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笑外凋落-세상이 모두 바깥 모양이 시드는 것을 不憐內文彩-비웃기는 하지만 皮膚脫落盡-피부는 이미 떨어져 버렸으니 惟有眞實在-오로지 진실만이 그곳에 있더라 함석헌(咸錫憲)
평생을 하루 한 끼로 산, 말과 글 행동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 !!!
필자는 함석헌(咸錫憲) 선생 시대를 산 사람이다. 선생에 대한 “여러 말과 글”에 대한 자료가 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믿어지는 인물이 여럿 있다. 민주공화국을 세웠거나, 경제를 크게 일으킨 대통령은 아무리 독재니 무엇이니 하여도 한국 현대사에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업을 통해 국민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 인물들도 국민은 기억한다.
우리 근현대사에 함석헌(咸錫憲) 이라는 거인(巨人)이 계셨다. 선생은 일찍이 “사상계(思想界)”잡지에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우리 시대에 철학(哲學)을 전공해 유럽과 미국등 손꼽을 만큼 이름나고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고 돌아온 철학자(哲學者)는 많지만 한국 국민의 생각에 함석헌(咸錫憲) 선생만큼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思想家)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없을 것이다.
함석헌(咸錫憲) 선생은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평양고보와 오산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이상 학벌(學閥)은 없지만 함석헌 선생만큼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함석헌 선생처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은 “말과 글”이라는 예리한 양면의 칼(兩面刀)을 종횡무진(縱橫無盡) 휘둘렀다. 민중(民衆)이라고 여겨지는 “씨알”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씨알-종자나 열매, 곡식 따위의 하나하나의 크기.
경무대(景武臺옛 청와대)나 청와대(靑瓦臺)대를 치고 들어가 권력으로 갑옷 입은 권력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무서운 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일 무서워 한 사람이 “함석헌”이라 했다.
선생의 저항정신(抵抗精神)은 일제시대(日帝時代)를 사는 동안 한결같았다. 해방 후 북한에 살았던 2년 동안도 그러했다. 월남(越南)한 1947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김일성 공산정권 독재 집권(執權)에 반대하고 일어난 이른바 “신의주 학생 사건”의 배후에 함석헌 선생이 있었다고 공산당은 믿었다.
월남(越南)한 뒤 박정희나 전두환에게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북한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선생은 한 번도 일제(日帝)에 저항한 사실을 자랑한 적이 없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뒤에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수여했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가족 묘지에서 대전에 있는 현충원으로 유해를 옮겨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선생은 평범한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한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도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은 기성 교회 기독교신자들과 신앙의 입장이 매우 달랐다.
선생은 일본 동경 유학 시절에 일본 제일의 기독교 사상가였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영향을 받고 구원이 기성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이것이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다.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Non-Congregationalism)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보는 교회건물이 없는 교회다 물론 헌금(獻金)도 필요 없다. 목사도 필요 없다.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란,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구원은 율법(律法)의 행위가 아닌 신앙(信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복음주의(福音主義) 교회다. 외적인 교회당(예배당)이나 교회의 제도적인 것 조직적인 것 즉, 의식(儀式), 전례(典禮), 신조(信條) 헌금(獻金)등은 거부하는 신학적(神學的) 기독교를 말한다.
선생의 일본 유학시절 성서(聖書)연구회를 통해 성경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선생의 동지들이 김교신, 송두용 유석동 등 유명한 인사들이다.
선생은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로 낙인찍혀 기성 교회는 선생을 교회 설교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 헌금을 받지 말라고 하는 함석현 선생을 어느 교회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선생에게서 엄청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 청년들이었다. 선생을 최초로 미국에 초청한 단체도 기독교 단체였다. 기성 교회가 하도 한심한 기독교였기 때문에 교회와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했다.
선생은 사서삼경(四書三經), 노자(老子), 장자(莊子)등 유교적 학문에도 능통했다. 유교뿐 아니라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라는 힌두교 경전(經典)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국의 성자(聖者) 한국의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라고 많은 사람이 존경하던 전통적 기독교 신자인 장기려(張起呂1911~1995) 박사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선생은 한평생 간디(Mahatma Gandh)를 흠모(欽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간디처럼 살려고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생의 하루 한 끼 식사 생활은 누구 영향인지 잘 모르겠으나 하루 한 끼만 먹고 90년 가까운 기나긴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은 “나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좀 달리 살 수 있었겠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이 우리와 함께 이 땅에 태어난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선생의 한학(漢學) 지식(知識)은 이 시대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수준이다. 선생은 삶의 굽이굽이에 많은 한시(漢詩)를 남겼다.
선생은 영어 실력도 대단하여 영국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서풍(西風)의 노래(Ode to the West Wind)” 전문(全文)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옮겨 누구도 함부로 따를 수 없는 명번역을 남겼다.
셸리 시의 마지막 구절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라는 한 줄의 구절은 인생의 희망과 좌절 앞에 선 사람에게 큰 버팀목의 명언이다.
함석헌 선생은 나이가 60, 70이 되어서도 “사랑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고 고백했다. 선생이 열일곱 살에 결혼했던 부인은 오랜 병상에서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 시(詩)를 쓰며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했던 함석헌 선생이 이성(理性)을 사랑한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었다.
선생이 어느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은 눈치만 보이면 주변 “속물”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스승인 선생을 비난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 문호 괴테는 70, 80살이 되어서도 젊은 여성들을 사랑했는데, 왜 한국 사람인 나는 그러면 안 되나” 하며 탄식을 하기도 했다.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 선생도 천재였다.
뛰어난 언변(言辯)과 글 솜씨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던 함석헌 선생!
선생이 토해낸 아름다운 인생의 노래들은 선생의 시집(詩集) “수평선 너머”에 실려 있다. 함석헌 선생 같은 인물이 앞으로 100년 이내에 또 태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시대에 함석헌 선생같은 어른이 안계시는 것이 한스럽다.
(위의 글은 2018.01.06. 김동길 교수의 조선일보에 쓴 글을 필자가 읽고 중요한 부분을 메모하여 둔 것이다. 원문이 조금도 훼손 되지 않게 필자가 편집을 하였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