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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루카 15,1-10
오늘 복음은 회개한 양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와 은전 하나를 찾아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는 어떤 부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967년 8월에도 온 국민이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난 것 때문에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조하던 시절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 명이 구조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김찬선 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16일째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 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출 당시 김 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기쁠까요? 애초에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4일째 되는 날
김창선 씨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쁜 걸까요?
내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2,200명과 엄청난 돈을 투입해 살려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를 똑같이 구해줄 나라에 산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방법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목자들이 많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모실 성전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게 아닙니다.
의인 아흔아홉은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게 행복한지 아는 회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에게 사명을 받은 목자만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파견받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회개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게 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양이 되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창선 씨도 1982년 매몰 14일 만에 생존한 태백 탄광 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서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김창선 씨의 사례를 보고 버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창선 씨는 말합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이야기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복자품에 오른 바로톨로 롱고(Bartolo Longo)의 이야기입니다.
바르톨로는 나폴리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반가톨릭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와 경멸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강령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사탄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고 심지어 강신술의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명확성이나 진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환상과 악몽과 함께 끊임없는 공포, 어둠,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비술 수행을 계속했고 점점 더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폼페이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바르톨로는 절망과 자살 충동에 압도되어 사탄과의 계약의 결과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하느님께 봉헌된 것처럼
사탄의 신부로서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과 씨름했습니다.
바르톨로가 갑자기 묵주기도에 관해 들었던 약속, 즉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이 기억난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희망의 불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감동에 사로잡힌 바르톨로는 땅에 엎드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속이 참이라면 묵주기도 신심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랫동안 느꼈던 고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삼종기도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이 은총의 순간을 더욱 확증해 주었고 바르톨로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즉시 도미니크회 신부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그에게 영적인 지도를 제공했고 결국 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과 기도, 참회를 통해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는 사명을 발견하면서
교회와 화해했습니다.
바르톨로의 개종은 너무나 심오하여 남은 생애를 묵주기도에 바쳤고, 궁극적으로는 폼페이에 유명한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을 짓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 은총의 구원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 사제는
처음엔 노예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풀만 뜯는 양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양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길 잃은 양을 살리는 목자가 되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세리,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거룩함과 불결함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자세를 낮추신 후, 세상 자상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시고,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실추된 품위와 가치를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습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보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양치기, 등불을 밝히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스토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분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주님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간 종사해왔던 어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제일 앞쪽에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 초집중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 대목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방황과 타락의 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무가치한 존재나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한 번 다녀왔다고 인생 낙오자로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통해 그들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극하시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세리, 창녀, 죄인들은 비로소 지신의 비참한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죄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해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 주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참다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강론>
(2024. 11. 7. 목)(루카 15,1-10)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10)”
1)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자들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두 가지 가르침을 주려고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1)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2)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도 잃은 양들일 뿐이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특히 성직자들 가운데에는, 자기도 ‘잃은 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 쪽에 두고, 잃은 양을 ‘다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잃은 양’이 된 적이 없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교만과 위선 자체가 ‘잃은 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고,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그들도 구원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독점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고, 무엇이든 예수님에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려고, 또 트집거리를 찾으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라는 어떤 바리사이의 말이 있습니다(루카 7,39).>
2)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이 말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 7절의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의인들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회개의 완성’에 도달한 의인들은 언제나 항상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 하나’를 되찾은 기쁨도 ‘큰 기쁨’입니다.
<무엇이 더 큰 기쁨이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로 내가 잃은 양이다.” 라는 말에 연결하면, 주님께서는 ‘나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고, 또 내가 회개한 뒤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크게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내가’ 죄를 짓고,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크게’ 슬퍼하시고, 회개했다가 다시 죄를 지으면 ‘더 크게’ 슬퍼하십니다.
3)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나 목적이,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기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회개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그것은 나 자신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주님께서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주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 낼 것도 없습니다.
<병에 걸린 내가 병원에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이고, 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갑니다.
그리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지 의사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게 되면, 의사도 기뻐하지만 ‘나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