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순례자-
“착한 목자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입당송:시편33,5-6참조)
오늘은 제61차 성소주일이자 일명 착한목자주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불림 받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절호의 날이기도 합니다. 새삼 성소주일에 확인하는 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우리 삶의 모두인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얼마나 멋진 하느님 아버지의 정의인지요! 순간 제 좋아하는 열정넘치는 농부 자매 레지나가 생각납니다. 착한목자이자 농부이신 아버지를 닮아 평생 민초(民草)들의 목자로 말씀의 농부로 일관하신 예수님이요 저도 묵묵히 “말씀의 농부”가 되어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하게 강론을 씁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라는 옛 어느 대선후보자의 말처럼 예수님도 그러했을 것이며 저 또한 초지일관 그런 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수제자이자 제1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확신에 넘친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1-12)
바로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께 불림받은 우리 믿는 이들이요,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에 저는 서슴없이,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히 나의 사랑이자 운명이다!” 고백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으로 착한목자 주님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초연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가난은 쪼들리는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남들과 비교하는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된 상태다.”-다산
“도에 뜻을 두면서도 누추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와는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논어
이렇듯 도(道)자체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듯 가난을 사랑하는 참 선비같은 참 성소자들인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 성소자들의 빛나는 모범이 현재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말그대로 교황 재위 11년 동안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일관된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금과옥조의 말씀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사가들에게 교황님은 인류(humanity)의 종들이자 전문가들이 될 것을 요청하다.”
어제 교황님을 찾은 역사가들에게 주신 요지의 말씀입니다.
“평화의 장인(artisans of peace)이 되십시오.”
엊그제 교황님을 방문한 이태리 5천명의 소년소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목자들이 되십시오.”
어제 교황님을 찾은 미래의 사제들인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황 비오 7세(1742-1823)는 참으로 힘든 시대 소통의 달인이셨다”
역시 어제 비오 7세에 관한 요지의 귀한 말씀을 나눠 주셨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위 원고들 출력하여 읽어보려 합니다. 하루하루 교황직의 성소에 한결같이 충실하신 88세 고령의 교황님지만 정신은 하느님을,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젊음은, 영적건강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찾는 열정에, 사랑에 있습니다. 교황님의 제41차 성소주일 담화문도 공감, 감동 만점입니다.
-“성소주일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아버지께 거룩한 성소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날입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의 기도하면 희망이 자라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가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편에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 희망에 이르는 문은 나의 기도로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순례는 목적없는 여행이나 정처없는 방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날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곧 평화와 정의와 사랑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며 이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모든 성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은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에 힘입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궁극적 소명을 날마다 미리 맛봐야 합니다. 바로 지금도 우리는 일치, 평화, 형제애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도 이 부르심에 배제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가 저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찾고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무관심을 뒤로하고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놓곤 하는 감옥의 문을 열어젓힙시다.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닙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기쁨의 전령이자 새 생명의 원천, 형제애와 평화의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일어나 희망의 순례자로서 길을 나섭시다.”-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 다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옥같은 성소주일 강론의 핵심부를 인용했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 각자 불러 주신 삶의 자리에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소의 여정의 중심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착한목자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나는 착한목자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짧은 말마디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전율케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착한목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 닮아가는 성소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희망과 평화의 성소 여정은 바로 자발적 사랑의, 끊임없는 비움과 겸손의 순례여정이자 순교여정임을, 날로 착한목자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온 인류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부단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함을, 또 세상을 향해 활짝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함을 배웁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눈에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말씀이 우리를 격려하며 성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1요한3,1-2참조)
바로 언젠가 뵈올 하느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마침내 그분을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이 끝날 때 주님과의 반가운 만남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자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감사하며 희망의 순례자로 평화의 건설자로 살아갑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