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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루카 17,1-6
내가 용서 안 하면 그 사람을 지옥에 버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제 용서로 나아갑니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처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세 주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남을 죄짓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군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용서가 안 되는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승영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강한 신념과 이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친구이자 상관인 태정을 만납니다. 태정은 군대 시스템에 적응한 선임으로서 친구인
승영을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승영을 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임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승영은 갈등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군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태정이 한 것처럼 선임에게는 복종하고 후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후임이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할 때 승영은 자신이 살자고 후임을 때리고 후임은 자살합니다.
승영은 본래 군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정이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태정은 밖에서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었듯이. 승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죽은 후임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깨고 자신을 용서해 주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전에 락 토마스(Rock Thomas)의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정을 구걸하였습니다.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죽도로 일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와 세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은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자라고 여기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야근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하루에 이 말을 500번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가슴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용서로 주어집니다.
믿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복음: 루카 17,1-6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1. 11. 월)(루카 17,1-6)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1-6)”
1)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라는 말씀은,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세상 사람들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불행하여라.’는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 즉 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 나의 말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정말로 ‘큰 죄’이고, 그 죄를 짓는 자는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이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은 ‘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네가 보거든’이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입니다.>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형제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 또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마태 7,1-2).
루카복음의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마라.”,
또는 “회개하는 경우에만 용서하여라.”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형제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는 용서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루카 23,3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고(마태 18,22), 회개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입장’에만 두고서, 자기도 용서를 청하는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형제가 너를 꾸짖거든 달게 받아들이고 회개하여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죄를 짓고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한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또는 형제들은 그때마다 나를 용서해 주는데, 그렇게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말하는 그 회개는 과연 진정성이 있는 회개일까?
고해성사 5단계에서, 통회와 고백 사이에 ‘정개’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회개가 될 뿐이고,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물론 살다 보면 죄를 짓고, 또 본의 아니게 의지와 상관없이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일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떻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형제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4)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관한 말씀을 ‘용서’에 관한 말씀과 합해서 생각하면,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면,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
또는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하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더라도 구원받을 길이 열릴 것이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