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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아펌
Gregory P. 님이 번역하신 글입니다.
며칠전 샤크의 워크에틱, 12개반지 발언이 나왔던 인터뷰입니다.
Q : 고등학교 때 코비는 농구 외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나요?
A : 사실 지금이랑 별 차이 없어요. 호기심이 매우 많았죠. 제인 마스트리아노라는 좋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요. 선생님께서 글쓰기에 대한 제 호기심을 자극해 주셨죠. 제가 당시에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글쓰기나 스토리텔링 자체 때문이 아니였어요. 하지만 선천적으로 스토리텔링은 제가 더 나은 농구선수, 더 나은 동료, 더 나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또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스토리텔링에 빠진 거죠. 사소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전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죠. 그 외에 일에는 관심을 가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Q : 몇살 때 그런 확고한 목표를 갖게 되었나요?
A : 13살때요.
Q : 어디서 영감을 받았죠?
A : 농구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도전이죠. 매직과 조던의 말도 안되는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내가 저 레벨까지 갈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해보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호기심이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걷게 만들었죠.
Q :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게 경쟁심이 강했나요?
A : 제가 하는 일에만 경쟁심이 강하죠. 이렇게 얘기해 볼께요. 마이클은 모든 일에 경쟁심이 강해요. 말도 안되는 것들 까지도요. 그래서 항상 저에게 같이 골프를 치자고 하는데요. 그럼 전 “마이크, 전 당신을 잘 알아요. 초등학교 때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고요. 캐롤라이나에 있을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잖아요. 그럼 적어도 X발 100년은 공을 쳤다는 건데…” 전 골프를 안쳐요. 골프장에 가서 제가 깨지는 모습은 절대 볼 일 없을 겁니다. 딱 한 번 골프채를 잡아본 적 있는데, 400야드 땅볼을 쳤었죠. 그때 제 경쟁심이 불끈하며 ‘이거 제대로 배워봐야겠는데?’ 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해 손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그 후로 골프채를 잡지 않았죠.
Q :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코비가 가진 우위 중 하나가 농구에 대한 집중력이라고 보는 건가요?
A : 그렇죠. 농구는 저에게 가장 중요했어요. 모든 것이 더 나은 농구선수가 되기 위한 방법을 배우기 위한 노력이었죠. 이런 관점을 갖고 있다면, 말 그대로 세상이 나의 기술을 연마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서관이 되는 거죠.
Q : 당시 또래 동료를 판단할 때는 어떻게 평가했나요?
A : 13살 때 전 ‘킬 리스트’가 있었어요. ‘Street & Smith’s’라는 농구 잡지에 선수 랭킹이 있었는데 저는 순위 밖이었거든요. 당시에는 190cm 70Kg정도의 말라깽이 였죠. 아마 57위쯤에 올랐던 것 같은데, 56위부터 1위까지 내 위에 누가 있는지, 어느 팀인지 쭉 살펴본 후 농구 시합을 할 때마다 그 녀석들을 찾아 다녔죠. 56명을 찾아서 꺾는 것, 그게 제 고등학교때 목표가 되었습니다.
Q : 높은 순위에 있는 선수와 맞붙었을 때, ‘이 녀석이 나보다 어떤 면에서 더 나은지 살펴보자’라는 생각인가요? 아니면 그냥 ‘이 자식 없애버리겠어.’라는 마인드인가요?
A : 몇살때이느냐에 따라 달라졌죠. 13살 때는 단순히 또래보다 나아지는 게 목표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는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후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살펴봤죠. 장난으로 하는지, 바보처럼 구는지, 단지 키가 크기 때문에 잘한다고 평가받는 건 아닌지, 실제로 기술과 생각이 있는지 등등. 그리고 전 제 약점만으로 플레이했어요. 제 강점은 숨겨뒀었죠. 여름 농구시즌은 경기 수가 많아서 기술을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그럼 언제 더 나아지겠어요? 중요한 대회나 시합에선 강점으로만 경기했죠. 왜냐하면 이기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전 게임 중에 왼손, 풀업점프샷, 포스트게임 등 제 약점으로만 시합하는 전략을 택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17살이 됐을 때 전 다재다능하게 되었죠. 그리고 13살 때 잘하던 애들을 보면 17살이 되어서도 똑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건 문제가 있는 거죠.
Q : 고등학교를 지나 리그에 입성하면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급의 선수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때도 같은 방법으로 선수들을 판단했나요?
A : 그랬죠. 그런데 NBA에서는 사실 더 쉽더군요. NBA에는 돈을 위해 농구를 시작한 선수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막상 NBA에 들어오면 재정적 여유가 생기니, 열정과 워크에틱, 집요함 등이 사라지는 선수들을 많이 봤어요. 그걸 보며 “이거 완전 어린애 사탕 뺏기잖아? 이러니 마이크가 맨날 빌어먹을 챔피언쉽에서 우승하지. (No wonder Mike wins all these fXXking championships)”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열정을 가졌었지만 자신의 일생을 농구에 헌신하지 않은 선수들도 있죠. 가족 등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으니 선택의 문제니까요. 농구가 항상 첫번째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거죠.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이거 앞으로 재미있겠군’이라고 생각했어요.
Q : 코비가 쓴 책을 보면 “친구나 인간관계도 상관없었다. 내겐 농구 뿐이었다.”라고 쓰여 있더군요. NBA커리어를 시작하면서 당신은 이미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었죠. 그렇다면 고등학교 친구 등 인간관계는 어떻게 했나요?
A : 물론 나빠졌죠. 하지만 괜찮았어요. 친구나 가족 등 절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를 잘 알죠. 제가 제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다시 만났을 때 실수하지 않는다면, 떨어져 있는 시간은 크게 상관없죠. 요즘 선수들은 가까운 선수들끼리 같이 휴가를 가거나 놀러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저 휴가일 수도 있겠지만, 전 한 번도 그렇게 해본적 없어요. 단 한번도요. 왜냐하면 은퇴하고난 후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걸’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당시에 제가 ‘최고의 산’(GOAT mountain)이라고 부르던 산을 등반하고 있었죠. 그 산에 올라 매직, 조던, 버드, 올라주원, 웨스트, 로버슨, 러셀과 같은 선수들에게 물었어요. ‘어떻게 했나요?’, ‘당신의 경험은 어땠죠?’라고요. 특히 조던에게요. 저에게는 큰 형 같은 존재에요. 제가 루키일 때부터 큰형 같았죠. 그들에게 많은 조언을 얻었죠.
Q :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죠. 당시 최고의 선수이자 모두의 우상인 조던은 18살짜리 루키였던 당신에게 엄청난 존중을 보여줬어요. 어떤 기분이었나요?
A :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저는 마이클이 저에게 조언해줄 때 ‘전부 제가 알고있는 것만 얘기하네요’라고 했죠. 고등학교때 전 76ers 선수들과 함께 연습하곤 했어요.(역자주 : 코비의 아버지인 조 브라이언트는 76ers 선수 출신이며 당시 필라델피아 라샐대학교의 코치로 재직중이었습니다) 그때 식서스 선수들에게 “마이크를 수비하는 건 어떤가요?”라고 물었죠. 그러자 “마이크? 흑인 예수(Black Jesus) 말하는거야?”라고 하더군요. 제가 “뭐야 X발? 흑인 뭐? (What the fxxk? Black who?)”라고 반응하자 “우린 Black Jesus라고 부르거든. 아니면 Black Cat이라고 부르던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마이크라고 부를건데요? 그게 X발 그 사람 이름이잖아요? (Imma call him fxxking Mike. That’s his fxxking name.)라고 답했죠. 조던이 다른 선수들에게 일으킨 공포감은 이 정도였어요. 제가 조던과 붙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라고 하자 선수들은 “오… 그러고 싶지 않을걸?”이라고 하더군요. 전 “뭐라고요? 절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맞붙었을 때 조던은 그걸 이해한 것 같아요. 그는 제가 18살 때 저를 여러 번 막아냈죠. 그럼에도 전 바로 다음 플레이에 또 승부했어요. ‘난 당신이 안 무서워.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야’라면서요. 조던은 저에게서 18살의 자신을 봤고, 그러한 유대감이 저희를 이어주게 했죠. 조던은 정말 큰 형 같은 존재에요. 매년 서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고, 지금도 정말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Q : 루키 시즌 유타와의 마지막 게임. 3개의 에어볼을 던졌죠. (역자주 : 97년 서부컨퍼런스 준결승, 레이커스가 1승 3패로 탈락 위기에서 펼쳐진 5차전 경기에서 연장 승부 끝에 재즈가 승리함)
A : 아마 5개였을걸요?
Q : 그때 말론이 와서 뭐라고 했어요. 물론 당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샤크도 와서 귓속말을 했죠. 그때 뭐라고 하던가요?
A : 모르겠어요.
Q : 기억이 안나는 건가요?
A : 아뇨, 아예 듣지도 않고 있었죠. 저의 ‘asshole’같은 면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아마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했는데요, 전 ‘난 X발 괜찮다고!’라고 생각했어요. ‘뭐 전국 생중계 방송에서 에어볼 5개쯤 쐈지. 그것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난 18살이잖아. 괜찮아.’이런 생각이었죠.
Q : 그러한 굴욕을 겪고서도 어떻게 멘탈 관리를 하나요? 발보사를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유능한 선수임에도 중요한 순간에는 늘 흔들렸죠. 어떻게 정신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거죠?
A : 순간 현실을 직시하는거죠. 결국 자신을 극복해야 해요. 내가 세상의 중심은 아니니까요. 창피당했다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당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잊어버려야죠. 사람들이 어떻게 날 생각할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에어볼을 5개나 던졌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고등학교때는 일년에 최대 35 경기를 했어요. 그것도 일주일에 한 경기쯤이니 충분히 쉴 시간이 있었죠. NBA에서는 늘 백투백이에요. 체력이 모자랐던거죠. 그때 슛을 보면, 방향은 모두 정확했지만 거리는 모두 짧았어요. 그래서 체력을 키워야 했어요. 훈련 방식도 바꿔야 했고요. 웨이트 프로그램도 82경기에 맞춰서 조정했죠. 플레이오프에 들어가도 다리 힘이 약해져 슛이 짧아지지 않도록요. 이유를 찾아야해요. ‘에어볼은 체력이 문제였어. 그럼 체력을 길러야겠군.’ 그럼 끝이죠.
Q : 그렇다면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은 어떻게 만들죠? 필 잭슨은 MJ와 코비 둘 다 코치해봤기 때문에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데요…
A : 뭐 항상 첫째를 꼽기 마련이죠.
Q : 하지만 필 잭슨이 말하길, 자신이 코칭했던 그 어떤 선수도 코비 수준의 ‘워크에틱’에 달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워크에틱’을 직접 본 많은 사람들의 목격담도 있었고요. 본인의 ‘워크에틱’은 어땠고, 또 얼마나 그걸 지속해온건가요?
A : 매일이요. 20년 간 매일이 장점과 단점을 찾고 더 나아지기 위한 과정이죠. 예를 들어 제 점프력은 40인치쯤이니 45~46인치에는 못 미치죠. 손이 크긴 하지만 엄청나게 큰 건 아니였고요. 그러니 한 손으로 공을 쉽게 잡을 수 있게 손가락 힘을 길렀고요. 재빠르긴 했지만 미치도록 빠르진 않았어요. 그래서 기술과 위치에 더 의존해야 했죠. 경기를 더 공부해야 했고요. 하지만 전 그 모든 과정들을 즐겼어요.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전부터 공부를 해왔고, 그게 지금까지 변치 않은거죠.
Q : 어떻게 대답할 지 모르겠지만 하나 물어보죠. 만약 샤크가 코비의 ‘워크에틱’을 가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A : 그러면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었겠죠. (He’d be the greatest of all time.)
Q : 최고의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요?
A : 그럼요. 샤크도 그렇게 말할걸요. 샤크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죠. 보통 그 정도 크기의 사람은 약간 소심하기 마련이에요. 그 정도로 키나 덩치가 커지고 싶어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샤크는 그런걸 신경쓰지 않았죠. 사납고 험악하면서 경쟁심도, 복수심도 강하죠. 샤크가 운동을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거에요. 그러면 전 빌어먹을 반지를 12개는 얻었을 테니까요.
Q : 그럼 하나 더 묻죠. 그런데 이건 두 사람의 불화를 일으키기 위해 묻는 건 아니에요.
A : 상관없어요. 전 샤크한테 맨날 “네가 그 게으른 몸뚱이만 좀 어떻게 했어도…”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Q : 만약 샤크가 당신 수준의 ‘워크에틱’을 갖고 농구에 임했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적었을까요?
A : 그럼요. 전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 하는 사람들과는 일하지 않아요. 우리는 항상 이런 일에 휘말리곤 했는데요, 샤크가 ‘코비가 나에게 공을 안줘.’라고 하면 언론이 즉시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퍼뜨리곤 했죠. 그럼 전 ‘이봐 샤크, 내가 속공으로 코트를 왕복한 후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가도 넌 계속 제자리에 있잖아.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이런 식이었죠. 우리의 언쟁은 주로 그런 거였어요.
Q : 샤크가 나이가 더 많았는데도 그렇게 맞섰다고요?
A : 그런건 신경쓰지 않았어요. 샤크와 주먹다짐을 한 적이 있는데 릭 폭스를 포함해 동료들 모두 제가 완전히 미친 줄 알았죠. 그날 이후 모두들 “그래 코비, 넌 공식적으로 미친놈이야”라고 했어요.
Q : 주먹다짐을 했다고요?
A : 그럼요. 전 물러서지 않아요. 제가 맞아 터진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아무튼 나중에 샤크도 그 날이 터닝포인트라고 얘기해줬어요. 왜냐하면 샤크는 사람들에게 막말하고, 본인이 하고싶은 말을 다 해도 맞서는 사람이 없으니 거기에 익숙해졌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맞서니 ‘이 자식은 완전히 미쳤군’이란 반응이었죠. 그게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죠. 말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제 루키 시즌 피닉스 원정 경기였어요. 샤크가 계속 포스트업을 하는데, 상대방은 파울 작전으로 계속 샤크를 프리드로우 라인에 새웠고, 결국 그는 프리드로우를 대부분 놓치고 있었죠. 그러니 샤크가 저에게 공을 주면, 전 다시 샤크에게 패스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계속 슛을 던졌죠. 타임아웃때 샤크가 “이봐, 내가 열리면 패스해” 라길래, “뭐… 그래” 이랬죠. 그 후에도 샤크는 계속 공을 달라고 했는데 전 그냥 ‘알았다고’ 하고 말았죠. 나중에 또 와서는 공을 달라고 하길래 “그냥 닥치고 내가 못 넣으면 리바운드나 해”(Man, fxxk that. Get it off the rebound if I miss bruh.)라고 했죠.
Q : 그렇게 말했다고요? 1년차에?
A : 18살이었으니까요. 저도 미쳤던 게 분명해요.
Q : 16살, 13살, 2살, 그리고 한달 된 딸이 있다고 했죠? 첫째가 16살이면 아마 NBA 5~6년차쯤에 아이를 가졌을 텐데요, 아내와 어떤 대화를 했나요? 일년에 9개월은 전국을 돌아야 하고, 오프시즌에는 올림픽에도 참가하고 훈련도 쉬지 않았을 텐데요. 가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죠?
A : 아내는 저만큼 경쟁심이 강해요. “매일 8시간씩 나가서 훈련하고, 일년에 9개월씩 집에 없을 거면 빌어먹을 우승이라도 하라고. 우리가 어쩌자고 이렇게 사는건데?”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해요. 에너지를 더 가져야하는 게 중요하죠. 나딸리아나 지아나가 아기였을 때는, 특히 나딸리아가 어릴때가 제 전성기였기 때문에, 나가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경기를 치르고 집에 오면 여기저기가 아프고 피곤하죠. 그래도 딸아이는 수영도 가고 싶고, 공원도 가고 싶고, 그냥 절 올라타고 놀고 싶어 하거든요. 그래도 “너무 피곤해, 좀 누워야겠어”라고 하면 안되요. 그건 공평하지 못하죠. 제가 피곤한지 어떤지, 아기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만약 이게 경기였다면 그냥 참고 뛰었겠죠. 전 독감에 걸린채로도 경기에 뛰었었고, 40도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경기에 뛰었죠. 그런데 가족에게 그렇게 하면 안되죠.
Q : 시즌 전에 스케줄표를 보며 아내와 계획을 짜는 편인가요?
A : 네, 경기 일정을 보며 생일, 발렌타인,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을 체크해요. 언제 가족과 함께할 수 있고, 언제 그렇지 못한지, 홈경기인지 원정인지, 가족과 함께 이동할지, 아니면 혼자 돌아올지 등등. 어떤 날은 딸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경기 후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온 후 다시 비행기에 올라 팀에 합류한 적도 있죠. 가족 행사를 놓칠 수 없으니까요.
Q : 존경스럽군요. 그렇다면 가장 적게 자고 시합에 뛴 적은요?
A : 아예 한숨도 안자고 경기를 뛴 적도 있어요. 나딸리아가 아파서 밤을 샜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나가서 경기를 해야죠. 팬들은 그걸 모르니까요. 동료들도 모르고요. 물론 그들이 내가 밤샜다는 걸 신경쓰거나 알아야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래도 출근해서 일해야죠.
Q : 대단하군요. 조던과 코비의 공통점은 “체력관리 해야하니 여덟 경기쯤 쉬어야지.”이런 게 없거든요. 당신에게 그런건 코미디 같겠죠.
A : 그딴게 뭐에요.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죠. 진심으로요. 말도 안되요. 관중들은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힘들게 일해서 티켓을 산단 말이에요. 82경기를 뛸 정도로 몸관리를 하는 게 선수들의 일이죠. 매 경기마다 수준에 걸맞는 시합을 하는 게 선수들의 일이고요. 선수로서 전 아무것도 피하지 않아요. 몸이 조금 아프다고 해서 시합에서 쉰다고요? 실제로 2000년 쯤, 토론토에서 빈스 카터와 맞붙었을 때였어요. 당시 카터는 리그를 씹어먹고 있었죠. 그런데 제 등이 작살났었어요. 하지만 그게 어떻게 보여질까요? ‘코비, 카터와의 맞대결을 피하고 토론토전 결장’ 사실 진짜 등이 너무 아팠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제가 카터를 피한다고 보겠죠.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레이업 라인에 서서 “앞으로 휴식을 취하고 회복할 날이 충분히 많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등 부상 따위 오늘은 신경 안써. 카터는 나와 맞붙어야해.”라고 했죠.
Q : 골든스테이트와의 경기였죠. 점수는 107-109. 플레이오프가 걸린 경기였고요.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날거에요. 중요한 순간에 슛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아킬레스건이 파열됐죠. 제 친구 니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니마도 농구선수였는데 제게 말하길, “이봐 패트릭, 이해를 못하고 있군. 내가 ACL이 파열됐을 때는 친구 네 명이 날 들어서 옮겨야 했고, 난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었단 말야. 그리고는 곧장 병원행이었지. 그런데 코비는 도대체 어떻게 프리드로우도 던지고 혼자 걸어서 나간거지?”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그 정도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거죠?
A : 예를 하나 들어보죠. 이게 최선의 설명인 것 같네요. 당신이 햄스트링을 크게 다쳐서 걷기도 힘들다고 가정해보죠. 축구, 농구, 배구 등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의사도 집에 가서 소파에 앉아 쉬는 게 최고라고 하죠. 일어나지도 말고 갑작스레 움직이지도 말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다고 칩시다. 아이들은 윗층에 있고, 아내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죠. 그렇다면 당신은 햄스트링 부상따윈 잊고 윗층으로 뛰어 올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뛰쳐나올거에요. 거기에 내 모든걸 걸죠. 햄스트링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을겁니다, 그렇죠? 왜냐하면 가족의 목숨이 햄스트링 부상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경기가 부상 그 자체보다 중요하면 부상따윈 느껴지지 않아요. 그 때는 그랬죠.
Q : 그날 경기 후 락커룸에서 한 기자가 “코비, 아킬레스건이 찢어졌다고 하는데 맞나요? MRI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아킬레스 부상이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묻자 그렇다고 했죠. 그러자 다른 기자가 말했어요. “이 부상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코비 당신이겠죠?” 당신은 그때 고개를 숙이며 “이런 젠장(Oh, man… shit)”이란 말을 내뱉고선 눈물을 글썽였죠. 그 때 “이런 젠장”이라고 말한 이유가 ‘X발, 내가 불사신인줄 아나? 나도 사람이라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이 내가 다음 달이면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 왜냐하면 난 코비니까’ 이런 생각?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A : ‘내가 이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이란 생각을 했어요. 아킬레스건 부상은 운동선수에게 죽음의 키스와도 같아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지 몰랐어요. 많은 요소들이 있거든요. 수술도 잘 되어야 하고, 그리고 건(腱) 부상은 내가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죠. 힘줄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나도 몰랐어요. 회복 과정도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또 긴 시간이 필요하죠. 내가 그 지랄을 해야 되나?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건지 몰랐어요.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죠.
Q : 하고 싶은 건지 몰랐다는 건가요? 아니면 부상에서 회복할 수 있을지 몰랐다는 건가요?
A : 둘 다요. 내가 이걸 하고 싶은 지 몰랐어요. 정말 긴 회복 과정을 거쳐야 하죠. 인터뷰 후 트레이너 방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있었는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절 쳐다보고… 전 아이들에게 ‘괜찮아, 아빠 괜찮을거야’라고 여러 번 말했죠. 부모는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해요. 부상도 또 다른 장애물이었죠. 이 장애물이 날 규정하지 못하고, 이 장애물이 날 불구로 만들지 못하고, 이 장애물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농구를 떠날 수 없었어요. 내가 물러날 때는 바로 내가 정하니까요. 그 때 결정을 내렸죠. ‘그거 알아? 한 번 해보자’라고요.
Q :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 너무 걱정하곤 하죠. 당신은 자아와 또 다른 자아인 ‘블랙 맘바’를 어떻게 공존시키죠?
A : 연습이나, 훈련, 시합 때는 제 정신을 다른 모드로 바꾸죠. 그러니까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흙을 짚어서 냄새를 맡는 거랑 비슷한 거죠. 정신을 전환하는 거에요. 배우가 촬영을 준비하는 것처럼 철장 안에 들어가는 거죠. 철장 안에서는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는거잖아요. 그 밖을 나오면 또 자신으로 돌아오고요. 하지만 내가 그 철장 안에 있을 때는 날 X발 만지지도 말고, 나한테 말 걸지도 말고, 날 혼자 냅두라는 거죠. 중요한 경기 때는… 이건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것 같네요. 제가 너무 미친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뭐 아무튼요. 중요한 경기 전에는 헤드폰을 끼고 영화 ‘할로윈’의 주제곡을 무한 반복으로 듣곤 했죠.
Q : 진짜로요?
A : 진짜에요.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캐릭터가 중요한 게 마스크 자체가 감정 결여를 보여주잖아요. 압박, 긴장, 동지애도 없는 냉혈 킬러. 그 주제곡을 반복해서 계속 들었어요.
Q : 마지막 경기에서 60점을 넣었죠. 은퇴 경기에서 60점을 올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말도 안되는 일이죠. 당신을 보자면 너무나 결연했고, 마치 “농구에 이제까지 내 모든 걸 바쳤으니, 마지막 1초까지 다 주겠어.”라는 듯 보였죠. 그런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응 그래, 난 괜찮아”라는 듯 본인의 이야기를 말하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다니죠. 어떻게 그렇게 농구와 단절하고 스토리텔링에 집중할 수 있었죠? 어떻게 적응했나요?
A :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다시 얘기하자면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거에요. 스토리텔링, 글쓰기, 이야기 구성법, 어떻게 이야기를 엮고 묘사하는 지, 어떻게 큰 메시지를 전하고, 어떻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만들지, 어떻게 내 여정에서 감정을 차용해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줄 지… 그래야 다음 세대가 내가 걸어야 했던 고난의 길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내가 열정을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을 사랑해요. ‘이젠 농구는 한쪽으로 치워 놓고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지’ 이런 문제가 아니였어요. 너무 흥분되서 빨리 하고 싶었죠. 한 번은 아내가 아이 학교 서류를 작성하다가 아버지 직업 란에 뭐라고 적어야 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글쎄, 그냥 이야기꾼(storyteller)이라고 적어.”라고 했죠. 그러자 아내가 “아이 서류에 이야기꾼이라고 적으라고?”라고 해서 “뭐 그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이잖아.”라고 했어요. 은퇴 후 모두 저에게 은퇴하면 슬픔의 단계가 있다느니, 우울감을 겪는 게 당연하다느니 떠들어댔죠. 제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요. 그래서 그냥 듣는 척만 했죠. 그렇지만 제 안에 있는 승부욕은 “아니, 난 앞으로 펼쳐질 20년 동안 내가 지난 20년간 해온 것 보다 너 나은 일을 할거야.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난 그렇게 할거라고.”라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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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건 부상이 없었다면 진지하게 카림의 최다득점 기록 깨기 위한 목표를 잡았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번역감사드리며 앞으로 코작가의 미래를 계속응원합니다^^
은퇴하고 난 뒤
오히려 팬이 늘은듯 하네요~
훌륭 합니다!!
너무 멋있는 형
진심 리스펙
날강두가 꼭 봐야 할 인터뷰!
너가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힘들게 일해서 산 티켓인데...
왼손, 풀업점프샷, 포스트게임이
본인의 약점이고..
그걸 극복하려고 경기중에 연습을 하다니..
정말 떡잎부터 다르네요ㅎㄷㄷ
추천을 누르지 않을수 없는... 고퀄리티 인터뷰 재밌게 잘봤습니다
날강두 미친놈아!!!
코비 존경합니다
내 집컴 회사컴 폰 배경화면 모두 아직 형이야.
와 멘탈...
저런 아들이 있었더라면 첫째가 아들이었고 저 성미를 닮았으면 르브론 주니어랑 함께 리얼로 볼만했겠네요
존경 아니 경외...
와.. 이 인터뷰는 레전드네요 ㄷㄷㄷ
역시 코비!!!
역시 코비다운 인터뷰네요ㅎㅎ 코비같은 선수 어디 없으려나요
멋진 인터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