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식생활을 위해서 옷 수선전문이라는 작은 간판을 주문했다.
의상실을 경영했던 언니 밑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집 골목 앞에 걸어놓은 조그만 수선 간판은 보는 이에게 크게 어필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실..골목도 좁았고, 골목안쪽을 들여다 보면 선뜻 들어가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초라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골목 앞 삼거리에 세탁소가 있었기에 대부분은 그곳으로 가져간다.
손님은 잊어 버릴만 하면 한사람씩 찾아왔다.
다행인것이 한번 고쳐가면 단골이 되어 주었고, 감사하게도 월 말쯤엔 몇명이 더 찿아와 주곤 해서 전
기세 물세는 밀리지 않고 해결하곤 했다.
그 또한 감사할 일이었다.
어떠한 환경일지라도 엄마로서 담대하게 감당하려 했지만,
무엇보다 매일의 끼니 해결이 젤 큰 과제가 아닐수 없었다.
남편은 툭하면 몇 날씩 귀가하지 않았고 식생활에 관해서는 책임감도, 별 관심도 없었다.
수선은 바지단 줄이는거, 아님 유행을 따라 폭을 줄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1건을 하면 작은 한되의 쌀을 살수 있었는데, 성미 떼기도 부족했고, 늘 밀가루, 라면, 국수로 끼니를 이어갔다.
쌀을 아껴서 성미로 정성껏 드리는것은, 온 가족의 건강을 위해 드리는 나름의 제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믿음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 건강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체험했기에
온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정성껏 성미를 드리며 하나님께 건강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 하는것이다.
밀가루나, 라면, 국수도 거의 외상 수준이었다.
몇 시간을 가계 주변에서 서성이며 망설이다 엄마로서의 용기로 겨우 외상을 하곤 했다.
물론 반찬은 없었다.
늘 쌀집 주인이 부러웠다.
쌀집 앞을 지날때마다 수북히 쌓여있는 쌀 앞을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윤기흐르는 흰 쌀을 보면,
아이들이 눈 앞을 가리고 엄마로서 마음껏 밥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서글프기만 했다.
먹을 수 있는데 못 먹이는 심정의 새로운 경험은, 있는것을 안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의 것이었다.
충분히 쌓여 있음에도 구입할 수 없는 빈궁함 또한 쉬 대책을 찿을 수 없는 난감한 과제였다.
"아버지 하나님!! 저기있는 20k 쌀 부대를 3개만 쌓아놓고 살았으면 원이 없겠나이다.!!"
쌀 집을 지나칠 때마다 져린 가슴으로 아뢰는 한스런 탄원이 되곤 했다.
그날도 국수를 삶아서 소금에 간을 맞춰 점심상을 차렸다.
물론 반찬 하나 없는 밥상이었다.
발음도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아들(말을늦게한 편 이었음)이, 똑 바로 잡지도 못하는 저분질로
국수 가락을 집어 올렸다 흘려 내렸다 하면서 썩 먹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밥, 주세요.”
몇 날을 반찬 없는 밀가루 식단이 싫었는지 밥을 찿는 아들에게
미안하기도하고 가슴도 아리고해서 뭐라 말을 못하고 있는데, 아들이 엄마의 대답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나는 감정을 조절하며 확신 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 알았어, 배고프니까 어서 먹어, 밥 해줄께~”
두 아이는 시장기로 마지못해서 먹는것 같았다.
딸아이와 다르게 아들은 몇 번 먹는 시늉만 하더니 그냥 남긴 채로 상을 물리고 쥔집 아이와 어울려서 밖으로 나갔다.
상을 물리고 방 청소를 하는데, 서글픈 감정에 복받쳐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변함없는 남편과 환경을 바라보니 순간 막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고, 환경도 나아질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뚫린 곳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었다.
그래도 위의 아버지가 계시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버지하나님,
저를 사랑하시어 귀한 자녀들을 선물로 주셨는데, 엄마로서 부족하기만 하나이다.
아버지! 아이들에게 밥을 해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옵소서.”
그 순간, 세미한 응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일 주리라~”
“아버지 하나님,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말의 의심이 없는 믿음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믿음엔 아름다운 기다림도 가미 되어진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응답엔,
바로 해결해 주시는 응답도 있고,
다음날 해결해 주시는 응답도 있고,
미래에 이루어 질 일을 미리 당겨서 해 주시는 응답도 있고,
또 적절한 시기도 기간도 필요한, 긴 인내가 요구 되어지는 응답도 있다.
실수 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응답은 반드시 이루시는것을 체험한다.
이튿날,
동사무소 스피커에서 주민세 내지 못한 사람은 당일이 마감이니 시간안에 내달라고 한낮동안 몇 번을 일러준다.
나 역시 미납상태 이기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일상 천원의 여유도 없이 근근히 살고 있는 우리에겐 당시 오천원은 큰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누구에게 빌릴 수도 없는 노룻이었고, 못 들은 채 안 낼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나절 내내 신경을 쓰며 지내다가 결국 동회장을 만나서 사정을 말하고 면제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편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합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동 회장은, 당신을 찿은 사정을 듣고 나서는 잠시 의미 있게 쳐다보더니..
'동사무소 20년 세월에 이렇게 정직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 하듯이 말한다.
안내면 안냈지 면제받기 위해 찿아온 사람은 한명도 없었단다.
동 회장님 나름의 직업적인 보람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끄덕 하더니..곧 사회담당을 불렀다.
나의 경우가 왜 영세민(생활 보호 대상자)이 안됐는지 살펴보고
영세민으로 돌릴것을 지시하고서 지하 창고에 쌀이 있으면 주라고 한다.
사회 담당이 살펴본즉
두 부부가 동성동본이라서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호적상 한 가족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동회장님은 영세민을 만들기 위한 절차를 자상하게 인식시키곤 그렇게 처리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사회 담당을 따라 동사무소 지하로 내려갔다.
대충 상황판단을 한 사회 담당은, 딱하다는 듯이
아직 지급할 쌀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쌀이 들어오면 더 주겠노라며 있는 쌀을 다 털어 자루에 담았다.
10kg 정도였다.
보리쌀도 15kg 정도 담기에 두 가지를 다 주는 줄 알았는데, 느닷 없이 어느 것을 가져가겠냐고 묻는다.
나는 오래 생각할 것이 없었다.
끼니를 더 길게 유지 해줄 수 있을 것은 단연 보리라는 판단에 보리를 선택했다.
“저... 보리로 가져갈게요.”
“쌀도 없다면서요?”
“네, 하지만 보리가 더 오래 먹을 수 있잖아요.”
사회 담당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잠시 그렇게 웃으며 어이 없다는 듯이 처다 보고있던 그가,
담아놓은 보리 자루에서 보리를 몇 바가지 퍼내더니 그 안에 쌀담긴 자루를 집어넣었다.
“어떻게 가지고 갈래요?”
“음...사무소 문 앞까지만 들어 올려놔 주세요. 끌고라도 갈께요.”
그가 또 어이 없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동사무소에서 집까지 가는 지름 길은 비포장 길 이었다.
자루에 담긴 무거운걸 끌고 간다는 것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못한것이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처다 보던 그가 말했다.
“올라가 있어요 내 가지고 올라갈께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쌀자루를 사이에 두고 서로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막상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사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앞에서 미안한 마음으로 처분만 바라고 서있는데,
사회담당역시 전개된 상황앞에 어쩐가 보려는 듯 말없이 미소를 감춘채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 끌고 가야 돼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겸연스런 부탁의 말이었다.
그는 또 한번 소리내어 웃더니, 집에 가 있으면 사환을 통해 배달해 주겠노라고 말한다.
그렇게해서 방안까지 배달되어진 쌀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 순간, “내일 주리라.” 하셨던 응답이 생각났다.
“오! 아버지, 정말 오늘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은 혼합해서 밥을 지었지만 성미를 위해서 쌀을 아끼려고 보리로만 밥을 해본다.
처음 해보는 보리밥이어서 쌀밥 하듯 물량을 잡았다.
보리가 쉬 퍼지지 않아 수 차례 물을 더 부어 가며 씨름했던 그날,
끝내는 입 안에서 굴러 다니는 보리알을 씹기위해 오물 오물 애쓰는 아이들을 지켜 보며
참으로 미안했던...,어렵고 긴 식사시간 이었다.
보리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물 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써서 밥물을 잡아도 지난날 어쩌다 맛있게 먹었던,
모친이 해 주셨던 보리밥 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상태가 되곤 한다.
쌀이 전혀 섞이지 않아서 인지 충분한 물량으로 밥을 지어도
보리알이 탱글탱글 살아서 따로 노는, 알알이 탄력있는 보리밥 짓기였다.
그렇게 잘 씹히지 않고 겉도는 깡보리밥을 참기름도 섞지 않은 맨 간장으로 비벼먹는 식단이였다.
아이들은 작은 치아로 씹으려고 노력하며 싫으나 좋으나 허기를 면하려는 듯 마지못해 먹곤 했다.
그래도 한동안 끼니걱정 안하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것이 진정 감사할 다름이었다.
엄마로써 한켠에 자리한 쌀 자루를 볼 때마다 한결 맘이 편했다.
생활이 어떠하든 아버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더 새롭고 흥분이 되고 감사했다.
죽음을 딛고 일어선, 다시 허락받은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것인지 늘 마음에 각인 되어졌고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 없이 감사할 뿐이었다.
하나님께선,
언제고 부르면 옆으로 다가와 주시는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이시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자상하시고 친근하신 아버지로 곁에 계셨다.
시련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새록 새록 솓아나는 기쁨과 안위의 일상 이기도 하였다.
"내일 주리라~"
그렇게 그날도 기쁨과 환희로 감사의 날개를 한껏 펴고 지켜보시는 그분께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첫댓글 주님 섬김의 마음이 각별하신 듯 합니다.
누구에게나 고루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지만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어느 씨나리오 작가의 극단적이 죽음이 생각 납니다.
구하는 자, 찾는자, 문을 두두리는 자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선물이 아닐 런지요
집사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늘에서 보시고 내려주신 은혜를 축복합니다
사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염려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오늘도 감사할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