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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 9 손과 머리도 (상)
요 13: 9 손과 머리도 -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말씀에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1]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태도가 돌변하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있을 유익만을 생각한 급한 대답이었다.
베드로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뿐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요 13: 10 목욕한 자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보통 잔칫집에 초대받아 남의 집에 갈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욕을 하고 가는 것이 예의이다. 그리고 가서는 가는 도중 더렵혀진 발만 닦으면 된다.
이런 일상의 일을 영적인 면에 적용시켜 설명하고 계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말씀을 통해서 교육받았고 전도 여행을 떠날 때는 능력과 권세도 체험하기도 했다.
* 눅 9: 1-9 –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 마 16: 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런 제자들은 목욕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
* 요 15: 3 -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온몸을 깨끗하게 하는 목욕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이 바로 중생(重生, 거듭남)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새 생명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때때로 죄를 범한다. 그러므로 목욕한 자들이 발을 씻듯이, 중생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2] 온 몸이 깨끗하니라.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 요 1: 13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요 3: 3, 5-7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 약 1: 18 -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ἀπεκύησεν).
* 딛 3: 5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παλιggενεσίας)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뱅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 - 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 중생설 혹은 주입 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1) 중생의 성격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 롬 3: 11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렘 17: 9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렘 13: 23 -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 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언한다.
* 겔 11: 19 -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 요 1: 13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요 3: 5 -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ἐξ ὓ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ἐξ[ἐκ]. πνεύματος)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 엡 2: 1, 4-5, 10 –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딛 3: 5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παλιggενεσίας)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 약 1: 18 -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ἀπεκύησεν).
* 벧전 1: 23 -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2) 중생은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중생한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 영혼이 새 영혼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단지 그의 영혼이 중생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또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혹은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촬스 핫지의 설명도 비슷하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즉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 겔 36: 26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엡 4: 22-24 –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요일 3: 9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3)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 요일 2: 29 -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일 3: 10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요일 4: 7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요 1: 12-13 - 12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 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 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 요일 5: 1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4) 중생한 영의 범죄 여부
중생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중생한 영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다시 살았으므로 그것이 범죄한다면 다시 죽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심신(心身, 몸과 마음)이다. 영과 심신(心身)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죄성은 심신에게만 있고 영은 완전 성결하다. 믿는 사람에게 영의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의 구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심신은 중생한 영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견해가 의지하는 주요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의 다음 몇 구절이다.
* 요일 3: 6, 9 –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 요일 5: 18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자들은 이상의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관해 가르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점은, 영과 마음(心)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대로, 사람은 영(프뉴마 πνεύμα) 혹은 영혼(프쉬케 ψυχή)과, 육체(소마 σώμα)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고, 마음은 영의 기능이다.
육체는 물질적 실체이며 자체적으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순전히 영의 활동뿐인가 하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며, 그것에 대해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순전히 영의 활동만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의 결합 속에서 생성된 마음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영육의 존재적 분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육체와 분리된 영에 대해서만 무엇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주석적으로 볼 때,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이 견해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실상 중생한 영의 문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의 문제이다. 만일 그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요한일서 전체 교훈에 비추어 볼 때 필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중생한 성도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요한일서의 교훈의 강조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강조점이다.
요한일서의 표현들은 동사의 현재시제의 현재 진행적, 반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요한일서 3: 6의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자, 즉 중생한 사람이 - 중생한 영이 아님 - 현재 진행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일어나 회개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요한일서 3: 9의 말씀도 중생한 자가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새 생명이 그 속에 심어졌고 그 새 생명은 거룩하고 의롭게만 살려는 새 성향이기 때문이다. NIV 영어 성경은 이 구절들을 그런 뜻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중생한 자가 범죄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 되리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칭의와 실제적인 성화를 오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법적 책임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의를 받았다.
* 롬 3: 21-22 – 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화의 전 과정은 실상 죄책이 없는, 결코 정죄될 수 없는 과정이다.
* 롬 6: 14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롬 8: 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단순히 중생한 자의 영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육의 인격 전체에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다. 성도의 중생뿐 아니라 또한 성화와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분리시켜 중생한 자의 현실적 죄 문제에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 곧 영육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 육과 분리된 영의 순결성 혹은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 벧전 2: 11 -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카타 테스 프쉬케스 κατὰ τής ψυχής) 싸우는 육체의 정욕(톤 살키콘 에피두미온 τών σαρκικών ἐπιθ υμιών)을 제어하라.
이 구절은 ‘육체의 정욕’과 ‘영혼’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이것은, 육체 혹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시키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구절들과 다르다.
* 롬 8: 4-6 –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갈 5: 16-17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37 문답은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고, 그 몸들은 그리스도와 여전히 연합된 채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들에서 쉽니다.”라고 하였다.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완전한 순결성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비록 성경이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순결성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추론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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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잠 5:22. 23) .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인생을 걸고, 움직일 시기는 지금 뿐입니다,
과거는 잊으세요, 결국은 현실이 가장 소중하고, 미래는 꿈이 랍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꿈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