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륙 112개국 '두바퀴 인생' 문종성
낯선 길에서 길을 찾다
사회서 방황하는 선배들 보며
내 10년후 모습에 덜컥 겁나
의미있는 삶이 뭔가…
떠났다, 다리와 심장을 믿고
아프리카에 모기장 4500개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봉사하는 여행자 되고 싶어…
기적이 뭔지 배웠어요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임을
"강도·말라리아·반군보다 강했던 건, 현지인들의 아낌없는 情"
왜 자전거였나
교통수단 중 가장 느리지만
현지인들의 마음속으로
가장 빨리 들어가는 수단…
고장 나도 직접 고칠 수 있죠
여행경비? 어떻게든 되더라
돈 없으면 알바하려 했는데
가는 곳마다 강연 요청·초대
"네 도전에 동참해 기쁘다"며
재워주고 먹여주고 용돈까지
여행, 계획대로 안되더라
전쟁도 나고, 강도도 만나고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수많은 변수들이 곳곳에…
작은 길 다니며 인연 맺었다
-
- 지난 16일 자전거를 끌고 서울 도심을 걷고 있는 문종성씨. /이명원 기자
"모기장 치러 가야 하는데…."
2010년 5월 아프리카 말라위의 남부 산골 마을 '은코마'.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던 청년 문종성(33)은 아침에 눈을 떴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열로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오한이 나 으슬으슬 떨렸다. 구토와 설사도 났다. 다행히 근처에 병원이 있었다. 의사는 말라리아라고 했다.
병원엔 꼬마 환자들이 가득했다. 말라리아, 시력 상실, 소아마비…. 의사는 "초기 치료만 잘 받았어도, 병원비 5달러만 있었어도, 장애인은 되지 않았을 환자들이 태반"이라고 했다. 말라리아에 걸린 아이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는 그런 지역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직전인 2006년 11월 자전거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북미 대륙을 횡단했고, 중·남미는 종단했다. 여기까진 그저 개인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북·남미를 거쳐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 아프리카 작은 동네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모기장을 설치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프리카에 가장 필요한 건 5가지, 즉 의료와 교육, 먹을 것, 전기, 우물이다. 그런데 내가 하는 덴 한계가 있었다. 발전기를 설치해줄까 싶어 덴마크에 가격을 알아보니 1억원이 든다고 했다. 우물 하나 파는 데 1만달러가 필요했고 성공 확률이 50%밖에 안 됐다. 자전거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문득 모기장이 떠올랐다. 모기장은 하나에 10달러 정도면 살 수 있다."
문종성은 아프리카에서 모두 25개 나라를 여행했다. 그중 잠비아·말라위·모잠비크·탄자니아·에티오피아 등 10개국을 돌아다니며 모기장을 설치했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건, 모기장 설치를 시작한 이후에 간 두 번째 나라에서였다. 실제로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해본 후 그에게 모기장을 쳐주는 건 더욱 절실한 소명이 됐다. 아프리카에서 모기장 설치는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탄자니아에선 킬리만자로 아래 자락에 있는 에이즈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갔고, 우간다에선 정부와 반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난민촌을 찾아갔다. 난민촌 사람들은 "외부 사람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모기장을 쳐주러 왔다고 하자 마을 청년 10여명이 뛰어나와 일을 거들었다. 모기장 200개 치는 데 보통 2~3일 걸리는데, 이날은 반나절 만에 작업이 끝났다.
-
-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다닌 문종성씨는 지난 2010년 여름 아프리카 모잠비크 북부 니아사 국립공원 인근 산악 지역을 지나다 길을 잃었다. 사진은 문씨가 현지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폭이 약 30m 정도인 물웅덩이를 건너는 모습이다. 문씨는 7년 2개월 동안 전 세계 112개국을 여행했고,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25개국을 돌아다녔다. 이 중 10개국에선 말라리아 예방을 위한 모기장 4500개를 설치했다. /문종성씨 제공
◇아프리카, 삶의 방향을 얻다
지난 1월 문종성은 7년 2개월에 걸친 여행을 끝냈다. 그는 자전거와 함께 오세아니아를 제외한 5대륙 112개국을 누볐다. 20대 중반에 떠났던 여행을 마무리한 후 그는 "세상을 살아갈 정신적 나침반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베풂과 사랑, 기쁨, 행복이 책에나 있는 '추상 명사'인 줄 알았는데 바깥세상에 나가 보니 그건 당장 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현실 명사'였다"고 했다.
문종성은 전남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평범한 학생이었다. 전남대 국어국문과를 다니다 군 복무를 마쳤을 때 갑자기 고민이 시작됐다. 신입생 때 존경했던 선배들은 사회에 나가더니 힘들어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건 아닌데…"라며 무너지기도 했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되는가. 겁이 덜컥 났다. 낯선 세상, 외국으로 나가 보면 뭔가 달라질까. 그의 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북미와 중·남미 때와 달리 아프리카에서 모기장 설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가을 아르헨티나에서 강도를 만났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든 강도 3명에게 자전거와 짐을 다 빼앗겼다. 근처 PC방 주인에게 사정해 인터넷에 이 막막한 상황에 대해 썼다. 아는 분들이 이메일을 보내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받은 이메일이 모두 18통이었다."
―여행하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다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지 않나.
"정말 그랬다. 여행 중에 강도를 5번 당했는데 모든 걸 빼앗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3년 가까이 타고 다닌 자전거도 빼앗겼다. '로페카(히브리어로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꼈던 자전거를 잃으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야 한다며 용기를 주더라."
―타인의 응원에 힘을 얻어 여행을 중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미국 버펄로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분은 '이 세계 일주는 종성씨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의 도전이다.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 강도 만나 돌아왔다고 할 텐가. 아니면 끝까지 도전했다고 말할 텐가'라고 했다. 후원도 답지했다. 컴퓨터를 지원해주겠다는 분, 다음에 가야 할 대륙인 아프리카행 항공권을 지원해 주겠다는 분, 돈을 보내준 분들이 있었다. 한인 교회 등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4개월을 지내는 동안 모든 장비가 다시 갖춰졌다. 충격을 받았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이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까. 그때 이 여행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는 단순 여행자가 아니라 봉사 여행자가 됐다.
"새로 얻게 된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가면 내가 남미에서 받은 감동과 행복을 나눠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한 개 10달러짜리 모기장이라지만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여행 경비를 아껴서 할 생각이었다. 국내 잡지에 여행기를 쓰고, 책도 냈고, 현지에서 강연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때만 해도 모기장 300개를 설치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40여명(단체 포함)이 모두 2800만원을 보내줬다. 그 덕에 더 많은 모기장을 살 수 있었고 아프리카 30개 마을에 4500개를 설치해줬다."
―남을 돕는 일에도 원칙이 있어야 할 텐데.
"중요한 건 마을에 위화감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생길 수 있어 위험하다. 문제가 생기면 약자가 피해를 당한다. 그래서 일단 어떤 마을을 도울지 결정하면 모든 집에 모기장을 쳐줬다. 모기장을 주면 이불이나 그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냥 주지 않고 직접 포장을 벗기고 모기장을 쳤다."
-
- 문종성씨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아이들의 모습. ①서아프리카 국가인 부르키나파소에서 만난 과일 노점상 소녀 ②2013년 새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산악지대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한 광장에서 만난 4세 소녀 ③통에 물을 채워놓고 장난을 치는 니카라과 소년들 ④에티오피아 시골마을에서 만난 14세 소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시장에서 품을 팔아 하루에 1~2달러를 번다고 했다. /문종성씨 제공
◇처음엔 5년 6개월 동안 여행할 계획
처음 계획은 5년 6개월 동안 85개국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여행가 이시다 유스케가 쓴 '가보기 전엔 죽지 마라'는 책이 도움이 됐다. 명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이시다가 출세나 성공이 아닌 여행의 길에 들어서 7년 반 동안 87개국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읽고, 그는 "아쉬웠고, 화가 났고, 질투 났고, 감동했고, 고마웠다"고 했다. 그는 "이시다는 '무조건 떠난다'는 결심을 굳히도록 마지막 어퍼컷을 날려준 셈"이었다고 했다.
―왜 여행 기간을 5년 6개월로 잡았나.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을 하기에 너무 늦지 않길 바라서였다. 32세 이전엔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시다 책과 해외 자전거 여행 사이트 등을 뒤져 자료를 찾았다. 5년 반이면 85개국을 충분히 뚫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종교도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에서 수입의 10분의 1을 헌금하는 '십일조'가 있듯이 내 남은 인생의 10분의 1을 의미 있는 일에 바치겠다고 생각했다."
―예정보다 여행 기간이 많이 길어졌다.
"여행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미국 뉴욕에서 LA까지 3개월 횡단 계획을 잡았는데 실제론 6개월이 걸렸다. 아프리카에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케냐까지 6개월간 여행하려 했는데 결국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까지 가게 돼 1년 반을 여행했다. 나중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가 2006년 11월 한국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미국 알래스카 최북단, 북극해와 맞닿은 작은 마을이었다. 3일째 되던 날 마을 앞바다가 혹한(酷寒)을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어떤 악천후도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듬해 봄에 미국 뉴욕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먹고 자는 일이 간단치 않았을 텐데.
"텐트와 침낭을 갖고 다녔기 때문에 어디서든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여행의 절반 이상은 실내에서 잤다. 현지 사람들이 집으로 초대해줬고, 종교시설과 경찰서 등에서도 잠자리를 제공해줬다. 여행 첫날부터 그랬다. 뉴욕에서 60㎞ 떨어진 마을 공원에서 텐트를 치려는데 두 살배기 딸과 산책 나온 30대 마크·질 부부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한다니 '놀랍고 대단하다'며 저녁도 해주고 방도 내줬다. 이게 말이 되나. 처음 보는 외국인을 집에 들이다니. 그런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런 일이 계속됐다. 미국에서만 100번 넘게 초대를 받았다. 자전거 여행의 매력은 오늘 누굴 만날지, 어디서 자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전 세계가 다 똑같았다. 중·남미에선 경찰서와 소방서를 찾아가면 됐다. 중·남미 여행 2년 반 동안 거절당한 건 딱 두 번이다. 크리스마스 직전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였다. 태국에 갔을 땐 절에서, 중동에선 이슬람 사원이 환한 미소로 반겨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돼 있었다는 듯 맞아줬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나.
"가장 위험했던 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가나로 버스를 타고 갈 때였다. 여행 다닐 땐 늘 자전거를 탔지만 분쟁 지역에서만큼은 예외였다. 그날 무장 세력이 버스에 총을 5발 쐈는데 4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발은 내 머리를 스쳐 옆에 있던 사람 팔에 맞았다. 정부군이 출동해 간신히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페루에서 만난 호세라는 친구였다. 네 번째 강도를 당한 뒤라 경계심이 극도에 달했을 때였다. 산에서 보면 산적, 바다에서 보면 해적 같은 얼굴에 탄탄한 근육질, 스포츠 머리였고, 몸엔 문신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나흘이나 그의 집에 머물렀다. 떠나는 날엔 광장에 데려가더니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 놓고 '우리 친구가 떠난다. 페루의 우정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그때 사람들이 모아준 동전과 지폐가 80달러나 되더라. 그는 나와 80㎞ 사막길을 동행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을 텐데.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한 자락에서 호세와 같은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유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베풀면서 행복해하고, 지위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받아들였던 그런 시절 말이다."
-
- 페루 북부의 한 사막 지역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문종성씨. /문종성씨 제공
◇청춘, 자전거 여행에 길을 묻다
대학 졸업 무렵 친구들은 좋은 직장 구하려고 학점 따고 스펙 만드는 데 목을 맸다. 그는 좀 달랐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의미 있는 삶을 찾을까 생각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 탓에 그의 학점은 곤두박질쳤다. 군 전역 후 철이 들어 공부에만 전념해도 시원찮을 복학생은 자꾸 '딴생각'만 했다.
―그런 고민에서 어떻게 탈출했나.
"캐나다 출신의 외과의사 노먼 베순 일대기를 읽었다. 그는 캐나다 의료계를 이끌 인재로 주목받았고 명예와 안정된 삶을 보장받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중·일전쟁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전쟁터에선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구해냈다. 결국 손가락에 난 상처 때문에 패혈증으로 죽었다. 베순의 인생을 통해 실마리를 찾게 됐다. 성공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대학 나와 좋은 직장 갖는 그런 삶이 아니라, 뭔가 가치 있는 내 길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책들을 읽고 무엇을 배웠나.
"그들이 이룬 엄청난 성공이나 업적보다는 어린 시절에 눈이 가더라. 어린 시절 얘기를 보면 내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 그들의 어린 시절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느끼며 큰 위로를 받았다.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나 조건에서 성장한 경우도 많았다. 그들이 주는 메시지는 '난 이런 대단한 사람이다'가 아니라, '내 시작도 이렇게 평범했고, 미약했다'는 것이었다."
―여행 결심도 책에서 비롯됐나.
"탐험가 얘기는 심장을 뛰게 했다. 모험이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미국·영국·프랑스 심지어 일본 사람도 있는데 한국 사람이 없었다. 우리나라엔 왜 미지의 세계나 오지를 탐험한 사람이 거의 없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쾅 때렸다. 모험 분야에서 내가 최초가 되면 어떨까. 바깥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꿈과 삶을 직접 보고, 그것을 한국인들과 나누고, 인생의 화두를 던지는 그런 일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한 이유는.
"친구가 '자전거는 인간이 가진 교통수단 중 가장 속도가 느리지만 사람들 마음속으로 가장 빨리 들어가는 수단'이라고 했다. 여행하면서 사람을 만나 부대끼려면 자전거가 최고다. 내 여행의 테마는 '광야'였다. 현지인과 똑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여행 기간 내내 하루 3~5달러로 살았다. 단 한 번도 10달러 이상의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다. 남미에선 하루 두 끼, 아프리카에선 주로 하루 한 끼만 먹었다. 자전거가 가장 저렴하다는 점도 생각했다. 자동차·오토바이는 국경 넘을 때 세금을 내야 한다. 자동차는 고장 나면 부품 구하고 고치는 데 2주나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는 내가 직접 수리할 수 있다. 내 심장과 다리만으로 무동력인 자전거를 움직여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7년 2개월간 그와 동행했던 자전거는 5대였다. 한 대는 아르헨티나 강도에게 빼앗겼고, 한 대는 포르투갈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부서졌다. 두 대는 케냐와 이란에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줬다.
―일정은 어떤 기준으로 짰나.
"그런 건 없었다. 어떤 길을 갈지는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정했다. 가다 보면 지도에 없는 변수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전쟁도 나고, 강도도 나온다. 그러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유명한 관광지나 대도시를 피해, 주로 시골과 작은 길을 택했다."
―여행 경비가 꽤 많이 들었을 텐데.
"떠날 때 통장에 300만원이 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번 돈이다. 부모님이 항공권과 일부 여비를 도와주셨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걸로 7년여를 버틸 수는 없었을 텐데.
"돈 떨어지면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려고 했다. 그런데 이 또한 계획일 뿐이더라. 미국과 중남미에서 교회, 마을 주민 모임에서 강의를 많이 했다. 강의가 끝나면 용돈을 주시더라. 또 국내 잡지에 여행기를 써서 원고료를 받은 것이 큰 힘이 됐다. 많을 땐 한 달에 5편씩 썼다. 책도 4권 썼다."
―외국에 가면 자전거 여행자를 경계하진 않던가.
"미국에선 항상 누군가 먼저 다가와 '어디 가니, 대단한데'라며 말을 걸어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러곤 '내가 도와줄 일 없니'라고 묻는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용돈도 준다. 다들 '당신이 도전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더라. 때론 감동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이런 일이 여행 내내 계속됐다."
◇성공이 아닌 '나눔 지향'의 삶
―20대와 30대의 중요한 시기에 7년을 여행했다. 불안하진 않던가.
"그런 질문 많이 받았다. '정말 이래도 되나'하는 불안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한결같이 '놀랍다. 대단하다. 풍성한 인생이 될 거야'라고 말해줬다."
―정말 그렇던가.
"삶의 의미나 목표를 찾았다는 건 맞지 않는 얘기이고, 이미 알고 있던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감사를 봤다. 나의 행복은 남들과 함께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내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을 필요가 없다."
―여행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을 받았을 땐 어떻던가.
"기적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내게 기적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나눠줄 수 있을 때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받을 땐 기적이 완료되지만 줄 때는 기적이 시작된다."
―여행 이후 계획은?
"멘토나 힐링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 대화가 단절된 청소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내년쯤 작은 사무실을 마련해 문을 열어놓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첫댓글 자전거 세계일주 대단하죠 ㅎ
나도한번해볼까 ㅋㅋㅋ
응원할께요 꼭 해보세요
@하늘 가능할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