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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집은 서리라
잠 12:1-8
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5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6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8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잠 12:1-8 / [진실이라는 것은] 슬기로운 자식은 그 아비의 꾸지람을 달게 받지만, 미련한 자는 아무리 꾸짖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2) 여호와께서는 착하게 살아가려는 이를 흐뭇해하시나, 못된 짓 꾸미기에 골몰해 있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3) 모름지기 사람이란 못된 짓 하고는 살아갈 수없는 법. 올바르게 사는 이의 터전은 굳건하리라. 4) 어진 아내는 그 지아비의 자랑거리이나 칠칠치 못한 아내는 그 지아비의 뼛속까지 쑤시게 할 뿐. 5) 바르게 사는 사람은 올바른 것만 늘 생각하나, 못된 짓만 일삼아 남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것들은 남 쓰러뜨릴 궁리만 한다. 6) 바르게 사는 사람은 말 한마디로 죽을 지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 내지만,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이 내뱉은 말은 오직 피 흘리는 일뿐. 7)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이 저 세상으로 가고 나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으나, 올바로 사는 사람의 집안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8) 깨달음을 지닌 사람은 존경을 받으나, 머리가 아둔한 자는 사람들이 비웃는다.
경건한 자와 악인을 대조하는 말씀으로 삶과 행동 등 여러 가지 조건들에 관하여 비교를 합니다.
훈계와 징계(1-4) 사전적 의미로 ‘훈계’는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이며, ‘징계’는 ‘잘못이나 허물 따위를 나무라서 벌을 내리거나 제재를 가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훈계는 잘못된 것을 지적해주고 사람을 겸손케 하여 자신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한 지식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징계를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켜 ‘짐승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징계는 과거의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바르게 고치게 함으로써 미래에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관하여 깨닫지 못하고 돌이킬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선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며, 정죄를 받는 악인은 그 생각이 악하여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뿌리는 번성하는 나무처럼 기초가 탄탄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입니다(시 1:1-6; 렘 17:7-8). 또한 지아비의 면류관이 되는 어진 여인과 지아비의 뼈를 상하게 하는 욕(심각한 난치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처럼 힘들고 괴롭다)을 끼치는 두 여인을 대조한 것은 아내라는 동일한 역할을 하면서도 그 남편에게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의인과 악인(5-8)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 사람을 구원하게 하지만, 악인의 도모는 다른 사람들을 속임으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그 생각에서부터 서로 다름을 말하며 각각의 행위는 그 생각이 겉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결과는 스스로 소멸될 수밖에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받는 보상은 단순히 그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굳건하게 세워져 갑니다. 이처럼 사람은 지혜를 따라 말하거나 행동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게 되지만, 굽은 마음을 가진 자는 멸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영심이 많고 몰상식하거나 가롯 유다처럼 인생과 사람에 대해서 왜곡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마 27:3-8; 행 1:16-20).
적용: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훈계와 징계, 칭찬과 멸시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따라 결정됩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변화시켜 가는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훈계와 질책을 받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과 삶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뿌리로 인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의인의 장점
잠언 12:1-12 / 매튜 헨리 주석
훈계와 징계(잠언 12:1)
여기에서는 우리가 은혜의 수단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탐문해 봄으로써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1. 은혜와 사람을 가진 자들이라면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훈계, 즉 그것이 교훈이나 권고나 책망을 통해 주어진 것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통해 주어진 것이든 모든 훈계를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선한 교육을 귀하게 생각할 것이며, 엄하고 근신을 요구하는 규율 아래 있는 것을 고역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충실한 목회를 사랑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며 즐겨 그를 듣는 자들은 자기들이 "지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셈이 된다.
2. 자기 잘못을 지적해 주면 모욕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본분을 상기시켜 주면 자기 자유에 대해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스스로 은혜없는 자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몰상식을 폭로하는 셈이 된다. 징계를 싫어 하는 자는 어리석은 것에 그치지 않고 "짐승과 같아서" 지혜가 없는 말이나 노새와 다름 없으며 매를 보고 발길질 하는 소와 매한가지이다. 본문의 "짐승같은 자"란 말씀은 무질서한 가정과 문란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런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그들이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아무속박을 받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양심의 확신을 질식시키며 진리를 말해 주는 자들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다.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은총과 정리(잠언 12:2)
1. 우리는 하나님과 하며 그러한 대로 실존하고 있다.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자는 비록 세상이 자기들을 빈축하며 사람들에게서는 거의 애고를 받지 못하더라도 행복하고 참으로 행복하며 영원히 복된 자이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모든 선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그에게 정죄하심을 받는"자들은 아무리 인간들한테서 박수 갈채와 환호를 받는 자라고하더라도 비참한 자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서 정되받는 이들을 둘째 사망으로 정죄하시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이 세상에서 교제하듯이 하나님과도 함께 있다. 우리의 천부께서는 자기 자녀를 판단하심에 있어 그들 사이의 행동에 매우 많이 의존하신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며 자선을 좋아하고 선을 행하는 "선인은" 자기 기도로써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리라." 그러나 자기 이웃을 해하려고 악을 궁리하는 해로운 인간은 "여호와께서" 자기 나라에 발들여 놓은 가치도 없는 자로서 "정죄하실" 것이다.
의인과 악인의 견고함(잠언 12:3)
1. 사람이 흉계로 출세할 수 있긴 하지만 그런 옳지 못한 계교로써는 기반을 든든히 할 수도 없고 안전을 도모할 수도 없다. 그들의 큰 재산을 회득할 수도 있으나 영속적인 그런 재산은 얻을 수가 없다.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느니라." 악인은 악으로써 높은 곳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높은 곳은 미끌어지기 쉬운 곳이다(시 73:18). 죄를 수단으로 하여 쌓아올린 번영은 모래 위에 세운 것과 같으며, 그 사실은 곧 나타날 것이다.
2. 착한 사람은 이 세상 것을 조금밖에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조그마한 것은 오래 지속할 것이며, 정직하게 얻은 것은 오래갈 것이다. 비록 가지는 휜다고 하더라도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들은 굳게 착근(着根)하고 있어서 움싹달싹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위로와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 깊이 뿌리 박고 있으므로 결코 뽑히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여인과 욕된 여인(잠언 12:4)
1. 훌륭한 아내를 얻는 복을 받은 자는 왕위에라도 오른 듯이 마냥 즐겁기만 한데 이는 그런 아내가 자기에게는 "면류관"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어진 여인"은 경건하고 분별이 있으며, 재간 많고 근면하여 가족을 위해 활동적이며 가사를 거뜬히 돌본다. 모든 점에서 자기 의무를 본분으로 삼는가 하면 활달한 여장부여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도 십자가를 가질 수 있다. 그런 현모양처는 남편을 자기 머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남편에게 "면류관"이 된다. "면류관"이 장식물인 것같이 남편의 영예와 존귀가 될 뿐만 아니라 "면류관"이 권세의 상징이듯 자기 가정 안에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며 유지시켜 주기까지 한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신실하며, 자기가 본을 보임으로써 자녀와 종들도 그렇게 되도록 가르친다.
2. 악처로 골치 썩이는 자는 마치 똥더미 위에 올라 앉은 듯이 불행하기만 하다. 악처는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치의 고질병이다. 게다가 그 여인은 지아비에게 욕을 끼치기"까지 한다. 미련하고 게으르며 낭비벽이 심하고 들뜨기 쉽고 성질 사나우며 입버릇이 고약한 아내는 남편의 위안이 되기는커녕 명예조차 망쳐 놓고 만다. 그가 밖에 나가면 그의 머리가 푹 숙여지고 만다. 그의 아내가 저지른 잘못이 자신의 치욕으로 변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집 속에만 들여 박혀도 그의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다. 그는 계속 불안하다. 그것은 심령을 좀 먹는 고질병인 것이다.
의인과 악인의 생각(잠언 12:5)
1. 하나님의 말씀은 심중의 생각과 의도를 구별해 내며 그것을 판단하신다. 우리가 만일 생각은 자유라고 상상한다면 잘못이다. 생각조차 하나님의 인식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명령 하에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자기 심중의 생각과 의도를 감시하는 관찰자가 되어야 하며 그로써 자신을 심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은 영혼의 장자이며 영혼의 형상은 대부분 가식없이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악한 꾀와 의도를 보면 그가 악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올바른 생각은 의인에 대한 최선의 증명이 된다. 착한 사람도 자기 마음 속에 그릇된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못된 상상이 악한 계획과 결심으로 영글도록 방임하거나 계속 품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3. 말이나 행동이 엉뚱하게 나오거나 시기에 맞지 않으며 적어도 오해를 받는다고 해도 그 의도가 정직하고 그 생각만 올바로 가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명예가 된다. 그러나 늘 함정 파놓은 거짓말을 하고 거짓되게 행동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된 술책과 책략으로 속이며 행동한다는 것은 인간의 수치가 된다.
의인과 악인의 말(잠언 12:6)
1. 악인은 제 이웃에게 해로운 말을 한다. "엿보아 피를 흘리자"고 말하는 자는 참으로 악한 자이다. 그들의 혀는 저희에게 방해되는 자와 저희가 미워하고 핍박하는 선인에게는 칼이나 다름없다(눅 20:20, 21 참조).
2. 그러나 선인은 자기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한다. "정직한 자의 입"은 억압받는 자의 송사를 위해 즉시 열리며(잠 31:8), 그들을 위해 변호하고 증언하여서 그들을 구원하며, 특히 악인이 엿보아 피를 흘리고자"한 자들을 구출한다. 사람은 때때로 선한 말 한 마디로 매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의 견고함(잠언 12:7)
우리는 건과 같이(3절과 10장 25,30절) 다음의 가르침을 받는다.
1. "악인의 기뻐함은 잠간이라"는 것. 그들은 잠시 동안 높임을 받을 수 있으나 얼마 안 있어 엎드려져서 소멸되어" 버린다. 그들의 환란은 그들의 전복을 증명해 주며, 크게 뽐내던 자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있던 장소도 그들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악인을 돌아 보라. 그들은 소멸되었느니라." 그들은 너무나 미끌지기 쉬운 장소에 서 있기 때문에 마치 소돔의 사과처럼 극히 작은 환란에 접하기만 해도 무너져 내린다. 소돔의 사과는 겉은 아름다우나 손이 닿기만 하면 먼지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사해 근처에 나던 사과로 이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옴:역주).
2. 의인의 번영은 그 기초가 튼튼하여 오래 간다는 것. 죽음이 그들을 옮겨 가겠지만 "그 집은 서 있을" 것이며 그 가족은 존속하고 정직한 자의 자손은 복될 것이다.
칭찬과 멸시(잠언 12:8)
본문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름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명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중시하고 크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게 다음 사실은 확실한 것이다.
1. 최선의 명성이란 미덕과 진실된 경건과 사려깊은 처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파단에 준하여 지혜롭고 선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칭찬을 받으리라." 그것은 확실히 "진리에 의해" 내리는 판단이며, 사람의 재물이나 지위나 재주나 간교함을 따라 내리는 칭찬이 아니라 "그의 지혜대로," 그의 정직한 계획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명철한 선택에 따라 주는 칭찬이다.
2. 악을 따르고 선의 반대로 따르는 것은 최악의 수치이다. 굽은 길로 비껴 가며 완악하게 그 길로 계속 행하는 자는 "마음의 패려한 자"로서 "멸시를 받으리라." 섭리가 그를 빈궁하게 하고 천대 받도록 하실 것이며, 명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자라면 그를 상종할 만한 가치가 없고 신뢰하기에 부적합한 자로서, 인류의 오점과 불명예가 되는 자로서 멸시할 것이다.
종을 부리는 자(잠언 12:9)
1.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면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며 지명 인사의 위치와 풍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나, 막상 집에서는 궁색하기가 이를 데 없어 빚을 갚고난 한 조각의 빵조차 살 형편이 못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의복이 날개이고 보니 신수를 훤하게 차리자면 배꼽이 등에 가 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2. 그러나 이들보다는 하류 인생이긴 하나 만족하고 지내는 자들의 처지와 특성이 어느 모로 보든지 더 낫다. 그들은 보다 낮은 영역에서 수수한 의복을 입고 미미한 자리에 있다고 하여 비천히 여김을 받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가정에서는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편리한 것까지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빵도 있지만 시중들고 자기들의 일까지도 도와 줄 하인까지 두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풍족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꾀하는 자들은 자기 허우대 하나 유지할 것도 없는 주제에 외부에서 근사한 풍모를 보이려고 꾸미는 것밖에 모르는 자들보다 낫다. 그러한 자는 그 처지가 비천한데도 마음은 겸비하지 못한 자들이다.
의인의 자녀와 악인의 잔인함(잠언 12:10)
1. 여기에서 선한 자의 자비심을 어느 정도로까지 큰가 살펴보자. 착한 사람은 아무리 비천한 지경에 처한 인간에게 측은한 마음을 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육축의 생명"까지도 중히 여긴다. 그것은 짐승이 자기를 섬기는 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과 짐승"을 다 보호하시는 섭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살핌 아래 있는 짐승은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해 주어야 하고 음식과 잠자리를 편안하게 마련해 주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학대하거나 혹사해서는 아니 된다. 발람은 자기 나귀를 차고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소를 보호하였다(신 25:4). 그러므로 짐승에게 공평하지 못한 자는 불의한 사람이다. 짐승에게 맹렬히 노하며 야만적이며 대하는 자는 스스로의 잔학한 습성을 노출시키고 공고히 하는 자이며, 피조물이 탄식하도록(롬 8:22) 조장하는 자이다.
2. 악인의 무자비함은 어느 정도일까 살펴 보자. "악인"은 "긍휼"조차도 "잔인"하다. 인간으로서 그의 안에 있는 본성적인 동정심은 사라져 버리고 타락의 힘으로 말미암아 완악한 마음으로 변해버렸다. 빌라도가 무죄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내가 그를 때려서 놓아 보내리라"고 결심을 하였던 것과 같이 악인이 측은지심의 대신으로 통용하는 것조차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장된 친절한 잔인한 의도를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작하는 자와 방탕한 자(잠언 12:11)
1. 자기 사업에 전심하고 정직한 직업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지혜이니,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유주이든 소작인이든 간에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자기 일에 열중하며 설령 그로 인해 재산을 불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기꺼이 수고하려는 자이다. 그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자기와 자기 가족에게 알맞는 식물을 얻을 것이고 세상살이의 비용을 넉넉히 부담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진노하신 선고에서 조차 "너는 네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얻어야 할 망정 떡을 먹게 되리라"는 자비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이런 자비가 거부되었다(창 4:12). 분주하라. 이것이 편안하게 되는 비결이다. 네 상점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 상점이 너를 지켜 주리라. "너는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먹을지니라."
2. 자기 사업에 태만한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런 자는 "지혜가 없는" 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한가한 무리들과 어울리게 되어 악한 길로 좇아가다가 먹을 것이 없게 된다. 최소한 자기가 먹을 떡도 없게 되고 보면 딴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에 의존하게 되는, 남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악인과 의인의 결과(잠언 12:12)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여기서의 악인의 관심과 목표는 무엇인가? 그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자 한다. 그는 "불의의 이 (혹은 악인의 그물질한 것을) 탐하느니라." "오! 내가 그 사람만큼만 교활하다면 내가 상대한 자들을 등쳐 먹을 수 있으련만! 내 사기술이 그의 재주만큼만 되어도 좋으련만! 내가 그 사람만큼만 효과적으로 원수진 놈을 복수해 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는 해를 끼치면서도 안전히 행동할 수 있도록 하려고 악인의 "성채"나 "요새"를 탐낸다(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음). 이는 그 해가 자기에게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 선인의 관심과 목표는 무엇인가?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이것은 그의 힘과 안정성을 말한다. 그가 바라는 일은 선을 행하는 것과 착한 행실로 고정되고 굳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자신을 위해 고기를 낚을 그물만을 바라지만, 의인은 타인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 맺기를 소원한다(롬 14:6).
의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잠언 12:1-14 / 황의봉 목사
찬송가 503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이 찬송가를 패러디하여 ‘사랑’이란 말 대신 ‘지혜’란 말을 넣어 가사를 만들면 어떻게 나올까요? “세상 모두 지혜 없어 혼란함을 아느냐?”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를 지내면서 사람들은 똑똑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소위 말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했습니다. 경제의 흐름을 알고, 신기술을 개발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팔았습니다. 서비스 상품을 만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서비스를 받아보려고 찾아들었습니다.
자본시장에서 발 빠른 정보와 막대한 자본을 가진 기업이 그렇지 못한 개인을 이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일이 많습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했습니다. 정직하게 땀 흘려서 일하고 조금씩 조금씩 모아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성공하면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사람이 실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정당하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떳떳하게 노력하여 성공하면 좋은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된 행동을 하여 성공도 조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과연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돈이 있고 힘을 가졌으니 사람들은 동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실까요? 이럴 때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의인에게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솔로몬은 아들에게 가르치는 형태로 잠언을 말하였습니다. 잠언의 주제는 지혜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지혜입니다. 가까이하여 사귈 사람과 멀리 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리를 잘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의 마음 자세와 태도 역시 지혜로운 사람을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어느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 착하기는 한데 너무 착해서 다른 이에게 늘 이용당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도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리가 분명하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데, 이렇게 똑똑해도 남에게 매몰차게 행동하면 이런 사람은 존경 받거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바르고 의롭게 살아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무조건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가 너무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당 출마자는 자신이 정치의 경험도 많고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위기에 강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생 검사로만 살아온 야당 후보를 거칠게 몰아세우며 무식한 사람이요, 정치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다그쳤습니다. TV토론에서 밑도 끝도 없이 “알이백을 아십니까?” 하고 물어 화제가 됐습니다. 야당 후보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알 이백’인지 아니면 ‘알이 백’인지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이 후보의 물음에 “알이백이 뭐죠”라고 오히려 반문한 바 있습니다. 저도 목사이기 때문에 이런 전문용어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이 백’은 ‘RE100’ 즉 재생에너지 100%라는 뜻입니다. 논란이 불거진 1차 TV토론 뒤 여당 후보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모를 줄은 진짜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겸손하게 배우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무슨 말이든지 다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지혜롭게 살아가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2:1에서는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니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만약 배우는 것을 싫어한다면 짐승과 같습니다.
여기서 배움이란 단순히 학문적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움이란 삶의 자세이고 배움이란 생각하는 능력이며 판단력입니다. 악한 일을 알아도 선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그래서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2절) 하였습니다. 3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악을 꾀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은 든든하게 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은총을 주시고 그의 삶을 든든히 받쳐주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어려움에서 도와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흔히 똑똑한 사람을 IQ가 좋다고 하는데 IQ좋으면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지혜로운 사람은 단순히 머리만 똑똑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악한지를 알뿐만 아니라 그중에서 선을 선택하고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의로움인지 알고 의로움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삶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어질거나 모진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며 그중에서 모진 행동을 하지 않고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4절) 하였습니다.
역대에 찾아볼 수 없는 비호감 선거라는 평을 받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막강한 여당과 야당 두 후보가 아내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에 고배를 마신 후보는 본인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었지만 아내의 행동 역시 남편에게 뼈가 썩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이 된 후보는 검찰총장 출신이라 그런지 본인에게는 상대편 후보나 진영으로부터 크게 책잡힐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아내의 과거 행적을 들추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여인이 어질게 행동하면 남편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회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모질거나 어리석으면 남편을 욕되게 하고 남편의 뼈까지 썩게 만듭니다.
5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분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그렇습니다. 의인은 정직하게 생각하지만, 악인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속임수를 만들어냅니다. 속임수를 만드는 악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면 남이야 손해를 보건 말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정직하게 생각하고 정직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6절) 하였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구원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하는 정직한 말은 고통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진실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속임수를 쓰고, 정직과 담을 쌓고 사는 악인은 결국 엎어지고 코가 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집은 든든히 서게 됩니다.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7절)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정직한 의인을 구원하시고 그의 삶을 세우십니다. 지혜는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금 손해를 본다 해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의로움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3. 하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지혜의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어딘가에는 지혜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모두 썩었다고 생각되고 아무리 거짓이 난무해도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월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어딘가에는 세월을 바로 잡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세월 따라 살아가고, 시대를 탓하면서 악한 사람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강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흙탕물을 정화시켜보려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8절을 읽어보면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래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어디서나 칭찬을 받습니다.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사람들은 지혜를 알아봅니다. 반면에 마음이 굽은 사람, 삶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사람은 어디를 가나 멸시를 받습니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굽신 거릴지 몰라도 뒤에서는 무시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내 앞에서 좋은 말을 해 주었다고 해서 그걸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돌아 들어오는 소문이 좋아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해도 남의 평판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인은 누가 무어라 말해도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요셉을 보세요. 형들이 자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 궁금해 하시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떠납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갔는데 형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들은 여기서 떠났어. 내가 그들의 말을 들었는데 도단으로 간다고 했어.” 세겜에서 헤브론까지는 거리가 100km쯤 됩니다.
그 먼 길을 찾아 왔는데 형들이 없어요. 다시 북쪽으로 30km쯤 더 떨어진 도단까지 찾아갑니다. 그런다고 해서 형들이 반가워하고 환영했습니까? 결국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갔어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성경은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합니다. 주인 보디발은 어린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지 않았습니까?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기고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하는데 간수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니 결국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고 7년간 지속되는 극심한 흉년 속에서 나라를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지혜로운 의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일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가축을 돌보고 가축이 고생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과 환경을 돌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잔인하게 행동합니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10절) 하신 말이 그런 뜻입니다. 자기 일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혜가 판가름됩니다. 자기가 기르는 가축에게라도 성심껏 최선을 다해 돌보는 사람이라면 사람과 하나님께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칭찬하실까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책임감도 없이 될 대로 되라면서 팽개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방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11절에는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할 일이 있는데도 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좋은 것 같으며 친구도 많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비난을 받게 됩니다. 사업에 조금 성공했다, 돈을 좀 벌었다고 그저 노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얼마 안 가 그의 사업이 내리막길을 달리게 되지요. 이때 또 내리막길을 막아보자고 온갖 불의한 방법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12절) 하였습니다. 불의를 탐하다 보면 그런 사람의 입술에는 거짓말과 속임수와 같은 더러움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입술에는 허물이 많고, 그 인생은 결국 허물로 엮은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반대로 의인은 의의 뿌리가 심겼으므로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13절) 하셨습니다. 의인은 지금까지 그의 입술로 덕을 쌓아 왔기 때문에 그가 환난을 당한 때에 돕는 손길을 만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이념으로 서로 나누어지고, 사회적으로 사고가 많을 때일수록 말을 선하게 하여야 합니다. 말이 곧 그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입술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를 보고 계시며 그에 상당한 복을 주십니다. 비록 지금은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14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잠 21:1-6 / 한태완 목사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즉 인간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게 바로 인간의 목적이란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로, 어떤 일로 창조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 우리가 무엇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의 성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1.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하였고,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하였습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부당한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미워하시고, 의와 공평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저울눈 속이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 연안부두에 교사들 회식자리 참석하고 부둣가에 나갔는데 조개를 파는데 통 가득히 담은 조개가 서울에서 보다 훨씬 싸게 팔아 사려고 돈을 주었더니 조개를 붓는데 통속에 칸막이가 있어 아주 적은 양을 받았습니다. 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 2Kg을 샀는데 집에 가져가서 저울에 달아보니 1.5Kg 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그곳에 가서 또 사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사59:15)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 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인(仁)과 의(義)와 신(信)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성도가 공평하게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의 송사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출23:6)
둘째는 저울과 추, 도량형입니다.(레19:35,36, 신25:15)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겔45:10)
셋째는 부하직원이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 공평하게 해야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4:1)
넷째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을 받으면 공평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잠28:21)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은 차별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의 관계를 통해 연줄을 댄 사람이라 해서 보아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이와 한가지입니다. '한 조각 떡'은 적은 뇌물을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범법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재판을 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공평하고 의롭고 정직하며 적법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악인은 사람의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
세상 사람들은 "의롭고 공평하게 살면 재물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우리에게 "의롭고 공평하게 사는 지혜로운 자는 재물을 얻되 곳간까지 채울 정도로 많이 얻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인도함을 받아 의로운 길, 공평한 길로 행합니다. 이처럼 의를 행하고 공평한 길로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2:9)
다음은 어느 무명 성도의 선행을 위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단 한 번만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과 친절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게 하옵소서. 제가 그것을 미루거나 핑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는 제가 다시 이 길을 지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을 우리가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길은 선한 길을 걸어가, 공의와 정직을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공평과 정직 안에 모든 선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길'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행동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여 얻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공의롭고 공평하며 정직하게 살아야겠습니다.
2. 겸손한 사람입니다.
본문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하였습니다.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말썽이 많고 다투기를 제일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가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가 서있는 것을 보고, "노 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 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 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차 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 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 수도사의 극도로 낮아진 겸손의 도에 모두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은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귀히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건 성취되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다고 선언하신 것은 교만이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이 가장 칭찬 받는 미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8-19)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29:19)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저는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좀 받으면 성자(성자)인 척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게 되고, 죄를 알게 되어 자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 질수록 큰 은혜를 받습니다. 낮은 골짜기에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 높은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벼락도 가장 높은 곳을 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신앙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 자주 빠지게 되는 시험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내 신앙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이나 재능 많은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 겸손한 자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택하시고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셨지만 군인도 없고, 돈도 없으셨습니다. 내각도 고기 잡는 어부로 구성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때도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납니다. 구원의 은혜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겸손하게 주 예수를 영접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은혜를 못 받았지만 오히려 창기나 세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접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가 필요하다고 찾는 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나라를 떠나 이방나라로 건너가 이방 땅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은혜는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겸손할 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 겸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십니다. 영광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시편22편 26절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르고 언제나 샘솟는 기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생명입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겸손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길이길이 겸손하여 만대에 축복 받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본문 5절에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라'하였습니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습니다. 먼저 황소가 나섰습니다. "나는 주인님의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습니다. "도둑을 누가 막는가. 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습니다. "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습니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에 있어서 부지런함은 필요 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은 '개미의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부지런히 살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꼭 지켜야 할 덕목 한 가지가 있는데 ‘근면’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1-30절에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졸며 자다가 기름을 준비 못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고 영육 간에 주리게 합니다.(잠19:15) 그리고 달란트 비유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주인으로부터 각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달란트를 받은 세 번째 종입니다. 처음의 두 종은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후 곧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마태25: 16-17절) 처음의 두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 바로 일하기 시작했고, 세 번째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올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본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을 향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을 향해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엄하게 꾸중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13:4)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15:19)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집을 짓기에 알맞은 장소이다"라고 말했고, 벤자민 플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은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고, 무형의 시간까지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죄악은 게으름과 권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면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 가는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며 사는 것을 생활 철칙으로 삼아야겠습니다.
4. 정직한 사람입니다.
본문 6절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속임이 없는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미국 시민들의 영원한 존경을 받는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18세에 집을 나와 상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에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한 상점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밤늦게 상점 문을 닫고 장부를 보며 결산을 하던 링컨은 장부보다 3센트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날 낮에 한 부인으로부터 3센트를 더 받은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거기서 한 시간도 더 되는 부인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부인은 그 돈을 받고, "이것은 백금보다 더 귀한 3센트이군요. 당신의 정직한 마음은 반드시 참된 값으로 인정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라며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과연 링컨은 그 정직한 마음으로 미국의 운명을 바꾸었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세계 역사 속에 뚜렷이 남아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이 지향해야 할 덕목 중에 중요한 하나는 정직입니다. 현대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서로 속고 속이는 양심의 상실과 부정직이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산 선생은 일찍이, "거짓이여 너는 이 민족을 망친 원수로다" 경계하였습니다. 세태를 탓 할 것이 없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별이 더욱 빛나는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정직하지 않을수록 그리스도인은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직하신 분이시기 때문에(시25:8, 사26:7) 정직한 자를 기뻐 하사,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잠2:7) 거짓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12:22, 잠19:9) 그리고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며(호14:9), 정직은 성도의 의무입니다.(고후13:7)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직합니다. 그곳에 사는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 갔는 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 당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결코 속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정직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신6:18-19) 학교를 갓 졸업한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느 회사사장 비서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절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장실로 연결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견디다 못한 그 여성은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며칠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며칠 뒤에 그 비서를 경리담당 중역으로 발령 내렸습니다. 사장은 그 그리스도인 여성의 정직성을 높이 산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정직한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은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정직한 사람은 후손에게까지 복이 있습니다.(시112:2) 영국선교사로서 아프리카 선교에 크게 공헌한 리빙스턴 집안은 평민출신으로 귀족적인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으나 그의 혈관 속에는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귀한 것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신앙과 정직한 정신입니다. 그의 조상이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놓고 "자녀들아 정직하라" 라는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긴 이후 리빙스턴 가의 가훈은 정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귀히 알고, 자자손손 지킴으로서 이러한 가정에서 리빙스턴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며,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시147:11)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