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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로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9일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
복음: 요한 2,13-22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바야흐로 급격한 출산율 감소의 여파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지자체나 교회도 충격이 크겠지만, 저희 살레시오회처럼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단체가 받는 영향을 심각합니다.
신입생 감소로 인해 매년 학급수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이나 교사들, 실무자들의 고초도 만만치 않습니다.
점점 비어가는 큰 규모의 건물들 유지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나 수도회 안에서도 축소 및 통폐합 전문가 양성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이제는 대대적인 성전 건립이나 부속 건물의 신축을 지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건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모교회로서 세상 모든 성전들의 원천이요 규범이 되는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로마에 머물 때 종종 라테라노 대 성당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위용과 규모가 대단합니다.
걸작의 성화들과 예술품들로 가득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제정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성당들을 라떼라노 대성당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에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런 축일에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관련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보십시오.
진정한 의미의 성전은 우리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고색창연한 외형적인 성전이기보다는
내적인 성전이요 영혼의 성전입니다.
어찌보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각자가 또 하나의 성전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죄와 악습으로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이 훼손되고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영혼이지만, 그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강론>(2024. 11. 9. 토)(요한 2,13-22)
<‘성전 건물’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1) ‘성전’이 어떤 곳인가는 솔로몬의 기도가 잘 나타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7-29).”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였고, ‘기도하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기도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1열왕 9,6-7).”
물론 하느님께서 이런 경고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 앞에 축복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떻든 하느님 말씀은, 성전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고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변질된다면, 성전을 버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살아 있는) 경고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성전에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성전’에도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2)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데,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으니(마르 11,17), 하느님께서 이 건물을 다 허물어 버리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운 성전들이 많이 지어져 있고, 앞으로도 지을 텐데,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삶’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었더라도 강도들이 살면 ‘강도들의 소굴’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만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잘 지었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에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우리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들도 정말로 크고 멋있는 건물을
지어놓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3)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허례허식과 탐욕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예배를 폐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생활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니
망해서 없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