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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문대이긴 하지만 합격소식을 들었다. 그 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개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학을 하고서 성급하게 군대를 다녀와 이제는 복학을 해야 하는 내년을 준비하기도 하며, 대부분 이 시간을 즐기고 다니던 그때였었다.
산책하기 좋은 공원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그 때.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약간 거만하게 서서 약속시간이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며 손바닥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부터 또각또각,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구두소리에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나를, 분명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바라보았고, 그로 인해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분명 그녀가 방금 전의 그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와 물었다.
“잠시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으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가 혹시라도 그냥 가버릴까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예.”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녀에게로 내밀자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듯 천천히 11개의 번호와 통화버튼을 누른 그녀는 가만히 액정만을 쳐다보다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애초에 받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받지 말라고 건 전화인지, 얼굴에 가져다 대지도 않고 그저 액정만을 쳐다보다가 종료버튼을 누르고 돌려주려는 듯 손을 뻗은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떨떠름하게 받아들고 잠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는데, 그녀의 말에 막혔다.
“아, 저….”
“내일 오전 11시. 전화주세요.”
아름답다. 예쁘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여자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뒤돌아서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고 난 하염없이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만을, 끝없이 도도해 보이는 저 뒷모습만을 바라보았고, 친구가 늦었다고 두 손바닥을 맞대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녁 사겠다는 말을 끝낸 뒤에도 그곳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식후 음주 파티를 위한 내기 농구를 하고, 약속에 늦었던 친구가 사주는 저녁을 얻어먹은 뒤에 낮에 본 그녀가 잊혀 지지를 않아 일찍 들어오고 싶어 빠져나오는데, 주인공인 내가 빠지면 내기 농구는 왜 했냐며, 자칫 말실수 한번 했다가는 주먹다짐도 불사를 것 같은 청춘의 친구들을 설득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몸을 던지고 눕자 온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썼다가 핸드폰을 꺼내 통화목록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번호였을까? 연락 주라고 했으니, 아마 그녀의 번호겠지. 전화… 해도 될까? 아니, 해야겠지? 아아-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지금은 씻고 자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피곤하고, 몸이 나른해졌는데 왜지? 잠이 안 오는 건.
꾀나 들뜬 마음에 늦잠을 자버린 데다가, 아침부터 지긋지긋한 두통이 나를 괴롭히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두통이 가시길 기다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아뿔싸, 그녀가 전화 하라고 한 시간이 코앞이다.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다행히 잠기지 않은 목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역시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거라고 오해해도 되는 걸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제 보았던 그 공원에서 한 시간 후에 만나자고 했다. 통화를 끊고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에 거울 앞에 섰다. 두근거린다? 당연한 것이다. 난 살아있으니까. 아마도 나는, 앞으로 행복해 질 것 같다. 그녀를 통해서.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이건, 내가 사랑을 한 다는 것. 겨우 딱 한번 얼굴을 보고, 단 두 번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사랑을 한다. 난, 어제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지는 데만 그 한 시간을 모두 사용했지만 그래도 차려입은 듯, 차려입지 않은 듯 보이려고 가볍게 입고나와 공원에 도착해 주변을 살폈다. 벤치에 앉아서 나를 먼저 발견한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성급하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멋지시네요.”
“안녕하세요. 그쪽도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그 당시에는 무서운 여자라는 걸 모르고 퉁명스레 말하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며 이름을 물었다.
“그쪽이라니요. 그거 실례인 거 아세요?”
“기분이 상하셨다면야 사과드리지요. 그럼 레이디-lady-의 이름을 제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장난기 다분히 섞인 나의 말에 그녀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강 아영이라고 해요. 당신은요?”
“저는 선우 재진이라고 합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을 텐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좋은 곳이라도 가실 까요?”
말을 마치고 팔꿈치를 옆으로 빼어 공간을 만들며 그녀의 옆에 서자 방금 전보다 더 아름다운 웃음을 간직한 채 팔짱을 끼며 그녀가 말했다.
“네, 좋아요.”
내일은, 그녀가 내가 사는 이 집에 놀러오기로 한 날. 평소에도 잘 어지르지 않는데도, 구석구석 혹시라도 먼지하나 보일까 쓸고 닦고 치우는 데만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이러는 시간도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그녀에게는 조금의 먼지도 흠으로 보일 까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고, 그건 내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확실한 것이며, 좋아한다는 거니까. 나도, 그녀도.
“내일 점심은 무엇으로 준비할까.”
청소하기 전에 나가서 장을 보고 온 터라 냉장고에는 요리 재료들이 가득했다. 무엇을 만들면 좋아할까. 행복한 상상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할 줄 아는 요리는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재료가 있어도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아, 이런. 뭐라도 배워 놓을 걸 그랬네. 여자가 남자 집에 와서 밥을 먹는데, 적당히 편안한 음식은 어떤 게 있지? 대충 한입 크기로만 해주면 되나? 으음, 튀김부류는 조금 싫어할까? 국수 같은 건, 정성이 안 들어갈 것 같잖아. 검색이라도 해 봐야 하나. 으음… 아, 진짜 모르겠어. 언제 집에 데려온 적이 있어야지.
컴퓨터를 켜고 다리를 꼬고 앉아 기다렸다. 인터넷에 접속해 좀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이 정도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식사 초대 음식에 대한 것을 어떤 것을 검색했다. 절대, 무슨 식으로 어떻게 검색했는지는 내 평생의 비밀이다.
스파게티, 스파게티, 스파게티, 스파게티, 스파게티… 에이, 관둬. 그냥 간단한 걸로 하자. 김치 볶음밥? 이번에 마트에서 사온 김치가 별로니까 안 되고. 오므라이스는 계란을 못하는데. 볶음밥, 야채 볶음밥을… 젠장. 다 거기서 거기다. 평소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봐도, 지금은 평소가 아니다. 난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 상대방이 그것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러는데, 평소에 자주 먹던 것 말고 어쩌다 가끔 하는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던데, 그럴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부엌에서 나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을 들자 부재중 통화와 문자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결국 내용은 저녁먹자고 밖으로 나오라는 것. 아까부터 전화 하던 놈들이 포기를 모르고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왔다. 아마도 소리 지를 테니 맘 놓고 지르라는 의미로 팔을 멀리 뻗고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아 귀청 떨어지겠다.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 거리에서도 은근 짜증나는 것으로 보아 위험했다. 번호 확인은 역시 하라고 있는 것이다.
“형님 바쁘시다.”
전화기 너머로 비웃는 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허파에서 억지로 바람 빼는 소리가 들린다. 어찌되었던 결국 이놈은 제 할 말만 하고 끊었다. 근데 솔직히 저녁 한번 먹는데 사람을 너무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뭐 언제는 안 그랬겠냐 만은. 여태 청소만 한 터라 나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안 나갈 수는 없으니 구시렁거리며 씻고 나갔다.
그녀가 오기 전에 김치찌개와 볶음밥 그리고 계란말이와 몇 가지 반찬을 꺼내 두었다. 아, 진짜 떨린다. 근데 식탁 위가 모양이 안 좋다? 기껏 해놔도 별로라니. 다음부턴 가볍게 먹어야 할지도.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왔다. 긴장된다. 얼른 걸어가 문을 열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오늘 날씨 어땠어?”
“날씨 좋던데, 그건 왜?”
그녀의 반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오늘 처음 봤는데 고작 그런 말이나 하냐는 듯 입술을 내미는 그녀의 외투를 받아 거실에 옷을 걸어두고 부엌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는 나로 인해 기분이 상했다. 이런, 시작부터 안 좋은데? 어찌 됐든 일단 저런 걸 보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감탄하는 모습에 왜 더 긴장될까.
“와, 이걸 직접 다 했어?”
엉뚱한 질문은 다 잊어준 듯 보이는 그녀 바로 옆의 의자를 뒤로 빼주며 말했다.
“일단은. 그러니까 빨리 앉아. 식기 전에.”
반대편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그녀가 볶음밥을 한입 떠서 먹었다. 내가 먹어 볼 땐 꾀 괜찮았는데, 어떠려나? 그렇게 잠시 우물거리던 그녀가 김치찌개도 한입 떠먹고 나서도 빙그레 웃고만 있기에 물었다.
“어때?”
“진짜 맛있어. 요리 잘 하네?”
“내가 요리는 좀 잘 하거든.”
“으이구, 하여간 칭찬 좀 해주면.”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다행이다. 좋은 분위기로 식사를 끝마치고 설거지도 마저 하고 뒤돌아보자 아직까지도 앉아서 날 보고 있던 그녀가 보였다. 조금 민망한 것 같기도.
“아영아. 산책 갈래?”
“산책?”
“응, 날씨 좋다며. 이럴 때 나가서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러는 거지.”
“에이, 그 정도는 집에서 해도 되잖아.”
“집에서 하면 제대로 했다고 할 수가 없잖아. 어서 가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면서 손을 잡았다. 쑥스러운 듯 처음엔 손을 빼려던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자 포기했는지 가만히 있었지만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어쨌든 일단 밖에 나왔고 날씨가 좋으니까 간단한 산책을 즐기다 어딘가에 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별로였었던지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기에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왜 그래?”
“오늘은 그냥 집안에 있고 싶어서.”
간단했다. 단순히 집 안에 있고 싶었다고. 그 당시에 나는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편이였기에 일리도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멍청했다. 그 뒤로는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그녀가 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두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거닐며,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포장마차 같은 곳에 들러 가벼운 간식거리도 먹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생각보다 행복했었다. 이 시간은 영원일 것이라고 믿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갑자기 맞잡은 손을 풀고 조심스레 달려 나가서는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던 듯 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하더니 쪼그려 앉아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가가 여성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감사의 인사를 대신하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살짝 난감해 하는 여성분의 모습이 보였다.
아차, 산책 중이었을 텐데. 방해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방해했다.
“아영아, 이제 가자. 일어나.”
한참동안을 그렇게 쭈그려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던 그녀가 일어나자 내가 놓았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미안한 마음에 여성분에게 사과를 하며 커피한잔 사겠다고 하자, 그 여성분은 정중히 거절하며 강아지를 산책시키겠다고는 가버렸다. 그 여성분이 가고 나서 조금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를 나무랐다.
“실례잖아.”
“하지만, 귀여운 걸.”
“후, 귀여우면 직접 키우세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그럴 수 없으니까 그렇지. 너무해.”
입술을 조금 내민 그녀가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무엇인가가 부서지지 않길 바랐다. 처음 만났을 때 본 것 같은 도도함만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랑했다. 그래서 앞서 가려고 하지만 손을 맞잡고 있어 앞으로 가지 못해 딱 한 발자국 차이로 앞에서 걷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서 속삭였다.
“사랑해.”
항상 그랬다. 나의 사랑에 보답해주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게 도도함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니까, 그녀니까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조금 슬퍼지더라도, 힘들더라도 참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게 조금씩 줄어들고 종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이 차가워서,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에 더 꼭 안고 있었더니 주변 사람들이 힐끗 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게 전부 느껴진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런 것에 마음 상할까 얼른 팔을 풀고 다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그녀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껴안은 걸 싫어했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고, 나 또한 보고 싶지 않은 하늘 따위의 농락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질 만큼 조금씩, 부수어지기 시작했다.
연락이 잘 안 되는 그녀가 나의 집에, 아니 이제는 우리 집에 들어와 오늘도 약간의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줄 알았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늘어가는 투정 아닌 불만과 불평. 약할 때에는, 그래도 처음, 초기에는 적어도 “기분이 안 좋아.” “마음에 안 들어.” 따위의 말만 꺼내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심할 때에는 나에게 주변에 있는 물건을 던지며 온갖 짜증과 불평, 그리고 진실을 꺼내놓았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다 잘 됐을 거란 말이야!”
주변에 있는 물건을 나에게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며 외치는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네가 그날 거기 서 있지만 안았어도 좋았잖아!”
“난 그저 친구를 기다린 거야. 넌 그저 지나가는 중이었고. 기억 안나?”
“네가 날 봐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대로 바보 같이 고개나 숙이고 있었으면! 그곳에 나와 있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구. 알아?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이라고! 처음부터 너 같은 거 없었으면, 없었으면!”
“강 아영, 말이 심하잖아.”
“이정도로 심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치욕스러웠는지 알기나 해?! 너 때문에 받은 수모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하냐고!”
“그만해!”
너무 힘들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나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망한 거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해졌다.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조차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난 행복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녀는 어땠을까? 아마, 그 때 길거리에서 껴안은 것, 가볍게 입을 맞춘 것 모두 싫어했겠지. 그녀는 쑥스럽거나, 나무란 것에 대해 삐쳤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것까지도.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지만, 다정해야 했었다. 미치도록 모순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한때는 나를 향해 웃어주던 얼굴로, 지금의 나에게 화내고 있는 그녀를 이끌고 처음 만났던, 만나지 말아야했던 이 장소. 공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데려와 그녀가 섰던 그 자리에서 팔을 놔주며 그녀가 갔던 방향을 향해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직까지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적어도, 내게 소중한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지 않아 화를,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
“가. 날 여기서 만났던 게, 네가 죽도록 후회될 일이었다면 다시 가라.”
그녀가 꾀 아팠는지 팔목을 만지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더 이상 거짓으로라도 행복하게 웃어주지 않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바보 같은 미련 때문에 미워할 수 없어서 슬펐다.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거야? 기껏 여기까지 끌고 와서는 뭐? 가라고?”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전부라고는 말 못할지라도, 나의 세상 속에 들어와 준 사람이었고, 그녀 덕분에 행복했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변해버린 건지, 여태껏 속여 왔던 건지 모를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났고, 진절머리가 났다. 아마, 그녀는 오래전에 나에게 진절머리가 났겠지.
“어, 이대로 가라. 넌 너대로 가고, 난 저기서 누구를 기다리고!”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나를 보는 시선은 다정한 척하는 연기가 아니라, 경멸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나에 대한. 그녀, 자신은 그 아무 잘 못도 없다는 듯이. 나를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처럼,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미쳤어? 그런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돼?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니?”
“아니, 진심이야. 지우고 싶다고 했지? 지워, 그걸 지우고 지금 이거라고, 이거라고 해!”
“너, 미쳤어.”
이미 여러 가지 문제로 지쳐있을 그녀가 먼저 지금의 내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래,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부정하고 싶지만, 긍정하게 되어버리는 그 사실을. 날 미치게 만든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도. 그래서 더 지쳐버렸다. 그만하고 싶어, 그만하자. 난, 그만 할 수가 없어.
“나 미쳤으니까. 이제 이걸로 아무 일도, 그 무슨 일도 없던 일로 하자.”
“하.”
아무래도 지울 수는 없겠지. 넌, 나 같은 것을 가지고 놀기 좋은 한낱 인형정도로 취급해 버리고 잊겠지만 난, 미련한 나는… 꾀 오랜 시간을 네 흔적과 살아가야 할 테니까.
“이제 없던 일이니까 후회하지도, 아파하지도, 기억하지도 말자. 너도, 나도.”
네가 죽도록 후회했더라도,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
내 욕심일 지라도, 너의 웃음을 나만이 보고 싶었다.
나의 머리는, 나의 심장은, 하루 종일 너만을 생각하고, 너만을 원했고, 너만을 그리워했다.
내 미련한 가슴은, 너의 기억도, 나의 기억도 지워지지 않았으면 했다.
비록, 더 이상 아물지 못할 우리의 심장이, 아니 망가지고, 부서진 나의 심장이 돌아오지 못 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도, 너도 알고 있었다.
어느새 부턴가 버릇이 되어버린 신문을 보는 것과, 식탁에 올려놓는 두 개의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 젓가락. 무엇이든 너와 함께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하고 싶었다. 그만큼 너란 존재가 너무 컸다. 하지만 그만큼 작기도 했다.
사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지라도, 난 너에게만은 너만을 위한 단수이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단수로서 네 곁에 머물고 싶었다.
“보고 싶어.”
말을 걸어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서 거실로 나오자 조신하게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가 보여, 조용히 다가가 양 팔로 각각 그녀의 어깨 바로 옆 등받이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더라도 그녀가 사랑스러운 것은 변하지 않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간절하게 바라보아도 소용이 없다. 끝내는 참지 못한 눈물이 소파 등받이를 적셔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나의 현재는, 네가 잊고 싶어 하는, 잃어버린 우리들의 과거에 머물러 있으니까.
언제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과 막연한 슬픔 그리고 부서진 나의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까.
너와 나의, 아니. 나만의 과거에서.
네가 아직도 곁에 있지만, 없는 이곳에서 네가 거짓이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나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게 노력할 것이다.
나에겐 네가 곁에 있다는 착각과, 네가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이 과거 같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