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축구를 선호한다면 잉글랜드 프리미어쉽을, 전술적이고 계산적인 축구가 취향이라면 이탈리아 세리에A를, 마지막으로 섬세한 기술축구에 매력을 느꼈다면 스페인 라 리가를 선호하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소위 말하는 '빅리그의 스타일'이 점차 통합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첼시도 밀란 만큼 수비가 강하고, 유벤투스도 레알처럼 패스할 수 있으며, 바르셀로나도 아스날 못지않게 스피디하다. 3대리그 간의 선수교류는 점차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자국 선수들이 팀 전력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하위권 클럽들은 물론이고, 점차 복합적인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는 상위권 클럽들에도 '고유의 색깔'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리그 전체 경기들을 기준으로 놓고 살펴봤을 때, 그 나라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이탈리아의, 스페인의 고유한 축구 스타일은 세계적인 유명 스타들의 성패여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것을 예상해보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될 수도 있다. 단,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측면에만 주목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작고, 강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빠르지도 않은 공격수가 프리미어쉽에 입성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90년대 프리미어쉽에서 성공시대를 알린 대표적인 선수들인 지안프랑코 졸라와 파올로 디 카니오는 작고, 강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빠르지도 않은 공격수였다.
'피지컬적 측면'을 강조하는 프리미어쉽에서 좋은 체격, 빠른 스피드, 왕성한 체력을 갖춘 선수들이 성공하기 유리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잉글랜드에서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볼 중심의 다툼이 자주 일어나는 프리미어쉽에서는 상대 선수들이 때때로 '포지셔닝'이란 측면을 무시하고 볼을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경우가 많으며, 그로 인해 볼과 상관없는 반대편에는 심심치 않게 넓은 공간이 발생한다. 물론, 고난이도의 '전술 공방전'이 일어나는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와 같은 강팀들 간의 수준 높은 경기들에서는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의 이러한 스타일은 리그 전체의 박진감, 스피드, 흥미도를 증가시키는데 있어 여전히 무시못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프리미어쉽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피드와 파워 만큼이나 비어있는 공간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영리함과 테크닉 또한 매우 중요하다. 아스날에서 활약 중인 불혹의 노장 데니스 베르캄프를 예로 들어보자. 베르캄프는 결코 앙리나 레예스 만큼 빠르게 질주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을 때려잡기라도 할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럭비선수'들을 아주 영악하게 제압할 수 있는 두뇌와 기술이 있다. 베르캄프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손쉽게 볼을 처리할 수 있는 타이밍을 확보해낸다. 졸라와 디 카니오, 셰링엄과 같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후안 세바스찬 베론의 경우를 살펴보자. 프리미어쉽에서 일명 '도그 파이트'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은 의심의 여지 없이 미드필드 라인이며, 베론은 우수한 볼 컨트롤 및 키핑 능력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프리미어쉽 수비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베르캄프나 졸라 만큼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반면 '수비축구' 하면 더욱 일가견이 있는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기복없이 좋은 활약을 펼쳐왔다. 여기에는 축구적인, 또는 축구외적인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이유를 하나 손꼽아서 설명해본다면 프리미어쉽과 세리에A의 스타일 차이가 베론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볼 중심의 다툼이 자주 일어나는 프리미어쉽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는 볼 그 자체보다 '공간'을 더욱 중요시한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볼을 갖고 있지 않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마치 공간을 조여드는 듯한 방식의 수비를 펼친다. 잉글랜드 레전드 데이빗 플랫 또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인터뷰를 통해 "이탈리아 수비수들의 전술적인 움직임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다"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바 있다. 이러한 이탈리아 스타일의 전술적인 협력수비는 잉글랜드에서 볼 중심으로 일어나는 '도그 파이트'만큼 보기에 재미있지는 않지만, 좀 더 계산적이고 치밀하다는 점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탈리아 수비수들도 거칠게 태클하고, 강력한 몸싸움을 시도하며, 좋은 체격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적어도 잉글랜드 만큼 '럭비'를 방불케 하는 몸과 몸의 부딪힘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이 아무리 전술적으로 공간을 내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베론에겐 앞으로 달려가는 공격수가 있으면 어김없이 정확한 패스를 찔러줄 수 있는 정교함과 시야가 있다. 빠른 템포와 격렬함을 특징으로 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쉽에 비해 이탈리아 세리에A는 베론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에 좀 더 용이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이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더라도, 적어도 베론이 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에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분석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멘디에타는 베론과 반대의 경우다. 과거 00/01 시즌, 멘디에타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독무대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을 때, 잉글랜드에서는 멘디에타를 가리켜 '프리미어쉽에 매우 적합한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발렌시아를 떠나 잉글랜드가 아닌 이탈리아를 자신의 새로운 행선지로 선택했다. 라치오에서 멘디에타는 코파 이탈리아 전용 선수로 전락해버렸고, 1년만에 클럽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멘디에타는 지단이나 베론 만큼 '극도의 정교함'을 갖추고 있는 선수는 분명 아니다. 반면 빠르게 전진하면서 그와 동시에 왕성하게 움직이면서 많은 기회를 만들어내는 스타일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멘디에타에게 쉽게 전진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고, 멘디에타 특유의 볼처리 방식은 세리에A 무대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또한 라치오는 발렌시아처럼 멘디에타에게 팀의 중심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페이스를 잃은 멘디에타는 바르셀로나에 와서도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잉글랜드 미들스브로로 다시 한 번 둥지를 옮겨야 했다. 놀랍게도, 멘디에타는 비록 부상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잉글랜드로 떠난 이후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데이빗 베컴은 또 다른 케이스에 해당한다. 베컴은 의심의 여지 없는 월드 클래스 선수이며, 여전히 팀의 중요한 선수로 간주되고 있지만 스페인에서 강조하는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피보테)을 능숙하게 수행하지는 못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설령 볼을 빼앗기더라도 그것을 다시 빼앗아오는 '치고받는 공방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스페인에서는 애시당초 볼 소유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더욱 중요시한다. 베컴은 싸비나 데코에 비해 볼을 빼앗기는 빈도가 좀 더 많지만, 그것을 되찾아오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는 유형의 선수다. 그러나 이러한 파이터적 기질이 '피보테'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최소한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베컴과는 달리, 커리어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무엘의 경우 훨씬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AS 로마 시절 '벽'으로 불리웠던 사무엘은 레알에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 이후 1년만에 팀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여져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무엘의 추락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리그의 특성보다는 팀의 환경이, 그리고 선수 개인보다는 팀 전체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축구에서 팀 전체의 강한 수비력은 최고의 수비수 여러 명이 모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최고의 수비수 4명이 모이는 편이 강한 수비력을 구축하기에 용이한 것은 사실이며, 때문에 유명 클럽들의 감독들은 비싼 돈을 주고 리오 페르디난드, 네스타, 사무엘과 같은 수비수들을 영입한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술적인 뒷받침이다. 좋은 수비수들의 영입은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시킨 후 '뼈대 위에 살붙이듯' 영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과거 AS 로마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의 협력 플레이가 매우 훌륭한 팀이었고, 특히 에메르손은 미드필드에서부터 '1차 저지선'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냈다. 사무엘의 침착함과 노련미, 견고한 수비력은 여러모로 빛을 발했다. 반면 레알은 구조적 문제를 지니고 있는 팀이었다. 사무엘, 우드게이트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을만한 새로운 선수가 영입되지 않았고, 피구와 지단의 스피드는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으며, 팀의 밸런스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사무엘 한 명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란 주위로부터의 막연한 기대감 또한 선수 개인에게 커다란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몇 달 후, 사무엘은 스페인 라 리가에서 가장 쉽게 돌파를 허용하는 수비수가 되어 있었다.
발이 빠르지 않은 수비수 사무엘은 미드필드에서부터 홍수처럼 밀려드는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사무엘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사무엘은 점점 심리적 문제를 겪으며 슬럼프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룩셈부르고 감독의 취임, 그라베센의 영입, 4-3-1-2로의 전환 이후 레알은 눈에 띄게 밸런스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무엘의 페이스는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지고 난 후였다. 후반기 들어 좀 더 나은 플레이를 보여줬다 할지라도, 사무엘은 38라운드 사라고사 전에서도 잘못된 위치선정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스페인 언론들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중요한 것은 전술적 뒷받침 없이 한 명의 수비수가 팀 전체의 수비를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발렌시아가 리그 최고의 수비수 4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리그 최강의 수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리오 페르디난드, 네스타, 카나바로였다 할지라도, 사무엘과 마찬가자의 시기에 레알에 입성했다면 결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축구에서 수비수들은 마치 복싱에서 가드만 올리고 있는 입장에 해당한다. 먼저 판단하는 쪽은 언제나 공격수이며, 수비수들은 그것을 먼저 예측해야 하는 수동적 입장에 놓여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협력'이란 측면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이다. 티에리 앙리나 호나우딩요 한 명은 팀 공격 전체를 바꿔버릴 수 있지만, 왈테르 사무엘 한 명으로는 팀 전체의 수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레알은 아리고 사키와 반달레이 룩셈부르고의 입성 이후 오직 갈락티코만을 수집하는 모습에서 점차 탈피하고 있다. 파블로 가르시아와 카를로스 디오고의 입성은 의심의 여지 없이 팀의 밸런스 및 스피드 문제 해결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은 팀 전체의 향상된 밸런스, 주위의 동료, 전술적 뒷받침과 함께 보다 나아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와 룩셈부르고 감독은 더 이상 사무엘을 신임하지 않는다.
단, 바르셀로나의 마르케스가 입단 첫 해부터 잘한 것은 결코 아니며, 네스타와 카나바로 등도 팀을 옮겼을 때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계 최고 레벨의 센터벡을 다시 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레알은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사무엘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첫댓글 좋은글이네요..
정말 왜 마드리드 수뇌부는 사무엘을 못 죽여 안달일까...........세계 최고의 미들 빛나리 단님도 첫시즌에는 없는게 더 낫다는 치욕적인 평을 들었던 전례를 벌써 잊었더냐~~~
이형석씨 참 글을 잘써요
정말 전문가적 분석의 글이네요.
지단은 정말 어딜가든 잘함..ㅡㅡ;; 윗글대로라면 지단도 한 몸싸움하니까 잉글랜드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잘할것같음..
이형석님 글은 정말 마음에 와닿는다는..ㅡㅡ
아..좋은분석..멋지네요...스포츠신문에서는 이런수준의 필자는 영입 안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