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내리는 비가 우울모드를 장착하게 하여도 개인적으로는 우울 따위에 점령당하지는 않는다.
사철 자연을 누리며 살고지는 거처지 덕분이기도 하고 성격적으로도 그러하다.
하긴 성격, 성향, 성정, 성질 등등은 본래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변모하기도 하니
태생이라는 단어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다 싶어도 유전자의 힘은 또 대단하여 비껴가지 못하기도 한다.
어쨋거나 상황과 여건과 환경에 의해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더러 보기는 했다.
죽어도 아니 변하겠다는 사람도 물론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환경이라는 것이 관여한다고 보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할 일은 아니겠다.
엊그제 찾아든 지인 역시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한때 그저 주부로 열심히 제 가족을 보살피며 삶자락을 늘이며 사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최근에 자신의 입지를 다시 다지고 화가로서의 날개를 활짝 펴는 모습을 보노라면
방치되던 환경적 요인은 누군가의 터치 한 번 만으로도 제 능력이 발현되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오늘 컴퓨터 지면 뉴스를 통해 한 사람을 알게 되어 상당히 기분이 좋음은 물론 그로 인한 설렘은 고무적이기 까지 하다.
늘 아침마다 인터넷 서핑을 하는 일상은 때론 이런 즐거움을 선사하고 오늘의 그 즐거움은 존경스럽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한동안 기억 저켠의 존재감이었던 쥔장의 학창시절을 기억나게 하였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쥔장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오래도록 가슴이 설렐 장소...그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이 일고 스스로에게 뿌듯하고 그 시절을 충만되게 혹은 자유로운 영혼의 발상지로서 즐거운,
그 어디에서도 그 시절에 누린 그런 예술적 마인드의 절정체이자 문화생활의 기본을 스스로 얻게 한 아름다운 학창시절의
그런 모든 선연한 기억과 추억들은 정동 거리 "예원" 이라는 학교가 아니었으면 습득하거나 취득하기 어려웠을 터.
게다가 임원식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일반과목 선생님과 전공과목 선생님들의 뛰어남과 우월함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레슨 담당 선생님들은 서울대학교 교수님들이었으니 어디에 비견할 수 없는 그 무엇보다 특별 수업이었으며
교생 선생님들의 면면도 장난이 아니어서 교생선생님이었던 그 유명한 금난새 지휘자로 부터 수업을 듣는 횡재?
사실 그 때는 그 수업이 횡재였는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유명세는 추후의 몫이었던 고로.
늘 가슴 한 켠에 담겨져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행복회로 장착됨은 물론
그 시절의 풍요와 낭만의 절정지수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개인적으로 지적이고도 문화적인 예술적 재산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멋진 후배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그 또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겠다.
그런 기억과 추억을 불러일으킨 지면 뉴스의 당사자는 "용서는 복수보다 낫더라"의 주인공이신
"서울예술고등학교" 이사장 "이대봉"님이다.
1941년에 태어난 그는 어렵게 경남 합천에서 학창시절 일부를 보내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궂은 일의 정점인 고물상에서 청춘 시절을 보내고 온갖 쌈지돈을 모아 1975년에 동아항공화물을 설립하여
참빛가스산업 등 에너지 분야로 진출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베트남까지 진출하였다고 한다.
와중에 2010년 도산위기에 빠진 "서울예술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을 겸임하며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을 기념하여 2023년 5월에 서울아트센터를 평창동에 개관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그에게 서울예술고등학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학교폭력으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원수의 학교나 다름 없을 터....그는 원수를 용서하고 오히려 서울예고를 위해 헌신하기로 한다.
기사의 내용을 보자면 16세의 아들 이대웅군은 울울창창의 푸릇함으로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했을 터이다.
하지만 늘 우수하고 뛰어난 친구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라는 낙인이 찍힘은 물론
괴롭힐 명분으로 시달림을 당하게 되는 법....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런 여건들은 언어 폭력을 비롯한 온갖 학교 폭력의 발원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야말로 라떼는...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들춰보아도 요즘 세대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 될 뿐.
그 시절의 우리는 그야말로 공부와 더불어 문화, 예술이라는 새로운 분야까지 함께 체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갖 음악회는 물론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까지 섭렵하며 미술관을 찾아들고 무대 위 무용발표까지 눈여겨 보고
음악과 배경그림과의 매치까지 온갖 것을 신경쓰며 다니느라 골몰하고 그런 보고 듣고 느끼는 취득 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기량과 능력을 "향상음악회"나 발표, 전시 시간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과제가 있었으므로
충분히 문화 예술을 끌어안고 자신을 성장 시키느라 다른 친구들을 해꼬지 할 생각은 1도 없이
공부와 예술분야에 매진하면서 그저 함께 누리고 즐겼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요즘은 그런 상생의 우정을 넘어 시기와 질투가 먼저이니 가늠하기 힘든 불상사가 생길 듯하다.
여하튼 이대봉 이사장님은 그렇게 자식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떼같은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수같은 친구들에게
"복수보다는 용서" 라는 대인배의 마음으로 자식이 다니던 학교를 인수하고 이미 세상에 없는 아들의 꿈이 자라도록
서울 평창동에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문화공간 "서울아트센터" 를 설립하기 까지 했다.
살아있었으면 52세가 되었으리라는 아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서울아트센터는
180평 도암갤러리 포함해서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설 수 있는 무대와
1084석의 객석과 최첨단 음향 시설을 갖춘 도암홀을 꾸렸다.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문화공간으로 대변될 예술의 전당이나 LG아트센터에 비견될 예술문화의 무대로서
평창동의 예술혼 명맥을 이어갈, 이름하여 강북권의 명망있는 예술센터로 자리잡지 않을까 싶다.
또한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예술센터를 지으면서도 예술을 지향하는 아이들과 그저 공부하고픈 청소년들을 위해
"이대웅 장학기금" 을 설립해 꾸준히 아이들을 응원하고 격려하였으니 35년 동안 현재 3만 여명이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대인배의 마음에 저절로 고개 숙여 존경심을 표하고 싶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런 후원은 국내를 넘어 베트남의 아이들에게 까지 기회를 주고 있다.
월남전 때 우리가 잘못한 게 많아서 베트남 소년소녀가장들을 돕고 있다는 그는
독립운동가 자녀와 독거노인들까지 두루두루 살펴가며 자신의 가난했던 청년기를 보상하고 있다.
열심히 장사해서 번돈으로 어려운 분들을 도와 드릴 때가 가장 보람있다는 이대웅 님...절로 존경심이 발현된다.
“어느 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내 몸을 때리며 울어요. 아이를 생각하면 그날의 울분이 지금도 용솟음치죠.
그래도 저는 용서하는 마음이 복수하는 마음을 앞선다고 믿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라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돈을 벌 수 있는 거라고. 대웅이도 천국에서 기뻐할 거예요.”
이대봉님의 말을 곱씹으며 복수보다 용서를 지향해야 할 많은 이들에게 울림이 되기를 바라본다.
더불어 덕분에 잠시 청소년기의 쥔장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처음으로 시도된 회색 교복의 상징이었던 그 시절 그때....
그 덕분에 누구보다도 문화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중이다.
첫댓글 그저 박수를 보내드릴뿐입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정말이지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 일 터.
쥔장 또한 무한 존경과 박수를 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