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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익은 과일이 저절로 나무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린 사람.
권력도 때를 기다려 쟁취해야
가장 쉽고 안전하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탄탄한 실력을 갖추며
천하제패의 기회가 오기를 꾸준히 노린 무서운 집념의 사람.
상대방에게 헛점이 생길 때를 기다리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 사람.
한 번 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은 사람.
천하를 제패할 정도의 수완과 병력과 재력을 꾸준히 준비해 온 사람.
도쿠가와 이에야스!
(김두관이 5년 동안 이만큼 치밀하게 준비를 잘 해 나갈까요?^^
김두관은 넉넉한 외모와 조용한 말투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도전이나 조광조, 오다 같은 풍운아적 기질이 다분하다는 느낌입니다.
백성을 위해 옳은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관철해 내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이건 떨어질 줄 알면서도 경남에서 계속 출마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닌가요? 아니면 반론 부탁드립니다.^^)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 내 제 2인자였던 도쿠가와는 마음만 먹으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좋은 기회를 엿보며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까지 꾸준히 기다립니다.
정말 무서운 집념입니다.
성질 급한 사람 같으면 권력을 찬탈할만한 힘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들면
권력의 달콤한 단 맛을 보기 위해 도요토미가 죽자마자
곧바로 권력쟁탈의 현장으로 자기 자신을 내몰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요토미가 죽자마자 권력을 잡기위해 변란을 일으키면
비록 도요토미가 죽었다 하더라도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대판 큰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권력을 쟁취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고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그렇게 해서 쟁취한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 뻔했으며
만에 하나 실패를 하게 되면 자기 목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정은 이시다 미스나리가 주동이 된 문신파와
가토 기요마사(조선 침략 제2군 대장)의 무신파가 패권을 놓고 갈등을 벌입니다.
도쿠가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지키면서
도요토미 가문과 혼인을 맺어 문신파와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보호자 역할을 자청하기도 하며 기회를 엿봅니다.
문신파와 무신파의 권력 다툼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자
무신파는 무력으로 문신파를 축출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권력은 칼끝과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입니다.
'어마 뜨거라' 놀란 문신파 거두 이시다는 도요토미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도쿠가와를 찾아가 무신파 거두 가토를 응징해 달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상식적으로나 인륜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도요토미 가문과 사돈을 맺은 도쿠가와는 당연히 문신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가토 측을 견제 또는 제거하는 역할을 자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문신파 편을 들지 않고
'어린 히데요리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탐해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며
오히려 그들을 질책합니다.
칼의 무서움을 아는 자가 붓을 든 자들의 편을 들리 없었습니다.
펜이 총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그건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내놓고 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이를 뿌득뿌득 갈며 지방으로 쫒겨난 이시다는
'정권을 뒤엎으려는 도쿠가와의 본색이 들어났다'고 선동을 하며
친 도요토미 가문의 다이묘들을 집결시킵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음을 안 도쿠가와는 휘하 세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합니다.
권력을 찬탈하는 데는 천하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이는 민심을 얻지 못하고서는 패권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요토미 가문에 칼을 겨누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분란시키고 혼란에 빠트리는 역적 이시다와 그 무리를 토벌하는 것이다."
(말이 됩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지요?)
1600년 천하쟁패를 놓고 일본에서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펼쳐집니다. 동군은 도쿠가와와 가토 기요마사였고
서군은 이시다와 고시시 유키나카(조선 침략 제 1선봉장)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를 거둬 도쿠가와 세력들이 권력을 독차지합니다.
패한 서군의 이시다과 고니시는 당연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1군과 2군으로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고니시와 가토는 평생 경쟁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줄을 잘섰던 가토는 편안한 여생을 마친 반면,
줄을 잘못섰던 고니시는 자기 목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실리를 얻은 도쿠가와는 히데요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도요토미 지지세력을 말끔히 청소한 다음, 교토를 떠나 도요토미에게
굴욕을 당해 쫒겨났던 자기 세력권 하의 수도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합니다.
명예욕 강한 사람 같으면 이 기회에 힘이 없는 어린 히데요리 제거하고
천하에 힘을 과시를 하고 싶을 법도 한데 도쿠가와는 히데요리를 죽이지 않습니다.
아직 도요토미 가문의 힘이 전국에 걸쳐 남아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실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일격을 가할 기회가 오기를
14년 동안 또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오다나 도요토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명분을 강화하고
자기 사후의 후계 문제까지를 철저히 염두에 둔 포석입니다.
(저도 기다리다가 지쳐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권력주변에서 쫒겨나 오사카성 주변의
봉토를 하사받아 그곳을 다스리던 히데요리가 무럭무럭 성장을 해 나가자
도쿠가와는 보복을 당할 위험을 제거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도요토미 가문의 씨를 말릴 음모를 드디어 꾸미기 시작합니다.
씨를 말리기 위해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처럼 명분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도쿠가와가 먼저 히데요리를 친 것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반역을 시도해 어쩔 수 없이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대외에 천명하는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천하를 얻기 위한 명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명분을 얻지 못하면 대권을 쟁취할 수 없습니다.
퀴즈 : 이번에 김두관이 도지사를 그만 두고 출마를 한 명분은 무엇입니까?
또한 그 명분을 선포한 시기는 적절했습니까?)
히데요리를 힘 안들이고 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히데요리의 재산을 탕진시키는 것이 필수 조건입니다.
재력이 많으면 그만큼 동조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고
지구전에서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단기전이 아닌 지구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재정이 상대방 국가의 재정보다 더 튼튼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도쿠가와는
히데요리에게 호고지를 재건하도록 허락을 해 줍니다.
호고지는 히데요시가 천하통일 후 건설한
도요토미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절인데 지진으로 무너졌습니다.
아버지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했던 히데요리(누구랑 상황이 같죠?)는
도쿠가와가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그동안 호고지를 재건할 생각은 염두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쿠가와가 먼저 호고지를 재건하라고 하자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화해의 표시로 받아 들이고 호고지 재건에 들어갑니다.
드디어 여우의 아가리에 토끼 머리가 들어간 순간입니다.
만약에 히데요리가 도쿠가와의 의도를 간파하고 호고지를 재건하지 않았더라면
도쿠가와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대선에 김두관의 출마를 부추킨 자들의 흉계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절 재건에 착수한 히데요리는 절에 안치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그 종에 국가안위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
(국가는 평안하고 군신은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한다.)
깨알 같은 수많은 글자 중에서 이 열두 글자를 도쿠가와가 문제 삼았습니다.
국가안강의 家와 康은 이에야스를 뜻하며 글자 사이에 家와 康을 넣은 것은
도쿠가와 가문을 반으로 쪼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군신풍락의 臣豊은 도요토미이므로 이는 토요토미 후손들이 번창을 해
도쿠가와 가문을 무너트려 천하를 다시 잡겠다는 흉계를 감춰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정권탈취 과정에서 흔하게 써먹던 방법이죠?
지금 새누당이 NLL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똑같은 수법입니다.)
히데요리를 역적으로 모는데 성공한 도쿠가와는 병력을 동원,
오사카성을 향해 공격에 들어갑니다. 히데요리는 그를 지지하는 다이묘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낭인 무리들을 모아 수성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반란을 막고자 철저하게 계산해서 축성한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의 바램대로 1년이 다 되도록
끄떡없이 잘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도쿠가와는 또 잔꾀를 씁니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 내 체면도 있으니 나에게 물러날 명분을 달라.
화해의 표시로 오사카성 두겹의 해자(적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판 인공호수) 중
바깥 쪽 해자를 메워라. 그럼 순순히 물러나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여러분 같으면 자기 목숨을 담보해 주는 해자를 메우겠습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반대했던 히데요리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구카와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호고지 절 재건에 이은 또 한 번의 판단 실수로
자기 가문의 멸문지화를 재촉하는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한 번 속았으면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도쿠가와의 능력 또한 대단합니다.
속였는지 속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사에 있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약속을 어긴 도쿠가와는 히데요리가 해자를 메꾸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안 밖 해자를 모두 메워 성을 공격해 성곽 일부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이후 히데요리 측이 다시 해자를 파내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전투를 벌인 끝에
히데요리 측을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결국 히데요리는 자결로서 22세의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적을 평정한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연히 논공행상이 실시됩니다.
그 다음에는 절대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행정조치가 뒤따릅니다.
1차 권력기반 강화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바로 실행되었고
2차 권력기반 강화는 히데요리를 제압한 후에 실행합니다.
논공행상을 하기 위해서는 하사해 줄 봉토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반대세력의 다이묘를 죽이거나 자리를 박탈해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후환을 없앴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심복들을 공로에 따라
전국의 새로운 다이묘로 임명, 토지 재분배를 실시합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진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지요?)
이때 주군을 모시던 수많은 무사들이 직업을 잃고 낭인으로 전락해
전 일본 지역을 배회하게 됩니다.
첫번째 논공행상은 충성도에 따라 세등급으로 실시했습니다.
1.신반 다이묘 : 도쿠가와 일족 및 심복
(수도인 에도 주변의 봉토를 받음)
2.후다이 다이묘 : 세키가하라 전투시 충성을 맹세한 다이묘
(그 다음 중간 영역의 봉토를 받음)
3.도자마 다이묘 : 도요토미를 따르던 다이묘들로 세키가하라 전투후에 흡수된 무리
(변방 영역의 봉토를 받음)
이를 현재 권력창출 공신으로 대입을 해 보면
1.정권 창출에 공이 큰 최측근 그룹(최고위직에 임명)
2.같은 정당에 소속돼 활약한 사람들(공기업 등 고위직 임명)
3.정권 창출 후에 합류한 사람들(실권은 없으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자리 임명)
(권력의 속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전리품을 나눠 갔는다고 비난도 하지만 뜻이 맞는 사람들이 백성을 위한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친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처럼 권력을 사유화하면 심각한 폐단이 노출됩니다.)
혹시 모를 반란 진압에 대비, 일본 변방으로 축출된 도자마 다이묘들은
수도와의 거리상, 간섭과 감시를 덜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은 일본 남부 변방인 조슈, 사스마 지역 출신들로
도쿠가와 일가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이 강했으며 250여년이 흐른 뒤,
맨 처음으로 바쿠후 정권을 무너트리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도쿠가와가 몰아낸 자들이 도쿠가와 정권을 무너트렸으니
역사란 돌고 도는 쳇바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행정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요토미가 실시한 정책을 강화시켜 이어 받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1. 경제통화 기준 쌀로 통일
2. 병농분리 정책
3. 쇄국정책
- 부와 권력의 기반인 토지관리 강화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하고 국가 수입을 빼돌릴 수 없도록 엄중관리를 했습니다.
재정이 튼튼한 국가는 흥하고,
재정이 튼튼하지 못한 국가는 망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실행한 정책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나라빚 445조 9천억원
2008년 309조원 -> 지난 5년간 44%인 137조원 가량 증가 예상
다음 대통령은 이명박 뒤치닥거리 하다가 끝장날 공산이 큽니다.)
- 사(부시)농공상 계급 철저히 강화
정치, 군사적 역할을 하던 무사들이 관료, 문신으로 변해갑니다.
유럽 봉건체제처럼 부르조아 계급인 부시계급은 성안에서 살게 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농민은 성밖에서 살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무장봉기를 막기 위해 부시와 농민이 섞여 사는 것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상공업 종사자인 조닌은 부시계급의 생활편의를 위해 성안에 살게했습니다.
- 다이묘들의 권한 축소
각 지방 다이묘들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한 조치이며
이들이 힘을 길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한'(우리나라 군단위)이란 행정단위를 설치해
중앙에서 관료를 파견, 다이묘들을 견제하고 반란에 대비했습니다.
또한 중앙정부의 허락없이 다이묘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켰으며
그들의 가족은 애도에 살게 해 볼모로 잡아뒀습니다.
다이묘들을 1년은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강제로 살게한 조치인데
이들이 이동할 때마다 그에 수반되는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일본의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기초가 됩니다.
- 조선과 국교 재개
왜란 종료 9년 후에 조선인 포로를 일부 송환하고 국교를 재개시켰습니다.
일본은 쇼군 교체시, 조선의 사절을 초청해 지배층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과시했고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하므로서 그들의 호전성을 무마하는 역할로 삼았습니다.
전 일본이 축제분위였던 조선통신사 파견은 모든 비용을
일본측이 부담했으며, 한 번 파견될 때 마다 500여명의 인원이 파견돼
나중에는 일본 측에서 재정파탄을 우려할 만큼 성대한 행렬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의 도공 등 하층 기술자 신분들은
대부분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그들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자들은 우대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자유가 보장되고 생활이 윤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에서 종으로 살던 사람들도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므로 귀국을 거부했는데 조선의 유교적
신분제가 일본보다 더 강압적인 제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등진 사람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쇼군이 된지 2년 후,
도쿠가와는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오고쇼(상왕)가 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습니다.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분연히 일어났으나
천하를 손아귀에 쥐기 직전, 부하의 배신으로 생을 마감한 오다 노부나가.
천하를 제패하는 창업에는 성공했지만, 동북아를 전쟁의 수렁에 몰아 넣고
2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수성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천하를 제패하는 창업에도 성공하고, 권력세습이 265년 간이나 유지되도록
그 뿌리를 튼튼히 다져놓아 수성에도 성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 당시와 현대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과연 김두관이 앞으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 대권을 쟁취,
대한민국 미래를 밝혀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낸다면
손가락 아프게 자판을 두들긴 보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내용이 얄팍한 길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당시 전국시대의 말기에는 워낙 일본전국의 정세가 불안정하고, 내부의 극도로 팽창된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한론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 같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긴 하지만요. 여튼 히데요시가 실패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외부로의 팽창으로 내부의 팽창을 제어할 수 있었으므로 이에야스는 궁극적으로 전국통일을 이루고, 진정한 전국제패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꼭데기까지선생님의 처세술강의 계속 되는건가요?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송윤찬님, 정확한 분석입니다. 큰 그림을 그릴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역할 기대하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그나마 편안하게 살았던 시절은 중국과 일본이 분열되었을 때였죠. 그들이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고 내부의 힘을 주체하지 못했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당했으니까요. 그래서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된다고 하나 봅니다. 글쎄요... 김두관과 연결되는 내용들이 떠오르면 해보겠습니다.^^
꼭데기님,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