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장 과정
조충은 부친 영인(永仁)과 아들 계순(季珣)과 더불어 강원도에서 빼어난 인물로 손꼽힌다. 고려조를 통해서 문신(文臣)으로 빼어났고, 무신(武臣)으로도 유명했던 그들은 3대가 원수(元帥)를 지냈다 하여 삼원수(三元帥)라 불리운다.
『고려사 열전 제16권』에 보면 충(沖)의 자는 담약(湛若)이며 생후 1개월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서 효동(孝童)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또한 횡성 조씨 족보에 의하면 그는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자지봉(紫之峰) 아래에 있는 굴바위에서 태어났으며, 그 까닭에 이 곳에서 500m 가량 떨어진 곳의 마을이 조촌(趙村)이라 불렸다는 것과 다시 이곳에서 300m 아래 쪽에 있었다는 선강정(仙降亭)에서 이들 부자가 시를 읊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려 명종 20년(1190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희종 7년(1211년)에 국자대사성 한림학사에 올랐다. 그는 이 때부터 학자로서 정통적인 출세의 길에 접어든 셈이며, 그가 동북면 병마사를 지낸 것은 무신의 자리를 맡은 것인데, 동북면 병마사는 군정 책임자로서 지금의 함남, 강원도 동해안의 행정을 주관하는 동시에 동북방면 국방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그 후 그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맡아 문신으로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으며, 문무의 자리를 옮겨가며 그 재질을 발휘하다가 고종 3년(1216년)에 추밀원부사 한림학사승지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여 거란족을 물리쳐 외침을 막아낸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2. 업적
가. 거란유족의 침입과 조충
고려가 북진 정책을 세워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거란, 여진, 몽고의 침입 때문에 좌절 되었는데 중국에서 몽고족이 일어나 북중국을 지배할 때 만주에서 살고 있던 거란족이 몽고에 밀려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것을 거란유족(遺族)의 침입이라고 한다.
그들이 고려를 침입할 때는 고종 당시의 일인데 특징적인 것은 정규 군대의 침입이 아니라 가족을 동반한 침략군이어서 엄격하게 말하면 거란족 이동의 성격을 짙게 띤 것이다. 돌아 갈 곳이 없고 가족을 동반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아 다니는 무리였으니 약탈도 극한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침입한 때는 거란의 걸노(乞奴)가 금산(金山) 등과 더불어 고종 3년(1216년)에 고려를 칩입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을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로 하고 조충을 부원수로 삼아 경도인(京都人) 가운데 종군 가능자와 승군(僧軍)를 모아 출정하였다.
거란족은 평안도 방면으로 들어와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 지방을 짓밟고,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을 비켜서 철원으로 침입, 다시 양평을 거쳐 원주에서 격전을 벌였다. 아홉 번의 큰 싸움을 통해 서원주 지방의 투쟁은 고려 전란사에서 가장 빛나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그와 같은 아홉번의 싸움 끝에 원주에 침입한 거란족은 횡성, 홍천, 춘천을 약탈하였다.
당시 춘천은 안양이라 했고 도지사격인 안찰사(按察使)가 있었는데, 봉의산 혈전은 애절한 사화(史話)와 함께 안찰사 노주한(魯周翰)이 전사하였다. 춘천을 완전히 점령한 그들은 원주를 재침하여 짓밟다가 고려군에게 쫓겨 제천, 영월, 평창, 강릉, 양양을 거쳐 함경도를 지나 여진(女眞) 땅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거란유족의 침입은 강원도 전란사에서 특기되는 사건이며 강원도민의 희생도 많았다. 특히 강릉 사람들은 그들의 만행을 피해 울릉도로 피난을 갔고, 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는 비극도 겪었다.
이러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충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전과 패전의 연속 가운데 한 때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면당한 일도 있었지만 곧 다시 복직되었다.
나. 조충 서북면(西北面) 원수(元帥)로 출정
조충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거란유족이 고종 5년(1218년)에 다시 침입한 때였다. 조정에서는 조충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金就勵)를 병마사로, 정통보(鄭通寶)를 전군(前軍)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左軍)으로, 신선주(申宣胄)를 우군(右軍)으로, 이림(李霖)을 후군(後軍)으로 이적유(李迪遺)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삼아 거란족 토벌에 나가게 했다. 또 도의 여러 안찰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돕도록 하였다.
드디어 조충은 1218년 9월 6일에 군사를 발하여 동주(洞州)에 이르러 동곡(東谷)에서 거란족을 물리쳐, 그들의 1백부장 고연(高延)과 1천부장 아로(阿老)를 사로잡고, 성주(지금의 평안남도 성천)로 나아갔다. 적은 수만명의 기병을 집결시켜 총공격을 해왔으나 조충의 탁월한 전략에 말려 침략의 야욕을 채우지 못하고 그들의 최후 보루였던 강동성(지금의 평안남도 강동)으로 들어가 거칠게 항거하게 되었다.
다. 강동성(江東城)의 적을 포위 공격
이 때 1만인의 몽고군과 2만의 동진(東眞)군이 거란족을 토벌한다고 선언하면서 함경도 지방을 거쳐 성천(成川)·강동 등지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몽고의 원수 합진(哈眞)은 태조(太祖:成吉思汗)의 명을 받아 동진을 쳐 신종(臣從)케 한 다음, 지금의 간도 지방으로부터 함흥평야를 거쳐 정평의 장성(長城)을 넘고 화주(和州: 지금의 영흥)·맹주(孟州:지금의 맹산)·덕주(德州:지금의 평안남도 덕천)·순주(順州:지금의 평안남도 순천) 등 4성을 공격한 뒤 강동성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폭설로 군량의 보급로가 끊기고 거란족이 굳게 성을 지키자 몽고 원수 합진은 고려의 서북면 원수 조충에게 사람을 보내 충분한 군량미의 보급과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몽고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눈앞의 거란족을 토벌하기 위해 그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군판관 김양경(金良鏡)에게 정병 1천명을 거느리고 쌀 1천석을 호송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 몽고 원수 합진은 강동성의 공격을 위해 다시 고려군의 증파를 요구해 왔다. 이에 병마사 김취려는 지병마사 한광연과 함께 십장군(十將軍)의 군사와 함께 정예부대를 이끌고 몽고군에 합세하였으며, 뒤에 서북면 원수 조충도 가세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정병을 비롯하여 몽고·동진의 연합군은 거란족이 웅거한 강동성을 총공격하게 되었다. 당시 취한 전략으로는 우선 적이 도망쳐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 아래에 너비와 깊이 각각 10척의 못을 팠으며, 성의 남문에서 동남문까지는 동진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 이북은 김취려가 맡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궁지에 몰린 거란족 40여명은 성을 넘어와 몽고군에 항복하고 괴수 함사왕자(喊舍王子)는 목매어 자살하였다. 그 뒤를 따라 적의 관인·군졸·부녀자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5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 때 합진과 조충이 함께 적이 항복하는 상황을 순시하여, 거란족 왕자의 처자와 승상·평장 이하 주요 인물 1백여 명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용서하여 군사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드디어 1219년에 연합군에 의해 강동성의 거란족은 완전히 소탕되어 3년 동안 고려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던 거란의 난은 일단락 되었다.
라. 거란장(契丹場) 설치.
강화 직후 합진은 거란인의 부녀와 동남(童男) 7백여 명만을 고려에 남기고 소수는 전공의 대가로 조충과 김취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내몽고의 파림(巴林)에 이주시켰다. 이에 조충과 김취려는 거란인 포로를 모두 고려의 백성으로 삼아 각 도의 주현에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지으며 모여 살게 하였는데, 이를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이처럼 거란족이 몽고족의 한부류임에도 몽고에서 살지 않고 고려에서 터전을 마련한 것은 어제의 적을 한 가족으로 맞은 조충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3. 유적지
가. 묘소
문정공 조충의 묘는 북한땅 개성군 상도면 연동의 고려 태조왕비제능 서편 언덕에 있었다. 고려 고종 묘정에 배형되었으며, 조선 왕조 시대에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형되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 때 몽고족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조정이 옮겨가고 국토가 폐허화될 때 문정공의 묘소도 흔적조차 없어졌다.
1926년 가을에 문정공의 외후손 최씨에 의해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 묘를 잃어버린지 707년 만에 분묘를 재수하고 후손들이 가을에 제형을 올렸다. 그리고 6·25동란 전인 1948년 봄에 횡성군 우천면 정암리 망백으로 옮겨왔다. 이 문정공 묘를 정암리에서는 큰 산소라 부르기도 한다.
나. 조촌마을 삼원수골
횡성 상동리 마을 중턱에 조인영·조충·조계순의 사당인 세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세덕사의 동남쪽 10㎞지점에는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의 박혁거세에 패해서 태기산까지 옮겨와 재기를 위해 성을 쌓을 때 전략지를 답사하고 돌아갔다는 721m의 어답산이 솟아 있다. 서북쪽으로는 930m의 오음산이 멀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덕사에서 서북으로 500m 지점에는 장지봉이 솟아 있고 1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석굴이 있다. 여기가 삼원수가 태어난 곳이라는 삼원수 옛터이다. 옛날에 성곽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아래가 조촌 마을이다. 삼원수가 세웠던 선강정터가 있고 부창리에는 망제머리가 있다. 조충의 부음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개경을 향하여 머리를 풀고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다. 또 배행 고개가 있는데, 삼원수가 길을 떠날 때 배행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다. 세덕사(世德祠)
세덕사는 조영인, 조충, 조계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3대에 걸쳐 고려 시대의 가장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을 지낸 집안으로서 그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1925년 9월에 횡성 조씨 문중이 건립하여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공근면 상동리 삼원수골에 있는 것을 횡성군이 지난 1990년에 횡성읍 정암3리 망백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까지 횡성얼 선양 차원에서 16억원을 들여 영정 제작, 묘역 이전, 시설물 건립 등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라. 문정공묘지석
문정공 조충 지석은 가로 89㎝, 세로 55㎝, 두께 4㎝의 크기의 석재에 세로 선을 긋고 가로 줄을 맞추어 한자를 조각하고 주서한 것으로 가장자리에 꽃술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지석에는 장군의 인적 사항, 생전의 행적, 치적 등이 당시의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800여 년 전의 조각술, 한문체, 고려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지정 유형문화제 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4. 관련 행사
횡성 조씨 문중에서는 세덕사에서 매년 음력 3월 3일에 춘향제(春享祭)를 봉행(奉行)하고, 음력 9월 3일에 있는 추향제(秋享祭)는 유림에서 봉행하고 있다. 또 문중에서는 9월 그믐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한편 조충은 조선조에 이르러 고려 태조, 고종, 문종, 원종과 함께 고려 충신 16인 열위의 한분으로 숭의전(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 배향되었다. 따라서 숭의전에서 왕씨 문중의 행사 시에 조충 장군의 제사가 봉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