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무'다 / 민명자
아파트 높은 층에서는 땅의 기운을 받기 힘들다. 거실에서 보이는 건 맞은편 동棟의 벽면과 네모난 창문들, 그리고 하늘뿐이다. 그나마 남향인 덕분에 실내로 들어오는 햇볕 자리가 계절의 변화를 어김없이 알려준다.
한여름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던 햇볕이 아기 손바닥만큼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하면 바깥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여름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가을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더 제 자리를 넓힌다.
지금은 거실을 다 차지하고 벽면까지 올라가 꺾은선그래프를 그린다. 그만큼 겨울이 깊다는 증거다. 이렇게 집안을 꽉 채우던 햇볕이 차츰 자리를 좁히면서 물러나기 시작하면 겨울도 기울어가고 봄기운이 돈다. 차면 기울고 성하면 쇠하는 우주 순환 질서를 햇볕 자리가 보여준다.
밖이 추울수록 햇볕은 더 따끈하게 느껴진다. 창가에 놓인 화분들이 그 온기로 몸을 덥히고, 햇볕은 크거나 작은 나무 그림자를 거실 바닥에 잔뜩 그려놓고는 미세한 공기들과 어울려 놀면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세계를 연출한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잠시 고적한 숲속에 든 듯하다. 화초도 바닥도 벽도 우드 커튼까지 모두 나무다.
저 화초들은 모두 어디서 와서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고 있는 걸까. 겨울철 선인장은 선생님께 꾸중 듣는 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다. 아무래도 저 먼 열사의 땅이 제자리가 아닐까 싶다. 뜨거운 태양과 모래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몸을 말리며 '생은 이런 거야'라고 읽어주는 게 제격이련만 겨울 햇볕을 동냥하면서 졸고 있다.
고무나무는 잘 생긴 청년처럼 제법 큰 키에 넓은 잎을 달았다. 그 옆에는 관음죽이 키를 맞추며 구애를 하듯 손바닥을 쫙 벌리고 서 있다. 큰 나무들 아래서 은둔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고즈넉하게 촉을 내리고 있는 난, 날씬한 몸매에 열 살 소녀처럼 하얗고 작은 꽃송이 몇 개를 수줍게 피어 올린 재스민, 모두 저 넓은 대지의 정기를 듬뿍 받으며 자유롭게 뿌리를 뻗으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데 관상용이나 공기 정화용이라는 명목으로 좁은 화분에 뿌리가 갇혀 수돗물을 받아먹으며 살고 있으니 고맙다 해야 할까 미안하다 해야 할까.
원목의 결을 그대로 살린, 키 작은 응접탁자는 쓸수록 반질반질 윤이 난다. 끼워 맞추거나 이어 붙인 흔적이 없는 직사각형의 길이와 폭과 두께만으로도 원래 몸통의 부피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우람한 몸통으로 하늘을 향해 꿈을 키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계톱에 밑동을 잘려 몇 등분으로 끊기고 켜켜이 쪼개져 우리 집으로 오기까지 나무가 겪었을 순간들을 생각해 본다.
만일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껍질이 벗겨지고 몸통이 잘리는 순간마다 이 세상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신음과 언어들을 쏟아냈을지 모른다. 나무는 직선의 시간을 지나면서 곡선의 나이테와 옹이를 만들어낸다. 촘촘한 나뭇결이 시간의 흔적을 말해주는 탁자 표면에는 커다랗고 둥근 옹이 두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원의 안쪽으로 갈수록 검고 깊은 색을 띤 옹이가 눈동자를 닮았다. 마치 나무의 정령이 응시하는 것만 같다.
어느 목공의 손길로 다리를 달았을까. 응접탁자는 언제든 무엇이든 기꺼이 받쳐줄 준비가 되어 있는 충복처럼, 양쪽에 튼튼한 버팀목을 달고 받침 자리를 마련해 준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올려놓는다. 쌉싸래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브라질이나 에티오피아, 또는 그 어느 먼 땅에 조상을 두었을지도 모를 원두의 모태는 관목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인간에게 발견된 야생 열매는 문명과 자본주의 아이콘의 길을 걸으면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이 한 잔의 검은 액체에는 커피 플랜테이션 노예의 땀방울과 해와 달과 바람과 비의 정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라고 노래하며 그대를 기다리고 속 태우는 여심女心이 있고, 영혼을 깨우는 '각성'의 에너지가 있다. 그러므로 커피는 많은 예술가의 사랑을 받아왔다.
커피 애호가 바흐는 커피와 연관된 세태를 풍자한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는 '리첸의 아리아'의 장에서 커피를 '수천 번의 키스보다 더 감미롭고 머스컷산 포도주보다 더 부드럽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발자크나 볼테르도 커피광이었다. 하루에 80여 잔 이상을 마실 만큼 커피를 즐겼다는 볼테르, 그만큼 대문호의 길은 치열하게 깨어 있는 영혼을 볼모로 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의 노고가 숨어 있고, 물과 불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이 한 잔의 검은 액체는 내 몸속을 흐르면서 영혼의 어느 구석을 맑게 깨칠 것인가.
찻잔 옆에는 신문도 있다. 신문은 작은 사회다. 앉아서 세계를 보는 눈이다. 책은 또 어떤가. 서재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종교, 철학, 예술, 문학, 온갖 책들이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빗장을 열어준다. 신문이나 책의 전신前身 또한 나무다. 책이 없었다면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영역은 훨씬 좁아졌을 게다. 호모사피엔스는 자아를 확립하고, 자아는 인간 존재가 거처하는 정신의 집이다.
이렇게 우리는 나무의 헌신으로 외부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실제 거주처로써의 집을 짓고 자아가 거주하는 정신적 집을 짓는다. 어디 그뿐인가. 가재도구와 소품에서부터 내가 입고 있는 면 옷에 이르기까지, 집 안에서만도 나무를 전생으로 하지 않는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그동안 나무의 헌신을 너무 무심하게 당연한 권리인 듯 누려온 건 아닌가. 우리는 나무의 생명을 보고, 마시고, 읽고, 쓰고, 입는다. 나무의 존재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오후다. 나무는 '나'가 '없는' 존재,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무無'의 존재, 그래서 나무는 '나-무'다.
나무가 나에게 외친다. '나는 무-다'
내가 말한다. '그러니? 그럼 나도 무-가 될 수 있을까?'
가당치도 않다고 나무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