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1750년대 영조시대 제작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말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부터 우리 땅, 고려-조선의 왜구정벌이후 구한말까지 대대로 이어진 영토인식이다. 이런 기록은 너무나 많다.
“잃어버린 우리 왼발을 다시 찾자!”
일본의 ‘독도 강탈’ 공세가 노골화하면서 대마도 반환운동을 벌이는 목소리가 뜨겁다. 임진년의 악운! 올해는 임진왜란 420주년, 일본은 독도를 끝내 침공할 것인가.
독도보다 더 크고 억울한 대마도는 다시 찾아 올 길이 없는가.
이승만 “대마도 반환하라” 60여차례 요구
대마도 반환을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8년 8월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무력강점했지만 의병들이 일어나 이를 격퇴했고, 도처에 그 전적비가 남아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따라서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국회에서는 ‘대마도반환’ 결의안을 만들었고, 이승만은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법적조치’를 취하면서
수시로 “대마도 내놔라”고 요구한 것이 6.25때까지 무려 60여차례나 이어졌다.
일본 “김일성이 우리를 살려준다” 환호
당황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회피하다가 북한의 6.25 남침전쟁이 나자 쾌재를 불렀다.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승만의 ‘대마도 요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전쟁특수로 경제대국 발판까지 거머쥐게 된 일본.
김일성과 소련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소련 공산당 앞잡이 김일성이야말로 ‘친일파 왕초’라 할만하다.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한다.
6.25전쟁중 독도를 괴롭히는 일본에 대하여 ‘독도와 이어도’를
주권수역 울타리로 쳐서 확보했다.
대마도까지 평화선 안에 넣고 싶었지만 어쩔 것인가. 대마도 해방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이 강점한지 80여년이 지난 그때, 공산당과의 전쟁에 일본군이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자 “총뿌리를 돌려대겠다”며 반대한 이승만도 수륙 양면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법전문가(프린스턴대 박사) 이승만이 ‘실효지배’의 힘을 모르겠는가. 대마도를 도둑맞은 고종 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싸우다가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대마도는 식민지 그대로다. 6.25가 그의 숙원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연말회견 기사. 일본이 강점한 대마도를 찾는 것은 실지회복이라고 강조한 내용. 왼쪽에 ‘실지회복의 해를 맞이’라는 특집제목이 눈을 끈다.
‘조선의 속방’ 대마도주에 관직...‘군신지간’
부산에서 45㎞ 큐슈에서 150㎞-거리만 봐도 우리 땅인 대마도!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요시시게(宗義調)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한 전쟁 임진왜란. 왜국의 강압에 굴복하여 본의 아닌 용역을 맡았던 대마도는 조선의 엄벌을 받아 굶어죽기 직전에 다시 조선이 곡식과 면포 공급을 재개하여 살아났다.
삼국시대엔 각국세력이 혼재했으나 통일신라때부터 고려와 조선 말까지 대마도는 <계림(鷄林=신라) 관할도서> <고려사 '고려의 목(牧)'><동래부(東萊府)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한중일(韓中日) 3국의 사서(史書)들과 지도들, 구미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땅, 코리아 땅이다.
▲1850년대 제작한 <해좌전도 海左全圖>의 대마도와 울릉도 부분. 울릉도 옆에 독도까지 기록되어있다. (출처: 김화홍 지음 ‘대마도도 한국땅’)
◆ 조선 왕조 5백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한 예로 세조가 대마도주에게 내린 직명은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崇政大夫判中樞院事對馬主兵馬都節制使)였다.
조선왕조의 대마도 인식은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성종, 연산, 광해, 영조, 순조등이 내린 ‘대마도 교지’를 비롯, 빈번한 교류기록에 <대마도는 조선의 속방, 군신지간(君臣之間>이란 표현은 한곁 같다.
◆ 1750년대 영조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大東總圖)>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라는 말은 수천년 내려오는 우리의 국토인식, 주권의식에 다름 아니다.
또한 퇴계 이황(李晃)의 문서, 실증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외전'(東史外傳)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물론, 특히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비어고'(備禦考)에서 대마도현장 사료 및 주민의 언어, 복식, 풍습등을 종합하여 '일본 왜'와 다른 대마 조선인의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고증해 놓았다.
◆ 이승만이 말한 '전통적 경계선'이란 현해탄(玄海灘)을 가리킨다. '현해탄'은 '현해'의 잘못된 표기(일본사전)라는 이 해역은 큐슈의 북쪽 연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이 대마도 해협이나 대한해협과는 전혀 무관하다. 큐슈의 북쪽이래서 북현무(北玄武)의 ‘현해’인 것이다.
▲1786년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제작한 <삼국접양지도> 원본. 대마도는 조선반도와 같은 노란색. 일본은 녹색이다. 이 지도는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면서 영토를 확인할 때 일본이 내놓은 것,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이 함께 국제공인한 지도이며 그후 일본이 각국과 조약을 맺을때마다 국가공식지도로 사용했다. 1870년대 일본은 대마도 노란색을 일본과 같은 녹색으로 변조하여 각국에 배포, 노란색 대마도 지도와 바꿔치기 했다. 사진은 1832년 제작 프랑스어판 지도.(김상훈 지음 '일본이 숨겨오는 대마도와 독도의 비밀')
명치유신→지도 변조→대마도를 훔치다
1868년 명치유신 혁명에 성공하자 일본에 불어닥친 정한론(征韓論)의 열풍은 대마도부터 탐냈다. 구한말 약해질대로 약해진 조선의 혼란기를 틈탄 일본은 식민열강의 남의 땅 빼앗아먹기 수법부터 흉내낸 것이었다.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黑船) 공격에 놀라 막부(幕府)를 무너뜨린 사무라이들은 조선식민화로 치달았다. 우선 대마도를 이즈하라번(嚴原藩)으로 만들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편입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행한 것이 <지도 변조>! 절도 사기꾼 행각이었다.
▲원본(왼쪽지도) 대마도 노란색 / 1786년 일본인 하야시시헤이(林子平)이 만든 <삼국접양지도> 대마도가 조선과 같은 노란색. *****변조품(오른쪽지도) 대마도 녹색/1870년대 일본이 노란색 대마도를 녹색으로 일본과 일치시켜 변조, 각국에 배포한 지도. 사진은 호사카 교수가 제시한 필사본.
▲국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변조품 <삼국접양지도> 대마도 색깔을 일본과 같게 칠한 것.
최근 나온 책 <일본이 숨겨오는 대마도-독도의 비밀>을 보면, 독도보다 대마도에 관한 ‘한국소유권’ 자료가 무수히 넘쳐난다.
대마도 연구가인 저자 김상훈씨의 연구 결과를 요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786년 일본인 하야시(林子平)가 만든 지도<삼국접양지도>에서 ‘대마도는 조선땅’이다. ▶ 1861년 일본정부는 이 지도를 열강에 제시, 일본영토의 경계를 국제 공인 받는다.(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 일본은 이 지도 제작때부터 80여년간 공식 국가용으로 사용했다. ▶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지도 모두 ‘대마도는 코리아’ 영토다. ▶ 미국지도에 대한해협(Strait of Korea)은 대마도 남쪽 바다로 표시되어있다. ▶ 1868년 미국 페리제독 (삼국접양지도 공인 당사자) 자서전에 나온 지도 역시 대한해협은 대마도 남쪽. ▶ 1873년 일본해군이 만든 지도부터 대마도 색깔을 일본 땅색깔과 일치시켜 변조한다. ▶ 1878년 프랑스 주재대사 다나베 타이치(田邊太一)에게 훈령, 프랑스어판등 삼양접양지도를 모두 수거한다. 대신 대마도-일본 색깔을 일치시킨 ‘필사본’을 각국에 보급시킨다. ▶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일본학자들은 조선의 대마도 기록 문서를 재정리한다. ▶ 1923년 조선사편찬위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일당은 대마도에 건너가, 한국관련 문서 66,469매, 고기록 3,576권, 고지도 36건, 고서 18점, 그림 53점등을 수거 은폐, 변조하고 불태웠다. 유적도 파괴했다.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페리제독의 자서전에 나온 대마도 지도 (1866년). 대한해협(Strait of Korea)이 대마도 남쪽 바다에 표기되어있다. (김상훈 지음 ‘일본이 숨겨오는 대마도와 독도의 비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다. ‘대마도’ 역시 한반도와의 거리로 보나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나 우리 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 사람조차 ‘대마도’를 ‘쓰시마 섬’ 즉, 일본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 같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함께 과학적인 근거들을 통해 우리의 주장에 대한 입지를 확고히 다져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더해지고 있다.
마산시는 2005년, 지자체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에 대응해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마산시는 올해로 5번째 ‘대마도의 날’ 기념식을 지난달 19일 가졌다. 또한 현재 외교통상통일위원회(위원장 박진)에는 허태열·정갑윤 의원 등 50명의 의원이 공동 제안한 ‘대마도의 대한민국 영토 확인 및 반환 촉구 결의안’이 회부돼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논의 중에 있다.
그렇다면 실제 대마도가 우리 영토였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는 문헌이 있는가?
기록을 보면 대마도가 나오는 최초의 사서는 중국의 ‘삼국지’다. 3세기에 대마도 모습을 묘사한 이 기록에는 대마도가 ‘대마국’으로 표시돼 있다. 또한 한국의 ‘삼국사기’, 일본의 ‘일본서기’에는 ‘대마국’ ‘대마도’ ‘대마주’ 등으로 표기돼 있다.
▲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포함돼 있다. ⓒ뉴스천지
고려시대 사료에는 고려 말 공민왕대에 대마도만호가 사자를 보내고 조공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 당시에 대마도주가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양국 간에 국교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었고, 대마도가 진봉선무역이라는 형태로 고려와 통교했다는 사실은 대마도가 고려의 속령 내지 속주로 고려해 볼 만하다.
또 조선시대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에 뒤이은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라는 조치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수차례 대마도를 정벌했고 이후 수직왜인 제도와 세견선 무역의 제도를 실시하면서 대마도의 속주화 작업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한편 1436년에는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사다모리(종정성)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지난 1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대마도 관련 정책토론회에서 김문길 부산외대 교수도 한·중·일 삼국에 남아 있는 고지도와 고문서 곳곳에서 역사·지리·문화적으로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1488년(성종 19년) 중국사신인 동월(童越)이 중국 황제의 명을 받고 조선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저술한 고서적에는 독도와 대마도가 조선 영토라고 명시돼 있다. 당시 이 책은 중국 유명 역사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포함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에서도 1717년에 필사본을 편찬해 조선의 사회와 지리를 가르치는 데 사용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1536년 중국에서 제작한 또 다른 지도인 황명흥지지도(皇明興地之圖)에서도 대마도는 조선 땅임이 표기돼 있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명시하고 있는 증거는 일본 내 문서에서도 발견됐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 작전 사령부로 임명한 왜장 카아가미 히사쿠니가 그린 ‘일본군지도(日本軍地圖)’에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기록돼 있다.
김 교수는 대마도 원주민이 고려로부터 곡물 원조를 받았다는 기록, 조선인 학자로서 일본에 초청된 김성일의 보고서, 조선 조정에서 대마도의 무사에게 내린 교지 등의 고문서에서도 대마도가 한반도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지도인 조선방역지도와 대동여지도에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돼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외에도 이조실록의 세종 때 기록에도 분명하게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고 밝히고 있고 ‘동국여지승람’ 역시 “대마도 즉 일본의 대마주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나오니 어찌 대마도를 일본 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대마도는 우리 땅임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쓰시마 섬’으로 불리게 됐을까?
▲ 대동여지도에 조선 영토로 그려져 있는 대마도. ⓒ뉴스천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국의 왜구들이 살고 있는 대마도를 예속화하기 시작했다. 조선전기의 대마도가 ‘조선 측의 대일 외교 창구’였다면 조선후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조선 외교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1592년 일본군은 대마도를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7년간의 전쟁 후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대마도는 ‘쓰시마 섬’으로 변했다. 이때부터 조선의 대마도 영향력은 약화된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기 때문에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도 있다. 고성 향토사학자 김화홍 씨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고증자료 65건을 찾아냈으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역사적 실증으로 본 대마도도 한국 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역사라는 것은 실증적이고 고학적인 데이터가 없이는 말 못한다”면서 “일본 천왕 그 어떤 사람 앞에서라도 자신 있게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씨는 또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행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실 일본 사학자들도 독도가 자기 영토가 아니라는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없는 것도 일단 우겨놓고 이것을 국민 여론화 시킨다”며 “여론화 시킨 것을 정책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 희망을 쏘아 올리자!
법의 잣대로 판단해 보더라도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주장이 전혀 억지스럽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점에 대해 강효백(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국제법상 우리나라가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주인이 없어야 할 것’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해야 할 것’ ‘실효적인 점유가 존재할 것’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대마도의 경우 역사적 사료를 근거할 때 일본 고유 영토가 아니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우리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대마도를 불법 점령한 것에 불과하므로 일본이 대마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우리나라는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1870년대에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삼킨 것이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분명히 함으로써 두 번째 요건도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지론이다.
세 번째 요건 역시 “대마도에 대해 조선이 펼친 정책이 변방에 살고 있는 주민을 위한 ‘공도(空嶋) 정책’ 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불법 점유 전까지 실효적 지배를 포기한 것이 아니며 조선의 분명한 정책 하에 지배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충족된다”고 강 교수는 밝혔다.
그러나 국제법상 일본은 국제법상 악의(惡意)의 역적점유(逆的占有)에 의해 대마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고 현재 1951년의 대일 평화조약과 1952년의 평화선의 선포 이후 한국은 일체의 대마도에 관한 국가주권 또는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어 법적으로 되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
강 교수는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국제법상 시효에 의한 영토취득제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며, 영토분쟁에 관한 중재 또는 국제재판에서 시효에 근거한 판결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시효에 의한 일본의 대마도 영토취득이 국제법상 인정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분명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우리의 조용한 외교정책은 더 이상 독도를 지키기 힘들다. 축구에서 ‘최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 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대마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 독도에 관한 이슈를 피하고 대마도를 반환 받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일본이 우리의 땅 대마도를 불법점유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살펴봤듯이 대마도는 지정학적·역사적·국제법적으로 우리의 땅이 분명하며, 우리는 대마도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일본에 반환을 요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다. 6·25전쟁 이후 독도문제만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대마도에 관한 증거자료와 연구가 일본에 비해 미미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근우(부경대) 교수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료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하다. 우리에게도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일본인이나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며 “현재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은 자료를 축적하고 당시 일본인들은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하였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의 생각만 관철시키려는 무모함을 경계했다.
그는 “확실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리의 준비가 철저해야 하고, 최소한 우리 내부에서라도 논의가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선행 작업 없이 섣부른 주장을 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신인도나 신뢰만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랜 역사 속에 한반도와 끈끈한 정을 나눴던 대마도. 이제는 ‘남의 땅’이 아닌 ‘빼앗긴 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학자들의 철저한 연구와 함께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때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
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쾌도난마로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원래 영문학자였지만, 차음(借音)문자인 향찰로 쓰인 신라시대 향가 연구와 해석을 일본인 학자들이 도맡아 온데 분개하며 향찰 연구로 방향을 튼 분이었다.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 '쓰시마'
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땅인지를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어쨌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이기에 그렇다. 유사 이래 한국의 땅이었고, 지금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이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산문화원(원장 임영주)은 19일 오후 3시 창원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초청특강'을 열고 '대마도를 우리땅으로 표시한 새로운 일본 고지도'를 발견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박물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일본 메이지 유신의 인물과 풍경'전에 전시된 '일본 지도'.
이 지도는 영국 공사관으로 일본으로 파견돼 오랫동안 일본 막부에서 일한 오르코크가 1860년에 그렸다. 이 지도가 주목받는 이유는 1860년대 당시 대마도가 대한해협(STRAIT OF COREA)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실제 지도를 보면 대마도가 대한해협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대한해협이 현재 부산과 일본 규슈연안 사이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며 "현재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대한해협은 대마도에서 우리나라 사이에 있어야 하고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연안은 쓰시마 해협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마도가 대한해협이라 표기된 우리나라 연안과 일본 규슈지역 사이에 있는 것은 이 곳이 명백한 우리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임 원장은 또 "지도에는 대마도와 규슈연안을 동한국해(EAST COREA STRAIT)로 표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현재 이 곳을 '현해탄(玄海灘)'으로 부르며 영자로 'KENKAINADA'로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런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연안과 일본 규슈 연안을 대한해협으로 표시한 내용으로도 대마도는 우리 땅으로 볼 수 있는데, 대마도에서 규슈 연안을 현해탄이 아닌 동한국해(EAST COREA STRAIT)로 표기한 점 또한 대마도가 명백한 우리 영토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날 초청강사로 온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역시 "이번에 보게 된 '일본지도'는 영국 등 서양에서도 대마도를 명백한 우리 영토로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한편, 마산문화원은 지난달 26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미노미공민관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 지도는 마지막 날 일정으로 하기시 박물관에 가게 된 일행이 전시된 지도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이번에 알려지게 됐다.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스스로 확인하는 일본지도가 독도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독도박물관 이승진 관장은 18일 "일본이 만든 조선국지리도 가운데 팔도총도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 지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지도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현존하는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고 이종학 초대박물관장이 기증한 이 지도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이 관장이 몰래 촬영한 것이다.
조선의 섬과 팔도만 그린 이 지도는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함경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등 조선 팔도와 함께, 섬으로는 동해에 우산도, 울릉도, 남해에는 대마도, 거제도, 제주도 그리고 서해에는 진도, 흑산도, 군사도, 강화도 등이 조선 땅 으로 명시돼 있다.
"이 지도는 현재 발견된 일본 지도 중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로 일본 스스로도 대마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 관청이 허가를 한 지도에 대마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명시한 일본 고지도가 발견됐다.
이교희씨(73·대구시 동구 효목동)는 19일 1874년 일본 관청의 허가를 받아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 오기 조선국 세견 전도(八道 五畿 朝鮮國 細見 全圖)'를 영남일보에 공개했다.
이 지도는 조선 8도를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등 8가지 색상으로 구분해 놓았으며 울릉도의 명칭은
지금과 동일한 울릉도로, 독도는 우산도로 표기하고 있다. 또 지도상 독도가 울릉도 서쪽에 표시돼 있으나 이는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는 일본의 관청이 허가했다는 뜻의 '관허 명치 7년 제1월'이라고 표기되어 1874년(명치 7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씨는 이 지도를 중학교 1학년 때인 1946년 대구시 중구의 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며 "지금까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올 때마다 이 지도를 펼쳐보았는데 일본은 이미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해 놓고서도 지금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마도는 조선땅' 1400년대 제작 중국 고지도
일본, 대마도가 조선 땅이란 공식지도-문서 은폐
미국과 협상에서 국제공인지도로 활용, 미국-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 땅"
최종편집 2011.05.11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한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이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한 발언 중 ‘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93)는 1832년, 삼국접양지도를 만든다. 이 지도의 해설서가 삼국통람도설이다.
하야시 시헤이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대마도-독도가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자료사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는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 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 (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해설서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 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표기된 위조 지도.@자료사진
▲일본 극우단체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조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자료사진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 (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현해탄 위치를 대마도 아래 이끼섬 남단으로 표기한 1855년의 미국 지도.
김 대령은 “한-. 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日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김 대령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 명쾌한 근거를 제시한다.
어느 지명을 정할 때에는 그 유래나 산물, 소재(素材), 생김새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가령 대마도(對馬島)를 일인들이 ‘츠시마’라고 하는 것은 그 섬이 두 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두 섬’이라 한 데 대한 일본식 음사(音寫)라 하겠다. ‘두’의 일본음은 ‘츠’가 된다. 가나의 ‘다디두데도’를 ‘다지츠데도’로 한 것과 같이 ‘두’를 ‘츠’라고 한 것이다.
‘섬’의 음사는 두 음절로 바꾸어 ‘시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는 곧 우리 말의 ‘두 섬’에 일본식 음사일 뿐이다. 서울에 ‘뚝섬’을 독도(纛島)라고 표기한 것은 한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뚝’을 쌓아 그 지역이 ‘섬’과 같이 되었다는 유래를 나타낸 말이다.
독도는 한자로 獨島라고 표기하지만, 작고 큰 섬으로 된 독도가 홀로 선 섬이 아니므로, 그것은 ‘돌섬’이란 뜻인데, ‘돌’의 경상도 방언이 ‘독’이므로 한자음을 취해 獨島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소재에 입각한 이름이다. 죽도(竹島)라고 하면 대와 관련이 있어야 할 텐데, 독도에서 대를 어찌 했다든지, 바위섬에 대가 살 수 없어 지금도 대를 볼 수 없으니, 竹島라는 명칭은 가당치도 않다.
따라서 ‘다케시마(대섬)’는 독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명이므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 ‘다케시마’는 ‘독도’가 아니므로 딴다리를 긁는 셈이다.
(이응백·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1951년 美국무부 외교문서에 명시
입력 : 2005.04.10 17:01 / 수정 : 2005.04.10 17:01
한국은 지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이 조약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는다는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미국측에 공식 요구했던 것으로 9일 밝혀졌다.
연합뉴스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있던 시기인 지난 1951년 4월27일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의 ’영토’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은 정의가 영구적 평화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대마도의 영토적 지위에 대한 완전한 검토를 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역사적으로 이 섬은 한국 영토였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적, 불법적으로 점령당했다”고 말했다.
이 문서는 또 “(초안의) 5번째 문단(paragraph)에서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 절반과 모든 부속 도서 그리고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주도록 명령받는다”고 돼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사실을 고려해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말했다.
당시 양유찬 주미대사는 그로 부터 약 3개월 뒤인 7월9일 국무부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 대사를 만나 대마도는 당연히 한국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마도가 한국에 귀속될 것인가를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덜레스 대사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평화 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답변,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었던 사실은 익히 알려졌으나 한국 정부가 국제적인 조약에 명시하도록 공식 요구한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워싱턴=연합뉴스)
(연합뉴스) 2011/5/11
김상훈 대령, ’삼국접양지도’ 원본 내용 공개
일본이 1860년대 국제공인 고지도를 통해 대마도(對馬島. 일본명 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점을 일본 정부 스스로 제시해 국제 공인을 받았던 지도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이 이날 공개한 ’삼국통람도설’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가 1785년 작성한 책으로 일본과 그 주위 3국(조선, 오키나와, 홋카이도),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담은 ’삼국접양지도’ 등 5개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1860년대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미국과 분쟁하던 당시 독일의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가 번역한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지도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 영토라 규정했지만,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적었다. 삼국접양지도는 과거에도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인용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인용된 자료는 원본이 아닌 흑백 필사본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대마도는 색을 달리해 일본령으로 분류했다. 김 대령은 “과거에 공개된 필사본은 흑백이라서 대마도의 영토 구분이 어려웠다”면서 “원본은 분명히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본은 독도연구 전문가인 한상복 박사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 대령은 이 지도를 국회도서관 독도특별 전시관에서 찾았다고 설명했다. 김 대령이 대마도 연구에 천착하게 된 것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서 연수시절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저서를 접하면서부터다. 이 전 대통령은 1948∼1949년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바 있다. 김 대령은 “이 전 대통령의 요구는 아직도 타당하다”면서 “일본과 영토문제는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까지 확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0/6/9
현정스님의 ’일본표해록’ 처음 번역, 출간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이 10일 간행할 예정인 ’일본표해록’은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증언을 담은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전남화순에 있는 쌍봉사의 화원승(畵員僧)이었던 풍계(楓溪) 현정(賢正)스님이 쓴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 표류해 7개월여를 지냈던 기록을 담은 것이다. 현정 스님은 1817년 말에 해남 대둔사의 요청으로 경주에 천불(千佛)을 조성하려고 불상 768위를 싣고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표류하게 됐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인들의 풍습과 조선인들에 대한 생각과 태도 등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지금 봐도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다. 가령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조선인의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내용이나, 일본인들이 조선을 ’부처님의 나라’로 여기고 중국인들보다 더 극진하게 대접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왜녀가 우리나라 사람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나라에서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왜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자 한다. 그 사람들은 이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정을 통하면 그 여자가 스스로 관부에 가서 말한다. 관부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출산할 달수를 계산하여 아이를 낳으면 관에서 돈을 준다.”(54쪽)
또 대화할 때 ’일본’이라고 말하면 좋아하고 ’왜(倭)’라고 말하면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현정스님은 대마도를 거쳐 귀국했는데, 이 대목에서 대마도인들이 “우리도 조선인”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가 대마도에 도착하자 대마도인들이 환영하며 “우리도 조선인”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보기에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조선어가 능했으며 한번도 일본을 ’본국’이라 말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1818년 1월 조선인 표류민을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는 일본 화가 우키다 잇케이(浮田一蕙)의 그림 ’조선표객도’가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 현정스님의 이 글의 신뢰성을 더한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연합뉴스) 2009/10/29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 마산서 공개
대마도(쓰시마.對馬島)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옛 지도 2점이 처음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외국대 일본어학부 김문길 교수는 28일 경남 마산문화원에서 열린 ‘대마도 고지도 전시회’에서 대마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여지도(對馬與地圖)’와 사본을 전시했다. 대마여지도는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인 모리고안(森幸安)이 에도(江戶) 시대 막부의 명을 받아 제작한 뒤 공인을 받은 것으로 현재 원본이 교토 기타노덴만쿠(北野天滿宮)에 소장돼 있는 것을 김 교수가 찾아냈다.
2003년 출간된 모리고안 지도(森幸安地圖)에 수록된 이 지도에는 ‘부시준조선국지지례칙부향군령지470리(釜示准朝鮮國地之例則府鄕郡令之470里)’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대마도의 부ㆍ향ㆍ군 모든 법칙은 조선국 부산에 준한 것이다.거리는 470리다’라고 풀이된다. 김 교수는 “지난 여름 일본에서 이 지도를 찾아냈는데 사본으로만 볼 수 있어 아쉬웠지만 일본의 지리학자가 공식적으로 직접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은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김 교수가 직접 확인해 사본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지도에는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7年戊申倭置營於此島)’라고 적혀 있다. 이 글귀는 ‘대마도는 원래 신라땅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일본인)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이 지도는 동래부 기장현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대마도를 지금의 부산 동래부 기장현에 예속된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오후 마산문화원 초청으로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동북아에 있어서 대마도 영토문제 연구’를 주제로 특강에서도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의 실체를 알렸다. 김 교수는 ”역사를 되짚어 각종 자료와 고증을 통해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그 땅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후세에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대마도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2005년 ‘대마도의 날’을 조례로 제정한 마산에서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 지도를 처음으로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고토 대마도에 대한 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2008/7/17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포함된 우리나라 고지도가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청주의 이대성(48.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씨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를 17일 공개했다. 이씨가 공개한 지도는 당시 세계지도 격인 천하총도와 중국 전도, 조선을 8도로 나누어 한지에 인쇄한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8도 지도 중 강원도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아래쪽에 독도를 우산(宇山)으로 표기해 놓았으며 경상도 지도에는 부산 아래에 대마도가 포함돼 있다.
▲ 청주의 이대성(48.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씨가 공개한 조선 고지도. 이 지도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독도는 강원도 지도편에 대마도는 경상도 지도편에 포함돼 있다.
이씨는 “5대 할아버지 때부터 다양한 서책과 함께 이 지도가 전해져왔고 그동안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며 “최근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상태 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장은 “이 지도는 조선 초에 처음 만들어져 계속 보충해 온 많은 지도 중의 하나로서 지도에 표기돼 있는 지명 등을 볼 때 영조 때인 18세기에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3천여 종의 지도에는 모두 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돼 있어 독도가 분명히 우리 땅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며 ”대마도의 경우도 행정력이 미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식 속에서 조선의 땅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경상도의 지도에 항상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입력 : 2008.07.17 21:09 / 수정 : 2008.07.1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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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5/3/17
日총련발행 古지도 '대마도 독도 조선땅' 명기
입력 : 2005.03.17 10:55 / 수정 : 2005.03.17 11:01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출판사가 발행한 ‘최신 조선지도’(1999년 발행)는 울릉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기한 고지도를 수록했다. 이 지도책이 ‘여러가지 옛지도’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조선시대 지리서인 팔도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는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표시돼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출판사가 발행한 `최신 조선지도'(1999년 발행)는 울릉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기한 고지도를 수록했다. 사진 왼쪽은 팔도지도(조선시기) 오른쪽은 팔도총도(1530년) /연합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중종때 다시 만든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발간)의 팔도총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고 팔도지도에도 역시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돼 있다. 대외홍보지를 발간하는 북한의 조국사(祖國社)와 백과사전출판사, 평양정보센터 3개 기관 협조로 만들어진 이 지도책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와 함께 외국의 고지도로 기원전(B.C) 500년께 제작된 헤카타 이오스 지도, 서기 150년께 제작된 톨레미 세계지도도 수록돼 있다. (서울=연합뉴스)
대마도는 잃어 버린 우리영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2년에 제작된 지도로서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라고 한다. 국내에는 인촌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류꼬꾸대학 소장본이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가 한반도를 받쳐주고 있다 독도박물관 이승진 관장은 지난달(2008년 10월) 18일 "일본이 만든 조선국지리도 가운데 팔도총도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힌다.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스스로 확인하는 일본지도가 독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위 지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지도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현존하는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고 이종학 초대박물관장이 기증한 이 지도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이 관장이
몰래 촬영한 것이다
대마도는 잃어 버린 한국 땅 18세기의 독일지도이다 동해를 한국해(Merde Coree MEER VON KOREA)라고 독일어와 불어로 표기되어 있으며 독도는 물론 대마도가 당시엔 조선땅이었다 (지도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다. 대한해협과 독도 부근의 빨간색 라인은 18세기의 독일지도에 없는 것을 이 글을 올리면서 알아보기 쉽게 그은 것) ↓
빼앗낀 우리의 땅.대마도 [오른쪽 지도는 대동여지전도(1860)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오른쪽 아래의 섬이 조선의 섬 대마도(쓰시마)이다. 잘 알다시피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49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위의 내용들은 놓고 볼 때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 실성왕 7년편과가락국기 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편년 가락국기 실성왕 7년편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이 밝혀졌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말의 두 섬이 두시마,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이다.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 고려시대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슬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
·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
·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켜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라!
일본이 한국 고유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자료보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더 많을 것이다.
일본 자민당의 영토특명위원회 소속 극우 의원들이 울릉도 방문 목적으로 김포공항을 도착하였다. 그동안 수차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방문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일본 정부에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방문을 취소하라고 공개 요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극우 의원들은 소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 애국시민단체들의 저지와 정부의 입국불허로 인하여 공항안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생쇼를 하다가 우리나라 비빔밥을 시켜 먹고 우리나라 김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9시간만에 돌아갔다.
아마 일본 극우 의원들은 김포공항에서 돌아갔지만 자기들이 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자부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들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한국 김포공항에서 주장을 하고 생쇼를 한 것을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간 다음에 일본 정부는 국방백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7년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의 환상을 갖게 만든 장본인이 김대중이다. 김대중이가 독도지역을 일본과 공동으로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공동수역으로 합의를 해주므로 인하여 독도를 일본이 더욱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일본과 김대중이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지역을 중간수역으로 정하여 공동수역을 할 수있는 지역으로 합의를 해주므로 인하여 일본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속히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한다고 일본측에 전달해야 한다.
정부가 속히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시키고 독도를 우리의 전관수역으로 환원시켜서 독도지역에서 우리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독도 주변에 일본 어선이 나타나면 불법 어업으로 체포하여 영해침범으로 처단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국방백서에 맞서서 우리 국방백서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면서 우리 고유 영토임을 역사적 자료를 인용하여 밝혀야 한다. 정부가 독도 문제에 대하여 일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표시하는 방법은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대마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어서 대륙붕 7광구도 우리지역으로만 편입시켜야 한다. 일본이 우리의 동맹국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웃이 울타리를 넘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 이웃간은 이미 금이 간 것이다.
일본이 국경선을 넘어서 우리 고유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조폭수준의 강도짓을 하려는 일본은 우리의 동맹국은 아니라고 본다.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나라가 동맹국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동맹국의 영토를 침탈하려는 일본의 행위는 이미 동맹국의 지위를 상실한 나라이므로 일본을 우리의 동맹국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이제부터는 강력하게 해야 한다. 광복 후에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까봐 일본이 상당히 노심초사 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일본은 대마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고등학생들도 독도와 대마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알고 있는 학생들은 얼마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대마도를 우리 국방백서에 우리 영토임을 주장해야 한다.
일본의 독도 침탈 저의가 드러난 이상 우리도 대마도를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 대마도는 교통의 요지이다. 땅은 척박하고 쓸모없을지 모르나 우리 동해의 관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수상 교통요충지이다. 우리도 더이상 당하고만 있지 말고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차분하게 가동해야 한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다시 편입시키는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정부는 독도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할 때마다 왜 말로만 강력하게 대응만 한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도 저들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하면 할 수록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켜 나가야 한다.
첫댓글 목향 이가 자료를 많이 모았네 ~ 잘 본다 그러나 지금은 일 본 땅으로 되어 있는 엉뚱한 나가사키 현에 붙여 놨네 49,5키로 바다밑으로 ~~~거제도 까지 터널 을 뚫 을 계획이 되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