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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연류 가야금산조
최초로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성금연은 1923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7세부터 최옥산에게 가야금풍류와 산조를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안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15세에는 조명수, 정정열, 송만갑, 한성준 등의 명창들에게 판소리와 춤을 익혀 남도음악의 진수를 체득하고 예도를 닦았다.성금연의 가야금산조는 어느 유파의 가야금산조보다 가장 널리 알려져 왔고 가락이 아기자기하고 화사하며 리듬이 흥겨워서 가야금산조하면 성금연을 떠올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성금연 가야금산조의 가락은 호남의 김창조의 정통을 이어받은 안기옥 가락이 본래 그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나 박상근의 이색적인 충청도 풍의 가락에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성금연 특유의 산조가락을 이루어 갔다. 그리고 20세에 경기 무속음악의 명인 지영희와 결혼함으로서 성금연의 음악세계는 더욱 풍성하여졌고 가야금산조와 창작음악 작곡에 경기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30세 무렵 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제자양성 등의 일에 힘을 쏟았고 서울중앙방송국의 전속이 되어 음악연주, 서울중앙방송국 주최 국악경연대회 1등 수상, 국악예술학교,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후진양성, 시립국악관현악단의 악장을 거치면서 연주기량을 넓혔다. 1970년대 초반까지 무대와 방송을 통하여 혁혁한 연주활동을 하였다.
다른 가야금 연주자들과 달리 성금연은 가야금 창작곡의 작곡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살풀이, 세가락별곡, 춘몽, 향수, 흥, 금천무, 눈물이 진주라면 등 수많은 무용곡과 영화음악 등의 창작곡들을 남겼으며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락보다 훨씬 많은 가락들을 작곡하여 1시간 이상의 훌륭한 가야금 긴산조를 완성시켰다. 성금연류의 1시간 이상되는 긴산조는 성금연이 얼마나 훌륭한 작곡가이며 특출한 가야금 연주자인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영희·성금연의 산조를 찾아서
조진영(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종묘제례악을 지정하고 42년이 지났다. 그리고 작년에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靴鞋匠)을 116호로 지정했다. 순서대로 하자면 우리에게는 116개의 무형문화재가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목록을 훑어가면 중간쯤에 빠진 이처럼 비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정 해제된 종목이 하나가 있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52호 시나위가 그것이다. 종목이 해제되면서 예능보유자 지영희 역시 인정 해제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예능보유자이자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인 성금연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예능보유자에서 해제된다. 당대최고 명인이자 부부 국악인으로 유명한 지영희·성금연 부부가 하와이로 이민을 간 것이다.
민속악의‘산 귀신’지영희
경기도 무속 음악과 민속악의‘산 귀신’으로 불리며 장구, 아쟁, 해금, 피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던 지영희는 1909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경기지역의 세습무 지용득(池龍得)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열다섯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춤을 학습하며 예능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8년 내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학련에게 호적을 사사한다. 정태신에게 양금, 단소, 퉁소를, 지용구에게 해금·풍류 시나위를, 양경원에게 피리 삼현육각을, 김계선에게 풍류 대금을, 방용현에게 민속 대금을 최군선에게 농악 12채를 학습한다. 또 오덕환에게 무속 장구를 학습하고 박춘재에게 경서도 민요를 학습한다.
1938년부터 한성준 무용단과 함께 일본 순회공연을, 그리고 1944년 최승희 무용단과 중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46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로 활동했고, 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유망한 신인들을 양성했다. 1966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해외이민으로 지정이 해제되었다.
지영희가 국악계에 끼친 영향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지만, 레코드 취입을 통한 국악의 대중화와 제자 양성, 그리고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를 통한 피리산조에 있다. 지용구가 창시한 해금산조는 지영희와 한범수에 의해 하나의 장르로 완성된다. 오늘날이야 해금이 전공자들이나 청중들에게 각광받는 악기이지만, 이전까지 해금은 지속음을 내는 악기로 다른 악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경기 무속시나위의 영향을 받아 청과 조의 변화가 많으며, 다른 산조가 중중모리나 자진모리 형태의 장단이 많은데 비해 굿거리장단이 특징으로 꼽힌다.
음반 설명
선병철(음악평론가)
산조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 쓰면 '허튼가락' 또는 '흐트러진 가락' 쯤으로 풀이된다. 즉 어떤 양식이나 규격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자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유로윤 가락을 풀어 헤친다는 뜻이다.
산조의 특성은 한 사람의 독주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된 가락을 계속해서 연주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독주 악기의 성격에 따라 적당한 반주자가 곁들여지는데, 반주 악기의 대표적인 것이 북이나 장고 같은 타악기다.
'허튼가락'의 유래는 곧 산조가 발생할 수 있었던 데 대한 원인규명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원인규명의 발원지에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민속 음악으로 시나위와 판소리를 들 수 있다. 즉 산조라는 민속기악의 대표적인 형태를 시나위 또는 판소리 같은 데서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나위가락이나 판소리가락이 가지는 특성이 산조음악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시나위는 주로 전라도 지방이나 충청도지방에서 널리 연주되어 온 무속(巫俗) 음악이다. 시나위가락은 이러한 무당굿판에서 악사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악기로 허튼가락을 연주하면서 성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흥취가 돋는 대로 죽석연주(즉흥곡)를 했다는 뜻이다. 이때 쓰인 악기가 젓대, 피리, 해금, 장고 등이었는데 그것은 뒷날 젓대시나위, 해금시나위, 피리시나위 같은 기악곡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더욱 발전하여 소위 젓대산조나 해금산조 같은 독특한 기악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산조의 원형을 시나위에서 찾아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또 하나, 산조의 원형을 판소리에서 찾아보는 까닭은 산조가 가지는 조(調)와 장단이 판소리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판소리에서 쓰이는 진양, 중몰이, 자진몰이 등의 장단들이 산조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 본다면 산조와 판소리의 가락적 특성에 유사점이 많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 산조도 결국 판소리가 갖는 음악의 특성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추론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산조의 유래는 시나위 합주에서 연주되었던 가락이나 판소리 장단의 흐름에서 연유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것이 점차 음악적으로 체계화된 데서 본격적인 산조의 탄생이 가능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산조가 독립된 기악 독주곡 형태로 자리를 잡으며 민속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산조를 연주하는 악기가 거문고와 가야금에 국한된 것은 산조발생 초기의 일이다. 즉 거문고산조와 가야금산조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음악이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산조악기의 다양한 확산이 이루어짐으로써 대금산조, 피리산조, 해금산조 같은 이름이 생겨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나위와 판소리에 나타난 허튼가락을 단편적으로 흉내내면서 연주하던 것을 좀더 세련된 형태로 체계화시킨 것이 산조이며, 산조를 연주하는 악기에 따라 각각의 곡명이 부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야금산조다.
산조가락이 틀을 잡아가면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악기가 가야금(伽椰琴)이다.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가야고'이나 편의상 '가야금'이라고 통칭한다.) 가야금은 신라 진흥왕 때의 악성(樂聖)이라 일컬어지는 우륵(于勒)에 의하여 연주법이 더욱 개발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민속악기 중 가장 대표적인 악기로 사랑을 받아 왔다.
가야금은 정악을 연주하는 것과 민속악을 연주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원래는 양이두(羊耳頭)를 가지고 있는 제법 큰 악기였으나, 근래 이르러 산조와 같은 민속음악을 연주하기에 편리하도록 발전적인 개량을 보게 되었다. 원래의 가야금은 줄과 줄 사이가 너무 넓어서 산조에 나타나는 자진몰이나 휘몰이 같은 빠른 가락을 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서 민속음악 연주에 알맞도록 줄 사이를 좁히고 전체적인 크기도 줄여서 만들어 사용해 왔는데, 가야금산조를 연주하는 산조 가야금이 바로 그것이다.
가야금에 산조가락을 끌어들여 이른바 '가야금산조'라는 민속기악곡을 만들어낸 사람은 김창조(金昌祖, 1865~1918)이다. 김창조는 산조 초창기에 활동한 가야금의 명인으로서, 고종(高宗) 즉위 2년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한일합방직후에 타계한 민속음악의 대가이다.
그는 한말의 격동기를 살면서 민속음악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연구룰 통해 산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허튼가락을 잘 짜진 틀(型)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형화시킨 창시자였다.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 산조음악은 이러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같은 무렵에 백낙준은 거문고산조를, 박종기는 대금산조를 체계화함으로써 산조음악의 본격적인 등장을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오늘날 연주되는 여러가지 형태의 가야금산조는 모두가 김창조가 짜놓은 틀을 원형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 원형에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기법이나 가락을 적당히 첨가시킴으로써 하나의 흐름, 곧 '유(類)'를 형성한 데 불과하다.
김창조가 짜놓은 가야금산조의 원형은 그의 제자들인 강태홍(姜太弘), 김병호(金炳昊) 등에 의하여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김창조의 원곡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사람의 연주자들이 각각의 자기 유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쳐 왔다. 그렇게 해서 김창조의 본디 가락에 변주형태를 가미한 김윤덕류, 김종기류, 최옥산류, 박상근류 등의 수많은 가야금산조가 연주되고 있는데, 김죽파류나 성금연류의 가야금산조도 그 중의 한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에서 김창조, 한숙구(韓淑九), 박창옥(朴昌玉) 등이 가야금산조의 명인으로 활약하면서 길러낸 문하생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의 흐름을 이어 받은 전수자들은 한성기(韓成基), 최옥산(崔玉山), 안기옥(安基玉), 김병호(金炳昊), 한수동(韓壽東), 김종기(金宗基), 정남옥(鄭南玉), 강태홍(姜太弘) 등이 주류를 이루웠으며, 그 명맥은 김죽파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김창조, 한숙구, 박창옥 등이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가야금산조를 완성해 가고 있을 때 충청도 지방에서는 이차수(李且守)와 심창래(沈昌來)가 이 분야에 심취하여 나름대로의 산조가락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 중 이차수의 산조는 박상근(朴相根, 1905~1949)에게 전수되었다가 다시 성금연(成錦鳶)에게 전수되어 이른바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라는 유파를 낳게 했다.
그러나 성금연이 당초부터 충청도 유파의 가야금산조를 익힌 것은 아니다. 성금연은 1923년 광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전라도의 가야금가락을 익히며 자라났다. 그녀가 최초로 가야금산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7살 때 최옥산 문하에 입문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조면수와 안기옥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성금연의 스승이 말해주듯이 그녀는 처음부터 김창조의 흐름을 이어 받은 순수한 전라도 산조가락과 함께 가야금공부를 해나갔다. 김죽파가 그랬던 것처럼, 성금연도 가야금 외에 판소리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민속악의 폭넓은 이해의 바탕위에서 산조가락을 연마한 것이다.
그러나 성금연은 점차 박상근의 산조가락에 심취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충청도 산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차수의 가야금산조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박상근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이차수의 흐름을 전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김창조의 전라도 산조와는 약간 다른 가락으로 산조를 연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성금연류의 독특한 가야금산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김창조의 전라도 산조 바탕 위에다 이차수의 충청도 산조가락을 접목시켜 훨씬 화려한 스타일의 성금연식 산조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금연의 가야금산조는 김죽파류에 비하여 독특한 화사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화사함은 영롱하고 투명하기까지 하여 누구나 그 가락에 취하게 해버리고 만다. 낮은 음이 깊이 첨가된 김죽파류에 비하여 성금연류가 조금쯤 가볍다거나 화려하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금연이 가야금을 연마하면서 보여준 열성은 국악계에 하나의 화제가 되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켜 '가야금에 미친 여자'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성금연은 가야금에 대단한 열정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러한 열성은 가야금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했으며,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참으로 다망한 연주활동을 펼치게 했다.
성금연의 부군이었던 지영희(池瑛熙, 1909~1979)씨도 해금과 피리의 명인으로 꼽히던 국악인이었으나, 그들이 1974년에 하와이로 이민간후에 그곳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이후 성금연은 오랫동안 침목을 지키고 있다가 지난 84년 2월에 잠시 귀국하여 계획에 없었던 가야금산조 연주회를 가진 바 있다. 성금연으로서는 참으로 오랫만의 연주회였는데, 아쉽게도 그것이 성금연의 마지막 고국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87년 7월 29일 새벽, 하와이로부터 그녀의 부음이 날아들어 국악인들을 슬픔에 젖게 했기 때문이다. 향년 64세. 아직은 더 연주할 수 있는 나이에 성금연을 잃었다는 것은 국악계의 큰 별이 하나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는 다스름-진양-중몰이-느린 중몰이-중중몰이-자진몰이-휘몰이-단몰이로 이어져 김죽파류와는 약간 다른 진행을 보이고 있다. 역시 전곡은 쉬지 않고 계속 연주되며, 일관된 가속으로 몰아붙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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