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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 11:24-31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26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29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30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잠 11:24-31 / 인색하지 않고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잘살겠지만, 조그만 것이라도 남주기 아까워하면 쪽박차기 십상이다. 25) 덕이 있어야 복을 받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야 배고플 일이 없다. 26) 양식을 내지 않고 저 혼자 차지하려 들면 받을 것은 저주밖에 없고 그것을 내다 팔면 잘한다고 다들 박수치리라. 27) 옳은 일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여 애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나, 못된 짓만 일삼으면 스스로 덫에 걸리고 만다. 28) 재산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어느날 갑자기 거꾸러지나, 올바로 사는 사람은 새파랗게 물오르는 나뭇잎처럼 앞길이 활짝 열리리라. 29) 제 집을 돌보지 않으면 스치는 바람밖에 얻을 것이 없고, 어리석은 자는 슬기로운 사람의 머슴이 된다. 30) 바르게 사는 이가 거두는 열매는 생명이요, 사람 살리는 일이다. 슬기롭게 사는 이는 사람을 얻는다. 31) 바르게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고, 못된 짓만 일삼는 못된 것들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와 의인이 얻게 될 진정한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족하여 질 것이요(24-26) 시편의 시인은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시 112:9)라고 했으며, 주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24)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한다는 것은 자기의 재물을 분별 있게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용된 재물은 선한 씨앗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재물을 매우 야비하게 아끼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과도하게 아끼다라는 말은 '불법적으로' 혹은 '부정하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드러내야 할 공의를 나타내지 않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구제와 나눔을 사악한 이기심과 탐심 때문에 외면하고, 부정하게 자신의 재물을 늘리는 일에만 전념할 때, 그 결국은 가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곡식은 생존을 위하여 생명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곡식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곡식을 부당하게 매점매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생존이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27-31)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악을 더듬으면서까지 찾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인생이 그와는 다르게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오로지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따른 결과는 오로지 비극적인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푸른 잎사귀처럼 무성하며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 푸른 잎사귀에서 생명나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평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고(잠 9:10),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잠 3:18)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는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얻어 의의 길로 인도한 지혜로운 자는 하늘의 별처럼 영원토록 빛날 것이고(단 12:3), 악인과 죄인은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25:46).
적용: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헛된 바람인가요? 아니면 생명 나무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누굴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딜 가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나 일이 잘될 때나 변함이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모습을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약한 자들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있다면, 자신도 비슷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기독교의 복은 나눔이다
잠언 11:24-25
[868호 10면, 발행일 : 2017년 8월 30일(수)] 교직원 연수회 설교 복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복을 원하고 더…
교직원 연수회 설교
복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복을 원하고 더 큰 복, 더 많은 복을 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더 좋은 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행20:35). 더 좋은 복을 받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그 길은 협착하고 좁습니다.
받는 것은 감사하며 받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주는 것은 받는 자의 마음과 기분과 반응까지 고려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수혜자는 받는 것을 동정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동정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느끼도록 배려해야 제대로 주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이며 복 자체시며 최고의 복이시며 복을 공급하고 주관하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했다면 그것은 세상을 그렇게 섭리해 가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혜자가 오래 전부터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흩어 구제해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잠11:24-25).
사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복되다는 것은 역설적인 말입니다. 흩어 구제하면 재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더욱 부하게 된다는 것, 치열하게 아끼며 부가 늘어나야 하는데 가난하게 된다는 것, 구제를 좋아하면 지갑이 얇아져야 하는데 풍족하게 된다는 것, 남을 윤택하게 하면 자기는 잘 드러나지 못하는데 자기도 윤택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역설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은 온 세상을 그 말씀대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복입니다. 나눔이 복이기 위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풀고 나누고 섬긴 자들에게 보상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눔의 복을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된다고 하십니다. 나누어 주더라도 갚을 능력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이 나눔의 수혜자가 되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면 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입니다(잠19:17). 갚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여호와께 빌려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갚아 주십니다. 사람이 갚아주는 것보다 하나님의 갚으심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더 크고 더 좋고 더 많은 복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나누는 나, 나누는 가정, 나누는 교회, 나누는 전주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와 무소유(無所有)
잠 11:24-26
기독교적 물질관(物質觀)은 무소유(無所有)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신자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인격 도야를 위한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재물로 인해서 자꾸만 탐욕, 시기, 질투, 다툼, 분노, 저주가 생기고 심하면 죄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으로 재물을 아예 가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재물 자체가 악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결코 악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악한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지 돈 자체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선한 사람이 선하게 돈을 사용하면 “일만 선의 뿌리”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아예 멀리하려는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입니다. 자신의 죄를 없애는 데에는 그런대로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들도 무소유에 대해 쉽게 미혹됩니다. 이는 조금 심하게 말해 자기 혼자만 고고해지려는 너무나 비겁한 행위입니다. 스스로 죄 안 짓는 데는 효과 있을지 몰라도 손자병법에 비유하자면 36계중에 다른 35계가 다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행할 계책에 불과합니다.
악은 선으로 갚아야지 악에서 탈출하려고만 하면 악은 더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집니다. 악의 배후에 있는 사단이 절대 그리 녹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없어서 생기는 시기 질투 분노 저주는 오히려 많을 때보다 더 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을 무소유만 수도해도 정욕에서 완전한 해방을 얻어 자유를 누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에만 자유와 평강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계명의 전부라고 했고 바로 그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된다고 약속하신 까닭입니다. .
신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가장 먼저 주신 계명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이 땅에서 당신이 마련해놓으신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재화가 될 원료와 수단은 물론, “재물 얻을 능(能)”(신8:18)도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도 열심히 성실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서두에 인용은 세절만 했지만 잠언 11:24-31에는 신자가 재물을 운용하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나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첫째가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가난한 이를 구제하기 위해 돈을 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흩어서 구제하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아낌없이 많은 이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부해진다고 합니다.
반면에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된다고 합니다. 재투자하는 것도 아까워서 장롱 속에 깊이 묻어 두면 인플레이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사는 것도 아까우니 항상 궁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 말씀대로 좀과 동록과 도적의 먹이로 제공되기도 할 것입니다.
간혹 구제하면 하나님이 복을 양껏 내려주신다고 오해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구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구제했기에 “구제한 자에게 상(賞)으로” 몇 배의 부를 더 주시지는 않습니다. 상호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을 아끼고 쪼개가며 구제한 자는 구제한 만큼 때로는 더 이상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구제 자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복을 받는” 조건 내지 수단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오히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에게 빌려주는 것과 같으니까 반드시 그만큼 여호와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더러 번성하라고 명한 까닭도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계속 허용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구제를 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갚아주는 이유도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한 셈이니까 그 빌린 만큼 반드시 갚아주실 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 일을 더 하라고 그 이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른 이에게 전해주어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더러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의미입니다.(창12:3) 구제하면 자기부터 복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통로의 입구는 활짝 열되 출구는 조금만 틔어 놓고 그 잉여분만큼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횡령죄”에 해당됩니다. 진짜로 복의 근원이 되어서 남들을 하나님 대신에 돌본다면 하나님이 그 돌보는 자를 굶기게 만들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꾸로 하나님이 “직무유기죄”를 범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죄와는 전혀 무관하기에 표현이 조금 불경하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곡식을 시장에 내어서 팔라고 합니다. 우선 성경도 시장경제를 지지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공산주의는 배격합니다. 물론 공정하고 건전하면서도 복지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경제여야 합니다. 잘못된 종말관에 빠진 자를 일차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3:10)고 했습니다.
각자가 성실히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가는 사회 체계가 되어야 하고 불로소득이나 부정축재는 단연코 없애야 합니다. 신자는 마땅히 그런 시스템에 적극 참여하고 조성 발전시켜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안에서 기존의 법률과 제도에 충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누구나 알고 또 수긍하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 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대의 농업은 날씨에만 의존하는 방식인지라 심심찮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부자 농부가 기근이 닥쳐도 움켜쥐고 여분의 곡식을 팔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흉년일수록 싼 값으로 유통을 시켜 고통의 짐을 서로 나눠지며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마찬가지로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백성의 칭송뿐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주시는 복도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리라”(27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물을 벌고 쓰는 방식만 선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선해야,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쓰는 방식은 선한 데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하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앞에서 구제하면 자기가 큰 복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 드렸듯이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 넷째 원칙으로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는” (28절) 말씀이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을 움켜쥐는 것은 재물이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구태여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앞선 글 “잠18:10,11-성경적 청부(淸富) 사상”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째 원칙도 흥미롭습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29절)고 합니다. 가족의 것을 이용해서 자기 배만 채우려는 자의 소득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친척 친지 형제에게는 더더욱 악행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는 종교적 일에 헌신하느라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우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신자의 최우선적인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최초, 최소, 기본 도구로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세웠습니다. 아니 그 가정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다시 한 번 신자의 재정원칙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무소유는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웃을 구제하려는 선한 동기에 따라 선한 방법으로 벌고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제하고는 연약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또 그런 일을 자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자발적 적극적으로 기꺼이 참여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재정원리를 자기 가정 안에서부터 실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반드시 더 구제하라고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요컨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이 땅에 풍성하고도 편만하게 번져 나가게 만드는 중간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부터도 이렇게 따져보면 신앙 양심에 많이 찔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크게 찔리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인용한 말씀만 해도 주면 더 후히 주겠다고 약속하시되 동시에 만약 너희가 헤아려서 주면 하나님도 헤아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아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판단하여 상급을 정하는, 아니 심판하는 기준이 바로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이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느냐 여부이지 않습니까?(마10:31-46)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양과 염소를 나누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기준으로 구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자에게 한 구제가 바로 예수님께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리고 목이 말랐다는 것보다는 신자의 구제는 재차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대신에 그분의 일을 한 것이며 예수님께 꾸어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까닭도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8)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까닭은 당신께서 그들의 선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에 그 백성들로 동참시키기 위해서인데 그 수단으로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선조는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지나가는 통로로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입니다.
그 언약의 또 다른 내용은 당신의 자녀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를 구원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겠다는 언약을 당신께서 성실히 지키기 위해서, 다른 말로 신자 쪽에선 연약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도록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언약은 당연히 인류의 선조 아담에까지 소급 적용됩니다.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는 통치는 바로 신자의 구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에게 특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모세오경, 잠언, 복음서 등에 걸쳐서, 아니 성경 전체에 너무나 정미하고도 시종 여일하지 않습니까?
작금 전 세계는 극심한 불경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펴본 대로 하나님도 그 돈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돈을 제외, 무시, 거부하고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세상 자체를 없애야 하거나, 신자를 구원하자마자 일찌감치 천국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이 땅을 다스리되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구제하는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돈을 목표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늘의 보물만 간절히 소망하며 사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땅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신자가 구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가능한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자신만 거룩해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 혼자만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려고 신자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번성 충만케 하여서 대신 다스리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그 최소의 필요만 대신 채워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마저 못한다면 우리는 재물이 풍요하든 궁핍하든 나아가 무소유로 아주 경건해지는 것과도 전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빛조차 소유하지 않는 진짜로 성경적인 무소유의 자리로 떨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너무나 힘든 시절에도 신자는 구제에 힘쓰며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왕에 힘든 김에 무소유를 실천해야지 식으로 결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려울수록 더욱 열심히 정직하고 성실히 일하고 또 그래서 번 돈을 아껴서 서로 나눠 쓰라고 합니다. 곡식을 내다팔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못 받을 뿐 아니라 백성의 저주마저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돈을 자기 곡간에 쌓기 바쁜 세상 사람과는 달리 신자라면 얼마든지 흩어서 구제할 수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6:9,10 &8:9)
매튜 헨리 주석
과도한 절약의 폐해(잠언 11:24)
1.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분별있게 소비함으로써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경건한 일과 자선, 그리고 관대히 대접하는 일에 재물을 뿌리고도 그 재산이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씨를 뿌림으로써 곡식이 많이 소출되듯, 바로 그 수단에 의해 재물이 늘어나는 것이다. 가진 것을 즐거이 사용함으로써 마음은 명랑하게 되고, 소유가 많아지는 것을 면밀히 주시함으로써 해야 할 일을 적절히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소출에 한 몫 거드는 명성을 얻어 준다. 그러나 특히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는 주는 손을 복되게 하사 그 손을 받는 손이 되게 하신다(고후 9:10). "주라, 그리하면 너는 그것을 받으리라."
2. 사람이 자기 소유를 매우 야비하게 아끼면 가난해질 수 있다. 마땅히 주어야 온당한 데도 "과도히 아껴서" 주지 않으며, 정당한 부채를 갚지 않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고, 가족에게 필요한 것도 공급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경비도 재물의 보존을 위해 허용하려 들지 않는 자는 가난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자는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런 것은 인간의 창의력과 근명을 속박하고 그들의 권세를 약화시키며, 그들의 신망을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축복을 몰수해 버린다.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을 아무리 아낀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에 된 서리를 내리시고 값없이 만들어 날려 버리시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불이 그것을 살라 버릴" 것이다(학 1:6, 9).
자선의 유익함(잠언 11:25)
자선의 일을 게을리하고 자선이 지나쳐서 이렇게 주다가는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우리는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지를 전과 같이 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17절),
1. 우리는 그 위로를 우리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구제를 좋아 하는 자"는 고난받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며 은혜로운 입술과 구제를 베푸는 손으로 복을 뿌리는 축복의 영혼이다. 그런 자는 참 즐거움으로 "풍족하여질 것이요" 더 많은 은혜로 부해질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자기의 풍부한 시냇물로 남을 "윤택하 ("물 준다"는 뜻을 가짐)하는 자는" 그 자신도 윤택하여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흡족한 축복의 비와 이슬로 그것을 틀림 없이 갚아 주실 것이니 "그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으실" 것이다(말 3:10).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친절한 자는 친절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3. 우리는 더욱 많은 선을 여전히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주는 자는 심지어 비와 같이 되리라 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그는 비온 뒤 다시 되돌아와 모이는 구름처럼 보충될 것이고 새로 깎은 풀밭에 내리는 비처럼 한층 쓸모있고 용납받는 자가 될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게 되리라(갈데아 주석은 그런게 해득한다). 자기 지식을 타인의 교육에 사용하는 자는 그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가진 자에게는, 또 가진 것을 사용하는 자에게는 더욱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은사와 사용(잠언 11:26)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선물(은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받은 바선물로 더욱 바하게 되려는 욕심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것을 비장해 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인들을 위해 그 사장시켜둔 것들은 내 놓아야 하며 그로써 그들을 후원하고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곡식이 비싸고 귀할 때 값이 점점 오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내지 않고, 또 가난한 자가 고통을 당할 정도로 시세가 이미 너무 앙등되어 있는데도 시장가를 유지하며 한 술 더 떠서 시장 가격을 올리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한 때에 곡식을 저장하고 있는 자의 본분이란, 곡식을 통해 빈궁한 자를 참작하고 기꺼이 시장 가격으로 내어다팔며 적당한 이윤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이득으로 삼는 일이 없게 된다. 우리의 생활 필수품 값이 마구 치솟으면 상점을 가진 자들은 자선을 베풀 수단을 가지게 된다. 그 상점을 통해 시장가를 낮게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은 고귀한 자선행위이며 자선을 널리 유포하는 일이 된다.
2. 우리는 민중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야 할까? 이웃사람이 우리에게 호의를 품는가 악감을 품는가, 좋은 말을 하는가 나쁜 말을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가 저주를 하는가 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관심한 일이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본문은 그들의 저주를 두려워하며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축복을 구하며,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그들의 축복을 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때로 voxpopuli est vox Dei-즉 백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죄인의 어리석음과 비참
잠언 11:27-31
선과 악(잠언 11:27)
1.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에 열심인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 "선한 것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자는"(말의 뜻은 그렇다) 친구에게 봉사하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기회를 구하며 자기 자신을 그 일에 투신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은총을 얻으리라." 그의 주변 모든 자들이 그를 사랑하며 그를 칭찬하고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이보다 낫고, 생명보다 더 나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얻는다는 점이다.
2. 악을 행하기에 부지런한 자는 자신을 위해 멸망을 예비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악이 임하리 ." 이제나 저제나 그들은 자기의 행위대로 앙갚음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악을 더듬어 찾는다 는 것이 "선을 구한다는" 것과 대치되어 있음을 관찰하자. 왜냐하면 선을 행하지 않는 자는 해를 끼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의인과 탐욕자(잠언 11:28)
1. 우리의 재물은 우리가 최대의 궁지에 처하게 될 때 우리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마치 그 재물이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하심과 분깃을 대신 충당시켜 줄 것처럼 믿는 자여서 꺾어진 갈대에 자기 체중을 싣는 자와 같이 "패망하리라." 그 갈대는 그를 실망시킬 뿐만 아니라 그 손에 박히며 그를 꿰뚫어 버릴 것이다.
2. 우리 의는 재물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의인은 푸른 잎사귀(혹은 가지) 같아서 번성하리라." 의로운 가지는 그 잎이 마르지 아니하는 나무처럼(시 1:3) 무성할 것이다. 재물이 사람을 실망시키는 사망의 세계에서도 의인의 "뼈는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사 66:14) 세상에 뿌리박고 사는 자들이 시들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그의 뿌리에서 기름진 것을 분배받는 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이다.
가사(家事)의 관리(잠언 11:29)
가사를 관리함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일이 여기에 정죄되고 있으며 그 일의 나쁜 결과가 예고되고 있다.
1. 두 극단 중 한편에는 용의주도함과 세속적 권모 술수가 있다. 세상을 추구하는 일에 지나치도록 열심이어서 사업에 대한 걱정, 손해에 대한 과민증, 고용인에 대한 혹사, 가족들에게 대한 구두쇠 근성 등으로 "자기 집을 해롭게 하며" 주위 사람들을 하나같이 성가시게 하는 자들이 있다. 이에 반해 자기 가문내에 파벌과 반목을 조장하여 다소 자기들의 이용 꺼리로 만들려고 생각하고는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있다. 이것도 실제로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바람을 소득(혹은 유업)으로 얻게 되리라." 이런 수단에 의해 그들이 얻는 것은 전부 바람처럼 공허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바람같이 요란하고 말썽이 많기도 하여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괴롭히는 것이다.
2. 또 다른 한 편에는 부주의와 몰지각이 있다. 자기 사업에 멍청하고 그 사업을 염두에 두지 않거나 서투르게 행하며, 궁리나 깊은 고려도 해 보지 않는 자는 자기 신망과 이익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된다. 그는 가난하게 되어 생계를 위해서는 막 노동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지혜롭게 처리하는 자들은 높아져서 이러한 자들을 거느리게 된다. 미련한 자가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합리적이며 매우 온당한 일이다. 우리는 딴 일도 그렇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 뜻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그에게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련한 자들이요, 그는 무한히 지혜로운 분이신 까닭이다.
의인과 지혜로운 자(잠언 11:30)
본문은 선량한 자가, 특히 지혜로 유명한 사람이 자기 고장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가 하는 것과, 따라서 그들은 얼마나귀중히 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1. 의인은 "생명 나무"와 같다. 그들의 열매, 곧 경건과 자선, 교훈과 책망, 모범과 기도, 하늘에서 갖는 그들의 세력과 땅위에서 갖는 감화력은 생명 나무의 열매와 같아서 보배롭고 유용하며 많은 사람의 영적 생명을 지탱시키고 양육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낙원의 장식물이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2. 지혜로운 자는 이보다 더 하다. 그들은 지식의 나무와 같다. 그 지식은 금지된 지식이 아니라 명령받은 지식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전달함으로써 "사람(혹은 영혼)을 얻으며" 그들을 끌어다녀 하나님과 성스러움을 사랑하게 하고, 따라서 인간 세상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이익에 참여하게 만든다. 지혜있는 자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로"일컬어지는 (단 12:3) 그것은 본문에서 영혼을 얻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아브라함의 개종자들은 "그가 얻은 사람"이라고 불리운다(창 12:5). 사람을 얻고 자 하는 자들은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영혼을 얻는 자들은 바로 자기들이 지혜롭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보상과 보응(잠언 11:31)
나는 이 성귀가 솔로몬의 잠언 중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 즉 "보라"라는 서두가 달린 유일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말씀에는 볼 만한 명백한 진리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살피지 않으면 아니될 훌륭한 진리가 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1. 혹자는 본문의 두 부분이 다 노여움의 보상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의인"이라도 그릇 행한다면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하물며 약해서 죄를 범하는 게 아니라 교만한 손으로 범죄하는 악인들이 그 벌을 받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면, 불경건한 자들이야 어떻게 되겠는가?(벧전 4:17, 18; 눅 23:31)
2.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을 의인에게 대한 보상과 죄인에게 대한 보응으로 해석한다. 섭리의 응보를 보도록 하자! "땅에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일 속에서도 보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시 58:11)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같은 갚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땅에서는 많은 죄가 벌을 받지 않고 무사하며 많은 봉사가 상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올 심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미래의 상태에서는 보다 정확하고 보다 완전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준다. "의인은" 그것이 정도 正道)가 못되고 더욱이 자기들을 위해 내정되었거나 자기들이 의도하는 유일무이한 상급은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의로움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보신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의 "세상에서"("땅에서") 보응 받을 것이다. 악인과 죄인도" 또한 때때로 이 생에서 눈에 띄게 벌을 받으며,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만약 의인이 극히 작은 상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기 이 땅에서 저희 보상의 몫을 차지한다면, 최대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악인은 장차 올 극형에 대한 증거로 세상에서 저희 벌을 몫을 한층 더 많이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두려워 떨며 범죄하지 말 ." 하나의 하늘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두 하늘을 받는다면, 두 개의 지옥을 받을 만한 자가 얻는 지옥이 어찌 두 개에 그치겠는가!
의인은 말과 재물로 남을 유익하게 한다.
잠 11: 16-31
1. 잠언에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이다.
1) 의인은 지혜로운 자, 겸손한 자와 동일인이며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2) 악인은 하나님을 떠난 자이며, 미련한 자이고 교만한 자이다.
- 잠언의 미련함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며, 교만하게 한다.
2. 잠언 11장에서 의인은 자신만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고, 심지어 성읍을 번영하게 하는 사람이다.
1) 의인의 지식은 이웃을 구원하고(9), 성읍을 번영하게 하며(11), 연약한 이웃을 비방하지 않고 그의 비밀을 숨겨준다(13). 또한 공동체의 지도자와 조언자의 역할을 한다(14-15).
- 오늘 본문에서도 의인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 즉 구제하고 남을 윤택하게 한다.
2) 반면 악인은 자기의 인생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해악을 끼친다.
3. 16절의 번역은 바른 성경이 옳다(개역 개정은 오역인 듯 하다).
잠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1) 근면한 남자: 히브리어 ‘아리츠’로 두려움을 주는, 공포감을 주는~ 이라는 뜻이다.
2) 바른성경과 영어 성경은 “힘있는 남자, 난폭한 사람”으로 바르게 번역했다.
[바른성경]잠 11:16 덕스러운 여인들은 존경을 받고, 힘 있는 남자들은 오직 재물을 얻는다.
3) 잠 11장의 중요한 주제는 의인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4) 두려움을 주는 남자, 힘 있는 남자도 ‘재물’을 얻을 수 있다. 단지 재물만을 얻을 뿐이다.
4. ‘재물’이 주는 유익은 있다. 그러나 ‘재물’이 주는 유익은 제한적이다.
[표준새]잠 11:4 재물은 진노의 날에 쓸모가 없지만, 의리는 죽을 사람도 건져낸다.
잠 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1) 재물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진노의 날에는 쓸모가 없고, 재물만 의지하면 패망한다.
2) 돈 자체는 중립적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5. 돈은 항상 해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돈을 주시고, 때로는 부자가 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돈은 얼마든지 유익할 수 있다.
1) 돈이 가장 유익한 것은 그 돈으로 남을 구제하고 윤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1) 윤택하게 하다(라와): 충분히 마시게 하다. 만족하게 하다.
[표준새]잠 11:25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2) 의인은 2가지 방면으로 이웃을 돕는다.
a) 9-15절에서처럼 의인의 지식, 지혜, 조언으로 이웃과 성읍을 돕는다.
b) 또 한 가지는 의인이 가진 ‘재물’로 구제하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6. 흩어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의 대행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계속 구제하라고 더욱 부하게 하는 일이 있다.
1) 반면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다.
2)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 구제를 통하여 남을 충분히 마시게 하면 하나님은 그도 충분히 마시게 하신다.
[표준새]잠 11:26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것을 내어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7. 그저 주는 구제만이 아니라 곡식을 적절한 가격에 파는 경제행위도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1) 반면, 흉년, 불경기 등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높은 이익을 위해 곡식을 저장만 하면 백성에게 저주를 받는다.
8. 이처럼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돈을 하나님의 공급으로 여기고, 그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사용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자를 하나님은 도우신다.
1) 돈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재물’을 통하여 남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9. 친절을 베풀면 자신이 즐겁고 잔인한 사람은 제 몸을 망친다(17절).
1) 선행과 악행은 모두 그 결말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18-21절).
2)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오히려 풍족하여 진다.
3) 마찬가지로 인자를 베풀면 자기의 영혼에 이롭고, 공의를 행하면 생명에 이르고 상이 있다. 의로운 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10. 예쁜 여자가 단정치 못한 것은 돼지 코에 금고리이다(22절).
1) 이성과 도덕적인 분별이 없는 미인 또는 어울리지 않음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
11. 27-31절은 다시 의인과 악인의 결말을 가르친다.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1) 선한 일(좋은 일)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
- 선한 일의 예로는 ‘구제하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이미 언급하였다.
2) 악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악(해로움)이 임한다.
12. 자기 재물을 믿는 사람은 망하나, 의인은 나뭇잎처럼 번성한다(28절).
잠 11:29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1)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돈을 버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2) 미련한 자는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된다
13.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얻는다(30절).
잠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1) 여기서 생명나무는 ‘생명을 부여해 주는 것’을 뜻한다.
2) 의인의 삶은 “생명을 얻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그 생명을 나누어 준다.
-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사람들을 유익하게 한다.
3) 또한 의인은 “사람을 얻는다.”
-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된다는 말씀과 반대되는 말이다.
- 의인은 자신의 지혜로 돕고, 구제함으로 돕는다. 그리고 사람을 얻는다.
4) 하나님은 의인을 집적 도우시며, 또한 도움을 받은 그들을 통해서 의인을 돕는다.
14. 의인은 땅에서 상급을 받고 악인과 죄인은 벌을 받는다(31절).
1)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것을 행하는 자는 그것대로 보응을 받는다.
15.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의인’의 합당한 삶을 잘 보여준다.
-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한다.
1) 세상의 법칙은 돈을 많이 모으고, 자신의 유익을 저축하는 자가 부요하다고 한다.
2)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칙(말씀)을 따라 사는 자이다.
- 그는 남의 유익을 구하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삶을 산다. 자신을 허비한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을 더욱 지혜롭고, 더욱 부요하게 하심으로 의인을 돕는다.
3) 의인은 단순히 재정의 필요만 공급받지 않고, 그 열매로 생명나무와 사람을 얻는다.
- 생명의 풍성함을 얻고, 그 풍성한 생명을 나눠주는 것만큼 큰 복은 없다.
- 또한 사람을 얻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다. 좋은 관계, 좋은 사람을 얻는 것은 지복이다
4) 생명나무와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의인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이다.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재물, 생명나무, 사람을 주신다.
덧셈 뺄셈이 통하지 않는 것
잠언 11장 16절 ~ 31절 / 행복한 순례자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성품과 그 성품으로 인한 삶의 결과입니다. 그 예가 유덕한 여자와 아름다운 여인이 문단 앞뒤에 위치해있어 대조 설명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구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면서 구제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말합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덕이 있는 여자는 명예를 얻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는 재물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유덕하다’라는 말은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현숙한' 등의 뜻을 가지며, 여기서는 단순한 외적 매력이 아닌 종교적, 도덕적 품격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여성은 남편을 영광되게, 가정을 화목하고 번성하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명망과 존경을 얻게 됩니다. ‘근면하다’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힘이 세고 난폭한’ 이란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유덕한 여자는 존경을 얻지만 난폭한 남자는 재물만 얻을 뿐이다’라고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70인 역의 번역을 위시하여 많은 성경의 번역본들은 긍정적인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전형적인 매점매석 행위의 금지 사항을 말하는 문장입니다.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생필품인 곡식을 자신의 치부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를 말하며, 단순히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둘 뿐만 아니라 곡식의 매점 매석 행위까지를 하는 자입니다. ‘내지 아니하는'은 문자적으로 '손해를 금하다', '억제하다', '보류하다'란 뜻으로서 부당한 매점 매석 행위의 실체를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소요와 불안을 야기시키는 바, 유대인 사회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어 친숙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형과 아우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농부 두 형제가 살았는데, 형은 결혼하여 아내와 두 자녀가 있었고 동생은 독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남긴 토지에 곡식과 과일 나무를 심어 그 수확한 것을 똑같이 두 몫으로 나눠 각자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식구가 많은 형을 생각하여 동생은 어느 날 밤에 형의 창고로 상당한 곡식과 과일을 옮겨 놓았습니다. 형도 자신은 자식이 있으므로 늙어서도 걱정이 없겠지만 동생은 혼자 사니 노후를 위해 저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밤중에 역시 동생의 창고로 상당한 양을 옮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형제는 각각 창고에 가보니까 곡식과 과일이 거의 어제와 비슷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밤 중에 어제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동일한 일이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사흘이 지난 날 밤에 형과 동생은 달빛 아래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곡식 보따리와 과일 보따리를 팽개치고 형과 아우는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전해지는 장소는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 소중한 곳으로 보전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 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농부 형과 아우에 비교하면 한결 실감이 갈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거저 주는 사람은 더 많이 얻게 되지만 지나치게 아끼는 사람은 가난에 이른다’ 라는 뜻입니다. 거저 주려고 애쓰는 형과 아우는 더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곡식뿐만 아니라 따듯한 형제애를 말입니다. 만일 형과 아우가 서로 물질을 아껴 인색했다면, 비록 물질로는 가난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은 결코 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남을 도와준 만큼 그만큼 자신의 수입이 없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경험 해본 사람은 잘 아닙니다. 도와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도무지 덧셈 뺄셈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예가 자신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는데 엉뚱하게도 그와 상관 없는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올 경우 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 무명으로 자선을 베풀기도 합니다. 비록 반대급부가 없을지라도 우선 그 마음이 풍족해지고 다름아닌 하늘아래에서 행한 선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이가 넷이 있다고 합니다. 미망인, 고아, 이방인 그리고 성직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사람들의 자녀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으니,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면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이가 됩니다. 피조물로써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들여 베풀 때 참다운 이웃 사랑이 될 것입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베풀어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생활영성
잠 11:10-31
잠언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전 유대와 솔로몬, 아굴, 르무엘 그리고 미상의 한 작가에 의해 기록된 짧고 간결한 말씀들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명칭은 ‘미쉘레 쉴로모’입니다. 그 뜻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미쉘레’는 ‘마샬’이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는 말씀’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과 생각을 잘 다스리면 삶의 변화가 아름답게 일어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잠언은 최고의 영성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개인과 가정,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의 해결방안들이 이 잠언안에 들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언을 인생의 예의범절을 배우는 윤리 교과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술을 배우는 책으로만 생각할때가 많았습니다. 주로 잠언을 수평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서는 윤리적 차원이나 처세술을 뛰어넘어 수직적인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떻게 그 관계를 아름답게 발전시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잠언의 말씀은 한적한 곳에 들어가 수도원생활을 하는 묵상영성이기 보다는 삶의 치열한 현장 속에서 적용해야 하는 생활 영성원리(Living spirituality)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1장 20절에 보면 우리 모두가 ‘그 분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1:20)”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4가지를 권면합니다.
1) 언어관리에 힘쓰라(13절)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선 먼저 언어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기 저기 다니며 ‘험담하지 말라(13절)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루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11:12)”
한담이란 뜻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여 상대를 비난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22절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않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를 다는 것처럼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칭찬과 격려보다는 험담과 비방이 주를 이룹니다. 시대가 너무나 악해져 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신분에 어울리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 나오는 말 한마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될 것입니다.
2) 영성관리에 최우선을 두라(17절)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11:17)”
시대가 어두워지고 삶이 힘겨워져도 우리들이 늘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영적인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늘 자신을 향해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내 영혼을 이롭게 하는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인생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무엇보다 영적인 삶을 황폐케 만드는 일에 몸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18절 말씀과 같이 악인의 삯이 허무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란 강도나 도적질등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보다 성경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악한 자는 바쁘게 다니며 늘 무엇인가 시도를 하는 것 같아도 좋은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오늘 19절 말씀을 보았을 때 세상의 악한 물결에 따라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번영이나 성공은 있을지 몰라도 그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11:19)”
우리가 죄악에 빠지게 되면 가장 큰 손실은 오늘 2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미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울러 잠언은 악한 자들이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징계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찌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느니라(20절)”
3) 재정관리에 지혜롭게 행하라(24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정관리’입니다. 즉 “돈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돈을 지혜롭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무엇입니까? 오늘 24-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윤택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구제하는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흩어 구제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가진 것을 나누면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부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하는 것은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풍족하게 하고 잘 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에는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것“(전11:1)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간단한 원리를 무시하기에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이러한 성경적인 원리를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실제로 이 세상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힘과 명예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과 재물을 은혜가운데 지혜롭게 사용하며 구제하며 사는 자들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같이 번성하리라(잠11:28)”
4) 시간을 아껴라(27절)
오늘 본문에서 사람이 시간을 잘 사용하려면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들에게는 악이 임하느니라(11:27)”
선한 일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27절)
에베소서에 보면 사람은 원래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시간을 아껴 선한 일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떤 면에서 선한 일을 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짧은 시간들입니다. 시간을 잘 사용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악한 자를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독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잠11:29)”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면 그는 사람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지만 만일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사용한다면 그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시간을 잘 사용하면 내 주변에 귀한 인재를 얻게 됩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은 얻느니라(잠11:30)” 선한 일에 시간을 내면 하나님께서 복된 만남을 예비하시고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선교사역를 통해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귀한 일에 헌신할 일꾼을 찾아낸 것입니다. 12명만 말씀으로 변화되어 제자로 헌신하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생활 영성원리를 가지고 언어와 영성, 재정과 시간관리에 최선을 다하며 지혜롭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삶을 기뻐 받으시고 순간 순간 복되고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지경이 확장되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잠 11:24-26 / 최성규목사 (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성공시키는 사람",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 습니다.
"성공시키는 사람". 우리가 그 동안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성공시키는 사람,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눕니다.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성공한다."
다 그렇게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망하고 나는 잘 됐다, 너는 죽고 나만 살았다. 다른 사람은 실패하고 나만 승리자가 되었다. 과연 그 사람이 성공자일까? 아마 세상의 환경에서는 그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양심으로 본다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될 수 있습니다.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즐거워야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성공시키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십니다. 지옥 갈 자를 천국 가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받아 건강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축복하셔서 부유하게 하십니다. 슬픈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 아담은 우리를 다 절망시켜 놓았습니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느냐?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절망하고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영원한 소망과 위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을 대신 당하셨는지 몰라요. 태어나실 때, 말이 잠자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사시면서 너무나 가난하셨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는지 몰라요. 또 가시관을 쓰셨어요.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어요. 왜 가난하셨습니까?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왜 매를 맞으셨습니까?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기 위하여, 왜 그 많은 저주를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또 교회의 제 작이 된 우리들, 누구처럼 살아가야 됩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성공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성공시켜주면서 살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칭찬하는 사람", 칭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칭찬보다 더 좋은 치료약도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칭찬해 주어봐요. 격려해 주어봐요.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치료의 기적 을 나타나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칭찬해주고 남을 인정해줄 때, 그 사람은 성공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칭찬하는 사람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칭찬을 받기를 원하고 비난을 받기를 원치 아니하지요. 칭찬 해주는 사람 앞에는 사람이 막 모여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칭찬해 주는 곳입니다. 정죄하는 곳이 아니 라 칭찬해주는 곳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비난거리 보다는 칭찬거리를 사람에게서 찾아야 돼요. 누구를 만나든지 저 사람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고 고민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칭찬거리를 찾을까? 얼마나 칭찬할게 있을까?"
하고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습관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남의 흠을 잡는 거예요. 남을 깎아 내리는 거예요. 또 남의 흉을 보면서 그것을 아주 즐기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칭찬하면 칭찬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욕하면 욕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무엇과 같습니까? 산울림 법칙과 같습니다.
"사랑해"
그러면 산이 사랑한다고 막 말해요. 미워한다고 말하면
"미워해, 미워해"
하고 울림이 되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자기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 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어찌하든지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칭찬해줄까? 칭찬 할 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어찌하면 칭찬해줄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을 구원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시는데, 하나님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도 구원하시는데, 왜 우리가 뭐 잘났다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나 그거 예요. 그것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돼요? 하나님 을 닮아야 돼요. 그래서 누구든지 만나면 그 사람 속에서 칭찬 거리를 찾아야돼요.
"뭐가 잘 났지?"
그래야 돼요. 사람마다 다 특성이 있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똑같은 사람 한 명도 없어요. 하나님은 같은 사람을 안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므로 모두가 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다 작품이에요 작품. 상품이 아니고 작품이에요 작품. 작품은 값이 없어요. 너무나 비싸서 값이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한 영혼의 한 생명은 천하를 얻고도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행한 작은 일들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별로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행한 지극히 작은 선행도 기억하시고 칭찬해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잘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주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주님은 그 상을 결단코 잃지 안겠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칭찬해줄 줄 알아야 돼요. 칭찬을 인색 해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칭찬할 때, 그 칭찬 받는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어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므로 어떤 보약보다 더 좋은 보약이 뭐냐? 그것은 칭찬이라는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고 은혜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 뭐냐?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칭찬해주는 거예요. 칭찬해주는 사람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어요.
둘째로,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호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때에 서로 성공하며 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격려해주어야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격려해주어야 돼요. 아내는 남편을 격려해주어야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녀들도 수고하고 고생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격려해드려야 돼요.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어렵게 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그 자녀를 보면서 정말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야, 너 참 아빠가 돈도 많이 못 벌어다주고, 용돈도 많이 못 주고, 학비도 제때 못 대주는데, 참고서적도 잘 사지 못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주어서 참 고맙다. 참 감사하다."
그럴 때 그런 가정은 화목할 수 있어요.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거기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가정이 되어서 복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가 이 때에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서로 성공하기 위해서, 이웃과 이웃끼리도, 성도와 성도끼리도, 친구와 친구끼리도, 격려해주어야 돼요. 히브리서 10장 23-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격려해주라는 거예요. 낙담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격려해줄 때, 그 사람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다시 일어나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실패나 영원한 성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도 다시 용기를 얻어 재기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특히 착한 일을 하다가 낙담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착하게 사는 사람 이 언제나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선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가 많다고 요.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다고요.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 해주어야 돼요. 우리 교회 안에도 가끔 보면 그런 때가 있어요. 열심히 기도하는데, 열심히 봉사하는데, 열심히 헌금도 하는데, 열심히 충성도 하는데, 열심히 전도하는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흥, 그렇게 열심이더니 뭐 저래? 그렇게 충성하더니 뭐 저래?"
그래서 비웃는 사람이 있어요. 큰 잘못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준다구요. 지금 가진 것 보다 30배, 60배, 100배 복을 받으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깨버려야 돼요.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바꾸어야 해요. 그릇을 바꾸기 위해서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당장 우리에게 아픔도 주시고 고통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 모두가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믿음을 키웠을 때, 그 큰 그릇 위에 주님은 축복하십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할 수 있도록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30배, 60배, 100배 더 줄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알 수 없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예요. 지금 이 어려움 같지만, 어려움 뒤에는 분명히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예 수를 믿고 고통 당하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은 달라요.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완전히 굴입니다. 깜깜한 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하는 아픔과 캄캄함은 굴이 아닙니다. 터널이에요, 터널. 분명히 지나가면 밝은 태양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굴속에 있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터널만 통과하면 언제 깜깜했더냐? 언제 어두웠더냐? 우리는 새 삶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성도와 성도끼리 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집사님! 더 좋은 일이 일어나. 집사님! 심은 데로 거둔다 그랬잖아. 우리는 기도를 심었잖아. 봉사를 심었잖아. 전도를 심었잖아. 사랑을 심었잖아. 충성으로 심었잖아. 우리는 많이 심었잖아. 지금은 아직 땅 속에서 싹이 나지 않을 때지만, 이제 싹이 날 거야. 이제 잎이 날거야 꽃이 필거야. 열매를 많이 맺을 거야 걱정하지마. 우리 함께 이 어려움을 같이 나누자고."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진다 그랬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열심히 세상의 악에 부딪혀서 낙담을 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들을 찾아가서 붙들어주고 이들을 찾아가서 격려해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모세가 죽고 난 후에 이 여호수아가 이제 캄캄한 거예요.
"어떻게 될까?"
염려 근심했어요. 어떻게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을까? 낙담하고 있었을 때, 불안하고 있었을 때, 우리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어 요. 여호수아 1장 9절에서 하나님은 불안해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격려를 받은 여호수아가 다시 믿음을 회복했어요. 그리고 용기를 가졌어요. 그래서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넉넉하게 들어간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대하 15장 2절과 7절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 왕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땅은 물론 에브라임 산간 지대까지 그가 빼앗은 모든 땅에서 우상을 모조리 다 제거하고 성전 앞에 있는 여호와의 단을 수리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관용하는 사람이 되어 야 합니다.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은 용서하고 이해하며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하는 사람이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칭찬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랬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깎는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였다고 그래서 반드시 내가 성공하는 것도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실패케 했다고 내가 잘 되는 것 전혀 아닌 것입니다. 동업자를 망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나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같아 살아야 해요. 따라 합시다.
"같이 살자! 같이 살자! 같이 살자!"
우리는 세상 문화에 빠지면 안돼요. 세상 문화는
"너 죽고 나 살자."
그거예요.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게 아닙니다.
"너 살고 나 살자."
그것입니다. 세상 문화는
"네가 망해야 내가 흥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흥해야 나도 흥한 ."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가슴을 열어야 돼요. 좁은 가슴 만들지 말고, 큰 가슴, 넓은 가슴, 높은 가슴, 깊은 가슴,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 관용하는, 다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살아갈 것입니다.
사회 모든 조직은 넓은 망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심해서 일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결국 가진 자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성공하고 남도 성공하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성공 할 수 있는 비결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이 재벌들 정신들 좀 차려야 돼요. 중소기업 다 망하게 해 놓으면 자기들만 뭐 될 것 같지요? 아니에요. 같이 살아야지. 정치하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나만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말고 빨리 자기 후배들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어 놓아야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행복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안에서 서로서로 싸우지 말고 경쟁을 다른 나라와 세계와의 경쟁이지 자기들끼리만 경쟁은 아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의 없는 실수나 지혜 부족한 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아무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배우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관용과 이해는 감사의 보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다가 실수했다면, 그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나쁜 것은 뭡니까? 실수할까봐 일 안하는 거지요. 복지부동 하는 거지요. 더 나쁜 거지요. 일하다가 실수할 수 있어요.
에디슨(T. A. Edison)이 전구를 발명했어요. 1만 번 실험해서 발명되었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몇 번 실패했습니까? 9,999번을 실수했다고요. 그런데 만 번째 다시 한 번 실험해서 전구가 나왔다고요. 에디슨은 실패자입니까? 아니지요. 성공 자지요. 9,999번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성공했으니까 성공자인 거예요. 그런데 9,999번까지 실패한 것을 보고
"실패했다, 나쁘다"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이지요.
관용을 가지고 받아주는 거예요. 왜요? 일하다가 실패했으니까, 잘 하려고 하다가 잘못됐으니까, 관용해주어야 돼요. 그런 사회가 되었을 때, 이 관용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이 사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신지식이 더 확장될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고, 정말로 맑고 밝고 환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2절에 이런 말합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넷째로,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남을 성공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으로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로만 잘 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제하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줄 때, 많은 사람이 힘을 얻어서 성공할 수가 있고 다시 재기할 수가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구제는 남을 성공시키고 복 받기 위한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 하나 봅니다. 잠언서 11장 24-25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 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착한 농부 형제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형이 동생을 데리고 공부시키고 또 일 시켰어요.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어요. 그래서 동생 장가를 들였어요. 그리고 나서 1년 동안 농사를 졌습니다. 형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동생이 새 살림 낫기 때문에 얼마나 생활하기가 힘들까? 내가 좀 도와주어야지. 그러나 도와준다고 말하면 그가 사양하고 거부할 것이니까 몰래 주어야지". 그래서 한 밤에 농사지은 논에서 볏단을 실어다가 동생 논에다가 살짝 갖다 주었어요. 그런데 동생은 동생대로
"형이 나를 장가 들여서 새 살림 내주느라고 얼마나 돈을 많이 쓰셨을까? 우리형이 큰살림하느라고 고생하실까? 나는 좀 덜 쓰더라도 내가 형 좀 보태 드려야지". 농사를 잘 지어서 볏단을 실어다가 몰래 형 논에 갖다가 드렸어요. 형이나 동생이 그 다음날 아침에 논에 가 보았더니, 분명히 나는 동생에게 갖다주고, 형에게 갖다가 드렸는데 똑같은 볏단이라
"이상하다."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매일 같아요. 그러다가 형제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었나 봐요.
"그럼 오늘 새벽에 더 일찍 가보자."
그래서 형도 볏단을 싣고 가고, 동생도 볏단을 싣고 오다가 중간에서 딱 만났어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거 아닙니까? 이런 삶이 되었다면, 형제가 어찌 싸우겠으며, 형제가 어찌 다투겠으며, 어찌 미워하겠으며, 이런 갈등이 있겠으며, 부정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줄줄 알아야 돼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주님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 성공하겠다고 말하면 다 망합니다. 그런 이기심, 탐심, 욕심, 교만, 다 버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처럼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성공시킬까? 내가 남을 어떻게 성공시킬까?"
마음을 먹고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내게 있는 것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면, 더 많은 사람이 성공하며, 남이 성공하고 내가 남을 성공시켜 주었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이 산울림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다 주께서 돌아오도록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 이런 사회가 부정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주께 영광 돌리는 사회, 이런 사회가 맑고 밝고 환한 사회, 행복한 가정, 성공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