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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루카 17,7-10
행복보다 겸손
저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그 방향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본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니 난처합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종에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자신에게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일하며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인은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주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서열을 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에서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어서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죽고 맙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동생 타마르 때문입니다.
타마르의 이복 오빠 암논이 타마르를 탐하고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해 압살론은 타마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는 압살론을 유배 보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가 자녀였지만, 압살론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압살론이 죽었을 때 다윗은 한없이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나 타마르나 암논은 다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의 자비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 자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소금 광산을 지나 소금 사막을 넘어 소금 염전에 다다랐습니다.
염전 앞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멈칫하며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바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들어와서 보렴.” 그래서 소금인형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습니다.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이 녹기 전에 소금인형은 경탄하며 외쳤습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군!” 소금인형은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다가 아니면 소금인형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인형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다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론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의 목적이 겸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성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폭정대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정은 물론이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페룬(Perun)이라는 최고 신을 포함하여 여러 신을 숭배했는데, 그 신에게 특히 헌신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접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위엄을 본 신하들의 말에 그는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서기 988년에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 도시인 케르소네수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기 전에 눈병이 있었다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눈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블라디미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성인이 되었습니다.
압살론은 겸손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교만함으로 시작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각자 행복해지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겸손해지는 길을 택했던 블라디미르를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1년 동안 자신을 물었던 이웃집 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한 우리 안에 싸우도록 붙여놓았을 때 뭉치는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불행의 시작과 끝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행복과 천국의 길은 겸손임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루카 17,7-10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공동체 생활 안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자아 의식은 어떤 것인지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너무 지나친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나도 나를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모습도 정말이지 봐주기 힘든 꼴불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본인만 스스로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자화자찬한다면, 그 얼마나 웃기는 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균형잡힌 시선이요 한쪽으로 과도하게 지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자이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1. 12. 화)(루카 17,7-10)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1)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또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가 첫 번째로 원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고,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실격자가 되는 것, 즉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생활은 내가 살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나 자신이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고, 주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2)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종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로 표현하셨을까?
(1)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마치 종이 일하는 것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32)”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종’으로 떨어뜨렸고,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큰아들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일을 한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현실을 보면,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게 종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생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3)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내가 나를 위해서, 즉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또 나에게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을 우리가 먼저 고마워해야 하는데, 또 우리의 신앙생활과 회개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뻐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우리의 회개와 신앙생활을 고마워하시고, 먼저 기뻐하십니다.
<나를 식탁에 앉히고, 내 곁에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17장에 묘사되어 있는 주인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의 일반적인 주인의 모습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를 크게 기뻐하면서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이 바로 하느님의 심정입니다.
4)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착하게 살아라.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자주 말합니다.
자녀들은 아직 철이 없을 때에는 그 말을 ‘잔소리’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철이 들면 부모의 말이 진리이고, 그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잔소리’가 아니라, 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즉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진리’이고, ‘은총의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