정인 듯 했다.
혹, 두 모녀만 두고 달아나지 않았나 싶기도 한 늬앙스를 느낄 수 었었다.
그러나 처해진 생활의 어려움은 내게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그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다거나 다시는 오지 않을 수 도 있을 것이라는
불신적인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월급날에 온다던 그는 두 달이 지나서야
오지 못하는 이유를 적은 편지 한 통만 달랑 보내었다.
편지를 받아들고 기뻐서 어린 딸아이에게 신나서 자랑을 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일은 했지만 월급을 못받아서 생활비를 못 보내었노라고,
곧 돈이 나오는 데로 내려갈것이라고 했다.
생활은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회답을 보냈다.
다시 한달 후 쯤 지나 그가 내려왔다.
역시 월급이 나오질 않아 10만원 정도 가불해 왔다고 한다.
그는 꽤 많이 부른 배를 보면서 놀라며 임신했었냐고 묻는다.
그리고 며칠 후 느닷없는 뜻밖의 말을 했다.
“또 딸 낳으면 셋이서 집단 자살해라.!”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나로선 그냥 흘려 버릴 수 없는 말이었다.
태몽이 아들 같다고 말해 주었다.
하루는 그가 배를 살 살 어루만지며 그림그리는 화가에게 지시하듯 뱃속 태아에게 말했다.
'눈은 엄마를 닮되 쌍꺼풀이 없어도 큰 눈이어야 하고,
코는 아빠를 닮되 너무 날카로으면 자존심이 강해서 사회 생활하는데 지장이 있으니까,
오뚝 하되 날카롭지 않아야 하며,
입술은 남자가 너무 얇으면 안되니까 적당히 두툼하게,
얼굴형은 아빠를 닮아야하고...,'
그는 나의 말을 믿어서인지 아들일것을 확신하듯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같이 한곳 한곳 얼굴 이목구비를 가슴으로 그렸다.
그가 아들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하루에도 수없이 아들을 주실 것을 기도했다.
이혼하면 부모에게 큰 불효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불구가 되어서 평생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불효도 죄스러운데,
두 아이가 있는데 이혼 함으로 인해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릴 수 없다고 다짐했고,
한편 그와 잘 살 수 있는 길은 그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아들을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을 주시 오면 주의 종이 되게 할 것이라고’ 겁도 없이 서원기도를 하고 말았다.
이미 태 중에 성별이 구별되었겠지만, 아들의 대한 간절함의 기도는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태몽을 꾸고 난 후 아들임을 확신했다.
서너 사람이 손을 펴야 둘러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큰 나무에,
빽빽한 초록의 싱그러운 잎새 사이로 온 나무에 가득히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 주렁 달려있었다.
포도나무는 아닌데 웬 포도송이가 열렸는지,
그리고 어찌나 굵고 탐스러운지 감탄하며 ‘우리 친정아버지 갖다 드린다’며
그 중에서도 알이 가장 굵고 큰 송이들로 따서 치마폭에 담으며 깨는 꿈이었다.
몇날 후 같은 꿈을 또 꾸었는데 두 번째에는 똑같은 나무에 굵고 큼직한 바나나가 나무 가득 열려 있었다.
또 가장 굵고 보기좋은 탐스러운 것들로 따서 ‘우리 친정아버지 갖다 드린다’며 치마폭에 담으며 깨는 꿈이었다.
아들임을 확신 했다.
너무 기쁘고 감사할 일이었다.
산달이 되자 그가 서울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편지를 보냈다.
내게 있어 그의 말은 곧 법이다.
유난히 큰 배를 한채 어린 딸을 데리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와 처음 만날즈음 보조기를 맞취 착용하기 시작했었다.
허벅지까지의 긴 장 보조기는 목발 없이 걷는데 힘이 되었다.
불편한 몸으로 산달된 배로, 어린손녀를 손잡고 앞에 선 딸을 본 모친은 할 말을 잃은 채 처다만 보셨다.
그렇게 해산할 날만 기들리는 죄스런 친정생활이었지만 일단 맘이 한결 편했다.
손으로 꼽은 날이 가까울 즈음 어느날 밤 양수가 미리 터졌다.
심한 통증으로 인해 병원엔 어떻게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양수가 미리 터졌음으로 너무 너무 힘든 해산이되었다.
유독 머리가 큰 아이는 엄마를 몹시도 힘들게 했지만,
아무 탈없이 4.3kg의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갓난아이 같지 않게 잘 깍아 놓은 밤톨 같다는 말을 들을 만큼 이목구비가 뚜렸한 잘 생긴 얼굴이었다.
아들은 뱃속에서 아빠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날이 갈 수록 그가 일러준 얼굴로 균형 잡혀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해산 후 한달 뒤에 10만원을 들고 찾아왔다.
병원비로 장모님께 드리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 백일 동안 친정서 잘 지내다가 내려가라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했지만 망설여 졌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서 사용할 맘에 배개 맡 장판속에 잘 넣어두었다.
보름 후 쯤 다시 찾아온 그는 라면이 먹고 싶다며 끓여 달라한다.
주방에 갖다 오니 그는 방에 없었다.
라면을 사러간줄 알았다.
한참을 기둘렸는데도 오지 않는다.
혹시 해서 장판을 들쳐보니, 잘 넣어둔 돈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가져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처신 할 수 있는 걸까.?!!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기가막히는 실망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배신감이었다.
사랑의 부피만큼 배신감도 컸다.
생애 처음으로 비통한 심정의 저주스런 기도를 울며 했다.
친정에서 백일을 지내고 시골집으로 복귀했다.
해산할 달이 다 되도록 전혀 관심도 없던 시어머니는, 몇 날이 지나지 않아서 찾아오셨다.
그에게 손자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시다.
잘생긴 얼굴로 의젖하게 누워있는 손자를 보시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기저귀를 내리고 고추를 확인하시면서 연실 웃고 계셨다.
그도 그럴것이 8남매에서 2형제인데, 큰 아주버니는 딸 만 둘 낳고 단산한 상태였고,
하나뿐인 광산 김가의 장손이 될 유일한 친 손자이니 말이다.
그 후로 시어머니는 이틀이 멀다하고 왕래하셨고, 어느 날 같이 살고자 하시는 뜻을 밝히셨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침 1년 계약이 만료가 되어가므로 방을 비우든 제 계약을 하든 해야했다.
시어머니는 두 칸 짜리 방을 알아보시는 듯 하시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예전에 당신께서 사셨던 주택의 방 두칸 짜리를 계약하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뒤 몇날 후 꿈에 정장을 한 친정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아라.!!”
꿈 속 친정아버지의 엄숙한 표정과 전해 주신 단호한 말씀을 몇 일 동안 되뇌여 보았다.
왜 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참으로 의문이었지만,
시 어머니께는 선듯 말씀드릴 수 가 없었다.
이미 계약을 하셨고, 또 신중한 분이셨기에 빈손인 난 그저 처분만 바라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방 얻는 일에 많은 수고를 하셨을 것이기에
이렇다한 꿈을 꾸었다고 이견을 말씀드리기엔 면목이 서질않아서 그저 꿈으로만 돌리고 말았다.
계약 만료가 되고 우리는 그 윗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은 꽤 넓은 집이었다.
대문을 지나 몇미터 부터 잘다듬어진 잔듸가 깔려 있었고
안채 현관문 계단 앞 까지 판판하게 다듬어진 둥근 모양을 한 돌이 징검다리처럼 깔려있었다.
넓은 뜰 가장자리로 여러 가지 오래된 나무가 짜임새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무화과 나무는 설익은 열매를 나무 가득 달고 있었다.
꽃이 필 만큼, 오래된 듯 한 고무나무도 큰 키로 온 뜰을 가리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빙둘러 연결 지어지는 뜰에는 아기자기한 꽃들이 꽃봉오리를 앙증스레 맺고 있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연록의 보기 좋은 색을 띄고 있었고...,
이사한 집은 전체적으로 초여름의 멋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주인이 사는 안채는 마당보다 1.5m는 더 높은 지대위에 지어져 있었다.
잔듸를 지나 여러 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울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문에서 부터 뜰 가상으로해서 길게 세면 바닥으로 되어있었다.
마당 구석 한켠에는 수도 대신 우물이 있었다.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그 우물 물을 식수로 사용해야 했다.
무화과 가지사이로 오르는 우물 옆 양철 계단을 다 딛고 올라서면 세탁물을 말릴 수 있는
꽤 넓은 옥상이 있고, 그곳에 올라 서면 주변 풍경을 둘러 볼 수 가 있었다.
이사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갔던 그는 간혹 내려올 때 마다 빈 손이였고
오히려 재료비네 뭐네 하며 시어머니께 돈을 빌려갔다.
어느날 시 어머니는 당신이 일을 해야겠다며 식당으로 취직하셨다.
식당에서 침식하시며 주에 한번씩 오셨는데, 오실 때 반찬을 조금씩 가져오셨다.
그럴 때만 몇끼니 반찬있는 식사할 수 있었고 그 외는 고추장에 비벼먹거나 건더기 없는 된장국이 반찬의 전부였다.
그가 오면 값을 마음으로 외상으로 혼합곡 20k 구입한다.
외상 자체를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환경의 지배를 받는 다는게 맞았고, 또 엄마로서의 용기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긴장한 앳띤 새댁 얼굴을 시골 인심은 기꺼이 믿어주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날이 갈 수록 수유양이 현저히 줄어가는 것을 느꼈고,
왠지모르게 체력적으로 쉬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 닫힌 넓은 집은 종일 적막 했다.
이사 하기전 3가구가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포함 4가구가 되는 것이다.
각 가구당 1명씩 사는것 같았고, 언제 나가는지 언제 들어오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늘 빈 집처럼 조용했다.
안채에 사는 주인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줌마는 다른 곳에서 살고, 아들 둘은 서울 유학생활을 하고 있고 아저씨 혼자 사신다고 들었다.
일상 세살박이 어린 딸만이 유일한 대화의 상대자였고,
펌프로 우물물을 끌어올려 아이의 기저귀 세탁하는 일이 하루의 유일한 일거리였다.
이사하고 몇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집 근처 150m 반경에 있는 넓은 파밭이 파헤쳐지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물을 짖는 공사장에서 지하수를 끌어 올려 사용하는 탓인지
지대가 약간 위인 듯한 우리집의 시원스레 잘 나오던 우물물이 날이 갈수록 양이 줄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탁을 하기 위해서는 오전내내 기다려야 했다.
어느날, 궁굼해서는 우물을 덮고있는 나무 뚜껑을 열어본 순간 그 자리에서 놀라 주저 앉을뻔했다.
우물 안 둥근 벽 둘레에 귀뛰라미 들이 새까맣게 빙들러 붙어 있었다.
'세상에! 이물을 끓이지도 않고 음료처럼 마셨으니...!!'
지치는 몸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음료였는데..,
그 물을 마셨다는 생각을 하니 온 몸이 소름 끼치기 까지 한다.
그날 후로 식수는 주인집 부엌의 전기로 끌어올리는 지하수로 대체해야 했다.
눈치도 보이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식수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비가 내리니 아궁이 입구까지 빗물이 차 올라서 퍼 내어야 했다.
장마가 지속되면서 방안이 온통 습한데도 아궁이에 연탄을 피울 수 가 없었다.
더욱이 방바닥으로 적잖은 습기가 올라왔다.
저녁에 두꺼운 요를 깔고 누어도 아침이면 막 탈수 해 놓은 빨래처럼 요와 이불 전체가 온통 눅눅했다.
그나마 맑은 날에는 볕에 말릴 수 있지만 비가 몇 날 계속 내리면,
건조되지 못한 습기찬 눅눅한 요 와 이불을 다시 펴고 잠을 청해야 했다.
진짜 싫었지만 어쩔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갈 수 록 밤이 너무 싫고 두렵기까지 했다.
몸 눕힐 따뜻한 아랫 묵 온기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어린 두아이의 체온 유지를 위해 같이 꼭 끌어안고 잔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많은 비의 긴 장마는 지속 되었고
그즘.. 밤은, 또 방은, 피곤한 몸이 쉴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처가 결코 아니었다.
벗어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견뎌내야하는 막막한 공간이었다.
아침마다, 습기에 젖은 몸을 겨우 일으켜 앉히고
구석 구석의 세포들이 무너져 내린 듯 한 기분 나쁜 기운을 느껴야만 했다.
몸의 온기가 전부 빠져버린 듯 하고 온 몸에 바람구멍이 난 듯 하기 시작했다
젖은 듯한 몸을 추수리고 한참을 앉아 있어야 서서히 정상 체온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점차 신체의 이상 신호를 체감할 수 있었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던 장마가 끝날 무렵 몸은 더욱 두드러지는 이상 증세를 느낄 수 있었다.
날이 갈 수 록 저는 다리가 걷는 역할을 거부하는 듯이 몸을 지탱하기 조차 힘들어했다.
활동하기조차 버거운 피로감에 젖어있었고,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의욕도 기력도 없고 그저 눕고만 싶어졌다.
세탁하는 일 외에는 그렇게 누워있는 시간이 잦아졌다.
모유도 말라버려 정상적으로 수유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잊어 버릴만하면 한번씩 내려왔다.
힘없는 모습을 보며 왜 그렇게 말랐냐?! 고 의아해 하면서도,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같이 있어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늘 서울로 올라가는 뒷 모습을 지켜보며 속히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어떠하든 내 마음속엔 언제나 첫사랑의 설레이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지루하고 버거운 그가 없는 생활속에서 때때로 옥상에 올라서서는
아득한 푸른 하늘 저편 산 넘어 그가 떠나간 서울을 바라고서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래며
그와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서 살게 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곤 한다.
몸이 점점 더 기력을 상실해 가던 어느날, 서울의 어린 여동생이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안부를 묻는 내용 끝에 '언니 이 돈으로 고기 사먹어.' 라는 글 귀에서 가슴이 뭉쿨해졌다.
편지지 속에 곱게 넣어 보내진 오천원짜리 지폐, 모처럼 만져보는 돈이 반갑기도 했고,
뜻밖의 어린 동생의 관심과 정성이 고마워 그만 울고 말았다.
'고등학생이 무슨 돈이있다고...'
반찬은 하나도 없었지만, 난 그 돈을 쓸 수가 없어서 책갈피에 잘 넣어두었다.
몸이 쇠약해져서 생리가 멈춘지도 모르고 남편이 다녀간 후 생리가 끊긴 줄 알고
내심 걱정하며 지내던 어느날 시어머니께서 오셨다.
보건소에 가서 가족 계획에 대해 문의하고 가능하면 참여할 생각으로 버스를 탔다.
먼길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이미 업무가 끝난 시간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몸을 지탱할 체력이 1도 없었다.
빈속이여서 그런가 했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상태로 한 걸음 내딛는 것 조차 힘겨웠고,
착용한 장 보조기의 무게도 마냥 버겁기만 했다.
몸을 바로 지탱하고 가누며 움직인다는 것이 왜 그렇게나 힘든건지 이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이 천근 만근 보다 더한 무게였다.
이성이 없다면 그냥 아무곳에 그대로 누워버리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쓰러질 수 없어 지탱되는 몸을 겨우 겨우 이끌고 비틀거리며 귀가했다.
부엌에는 물린 술 상이 있었다.
오랜 지인이신 주인집 아저씨와 한잔 하신 모양이셨다.
상 위에 막걸리가 한잔 정도 남아 있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타고해서 단번에 마셔버렸다.
술이 남은 것을 시어머니가 기억하신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의식이 혼미해져 갈 때 쯤 부엌에서 상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말했다.
'저.. 어머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잠시 누워 있을 께요'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에게 다녀왔다는 보고이며, 저녁시간에 누워 있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맘대로 해라.!!'
왜 그러시는지, 화가 나신듯이 퉁명스레 던지시는 냉정한 시어머니의 답변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람이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고 했던가, 내 처지와 설음에 복받쳐서 또 부모형제가 생각나서
그 동안 억제했던 서글픔에 젖어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문득, ' 이곳에 있으면 난, 죽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단해야 했다.
아이들을 시어머니께 일단 맡기고 서울로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서둘러 아침상을 차려드리고, 어젠 시간이 늦어서 그냥 돌아왔으니
오늘은 일찍 다녀와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방문에 서서 유난히도 펄쩍펄쩍 뛰며 우는 아들을 바로 보지 못한채 뒤로하고 부엌문을 나서니
벽에 기대선 딸아이가 '엄마, 갖다와! 하며 다짐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조차 못하고 달아나듯 빠져나오는 힘없는 발길뒤로 아들의 부르짖는 울음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전날, 점심 저녁도 못 먹었으니, 먼길을 가기 위해서는 허기를 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입구 구멍가게 앞에서 찬 우유와 빵 한 조각을 서둘러 먹으며 혼자 빠져나온 집을 돌아보는데,
억제했던 뜨거운 눈물이 겉잡을 수 없이 흘렀다 .
벌써부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고 마음을 잡았다.
그렇게 동생이 보내준 오천원은 서울행 티켓으로 바뀌었고,
기력 없는 몸을 의자에 맡긴 채로
머리가 차창에 부딪치는 순간 순간 겨우 실눈을 뜨며
눈물을 흘리며 삼키며 의식조차 잡을 기력없이
죽음보다 깊은 무의식에 취한채 차에 실려서 서울로 떠나오고 말았다.
어떻게 친정 가게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동생들은 쓰러질듯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란다.
왜 그렇게 말랐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 할 힘조차 없어서 가게 안 쪽
구둘 방 같이 시설해 놓은 곳에 그대로 쓰러졌다.
새벽장을 보셔야 하기 때문에, 장보신 후 쉬셔야 하시기에 연탄불을 지펴 놓으셨나 보다.
담요 속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얼마나 간절했던 온기인가?
연탄의 역할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마음으로 절실히 느끼며
긴 여행의 피로에 의해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겨우 실 눈을 떴다.
집에 올라가자고 동생이 일러준다.
마치 머나먼 방황속에서 시달리다 돌아온 탕자같은 기분이었다.
2년이 다되도록 얼마나 그리워했던 서울인가.?!
가게를 둘러봤다.
이것저것 진열되어있는 부식거리가 가득하다.
끼니마다 생각이 났던 야채들... 양념들... 돈이 없어서 먼 발치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들..
아이들에게 먹이고싶던 과일들...
문틀을 잡고 서서 울던 아들이 그때까지 울고 있는 듯이 떠올랐다.
엄마 갔다와 라고 했던 딸아이가 종일 눈 빠지게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았다.
지난날 내가 쓰던 방에 누웠다.
아주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편안한 기분 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 날 밤 부터 으실으실 한기다 들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오르는 열 때문에 마치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벌떡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이해 되지 않는 것은 낯에는 어느정도 견딜만큼 열이 내린다는 것이다.
낮에는 으실으실, 밤만되면 감당치 못할 열에 시달리며
감기증세는 아닌것 같아서 해열제로 버티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그날 따라 답답해서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있는데, 한집에 사는 아줌마와 마주쳤다.
미스 때 부터 한집에 살던 아줌마는 나를 보더니 깜짝놀란다.
아줌마는 모친을 설득했단다 몇날 후 모친은 나를 부축하고 보건소를 찾아갔다.
택시에서 내려 부축되어 겨우 몇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셋 노란 색으로 변해버린다.
그대로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고
당황한 모친은 그런 나를 겨우 업고 보건소 문을 들어섰다.
간호사와 모친은 X-ray실 앞에 데려가 앉혔다.
한참 후 겨우 기운이 되찾아질 때 쯤 모친께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간호사가 나직히 말했다.
'화병으로 그러면 큰 병원에 가야하고, 화병이 아니면 이곳에서 1년간 약을 줘요.'
왜 1년간 약을 준다는지 그 뜻을 모르는 채 오직 화병이 아니기를 바람 했다.
그 화병이라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도 있었고, 또 병원비가 문제되기 때문이었다.
X-ray를 찍고 난 후
그 길로 새 모친은 가족계획이라는 타이틀로 배꼽수술(?)을 해주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만근된 몸은 수술대 위에 눕혀졌고, 소파수술과 이어 배꼽수술을 받게 되었다.
모친은 임신한것 같다는 나의 말을 귀담아들으신것 같다.
의사는 아무것도 없는데..라며 소파 수술에 이어 배꼽 수술 까지 하던 일을 마저 마쳤다.
그 날 밤부터 더 심한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마치 불 속에 갇힌 것 같은 혹독한 열에 시달렸다.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붙들고 긴 밤 일어났다 쓰러졌다를 반복하며 고통속의 일주일을 지냈다.
내 아이들에게 엄마를 일찍 잃은 아픔을 되 물림 할 수 없다는,
또 살아서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두 가지 이유의 의자가 나를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모태신앙이니 유아세례를 받았겠지만 나는 내 믿음으로 확실하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그때의 그 절실함은, 예수님도 받으신 세례이니 나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세례를 받아야 천국에도 갈 수 있을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오는 날 동생은 가볍게 말했다.
'언니, 폐렴이래 1년간 약을 먹으면 완치된다고 했으니까 꼭 약을 빼지 말고 잘 챙겨 먹어야 해.'
나중에 알았는데 급성 폐결핵이었다.
왜 그랬는지 동생은 폐렴이라고 했다.
그날로 내 몸이 병중에 있음이 확인된 셈이고 투병생활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다.
병약한 몸은 일어나 앉을 힘도 없었다.
끼니마다 옆에서 식사를 챙겨줄 사람도 사실 없었다.
동생들은 다 등교하고 부모님들은 가게에 나가셔야 했다.
식사를 위해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먼 거리임에도 모친이 와서 챙겨주셔야 했다.
그렇지만 내 혀는, 맛을 느끼는 기능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했고,
입안의 음식물을 목안으로 넘기는 역할도 철저하게 거부했다.
도데체 음식물을 목으로 넘길 수 가 없었다.
위장도 합심해서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고 음식물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무엇을 먹는다는 그 자체가 정말 쌩 고역이였다.
그러나 치료되기 위해서는 시간에 맞춰서 약을 복용해야 하기에 겨우 몇 수저를 곱씹어서 삼켜야 했다.
한줌씩 되는 독한 약을 목으로 넘기기도 너무 힘들었다.
매일 누워지내야 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기력없이 누워 말씀 테이프를 듣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이를 따라 다시스로 떠난 여행 길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켜 보셨다.
현실에 매여서 신앙 생활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세상 골짜기의 절절한 자리에도 같이 해 주셨었다.
사랑으로 일러주신 말씀을 귀히 여기고 따르지 못한 나는
중환자가 되어서 회환의 심정으로 비통한 가슴을 안고 아버지 앞에 조아려 앉아야 했다.
중환자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코너에서 소년기때 한나되어 기도하던 하나님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 앉았다.
사면초가 어둠에 갇혀서.. 벗어날 방법은 한 곳,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다.
살려주시기를, 살려주셔야만 한다고 눈물로 애통하며 간구하게된다.
삶의 불확실성속에서 막연하게 누워있자니 하루도 맘이 편치 않았기에
삶의 절실한 두가지 이유를 붙들고 성경을 들고 간절히 기도하던 그날에도
멋진 울 아버지께서는 살려 주실 것을 응답해 주셨다.
응답해 주신 이야기는 다음으로 기록할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릴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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