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60년대 서울 당산동 야채시장, 비좁고 질퍽대는 시장에 배추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는 아주머니가 힘겹게 밀고 간다.
잠시 후 그 뒤에 별이 몇 개나 번쩍이는 육군 장군이 탄 검은색 고급세단이 나타난다.
시장 상인들은 저런 고급승용차가 지저분하고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이 야채시장에 왜들어 왔나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승용차의 뒷문이 열리고 정복을 입은 장군이 내리더니 앞서가던 배추 리어카를 끄는 사람의 어께를 낚아챈다.
“김 재 곤! 너는 이런 일 말고 국가를 위하여 할 일이 따로 있어!” 라고 소리치며 납치하듯 승용차 뒷자리에 태우고 사라진다.
시장 상인들은 왼 일인가 놀라 처다만 보고.
6.25 참전용사 육군대위 김 재 곤, 그길로 국방부 목록국 창설 멤버가 되어 도미한다.
그 한참 뒤에 은퇴한 이분을 내가 방위산업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모셔다 함께 일한 인연이 있고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내가 살고 있는 유성의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내가 가끔 마음이 허전할 때 찾아가 말없이 묘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오곤 하는데 이런 일들이 모두다 산사람을 위한 일일 터. 더구나 나 같은 무신론자 에게는.
전차병으로 참전, 함경북도 까지 진격하여 혹독한 겨울 추위에 전차의 캐터필러가 밤새 땅바닥에 얼어붙어 꼼짝을 못 하던 때에도 야전천막 속에 동양화 도구들을 펼쳐놓고 동양화를 그렸다니 그 치열함 이라니!
온 부대원들이 그때마다 “저놈 또 시작 한다!” 라고 혀를 내 둘렀을 정도라고 한다.
그 결과 국전(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에서 동양화 부문에서 입상을 하여 동양화가 가 된다.
나와는 많은 나이 차에도 개의하지 않고 서로 “코드” 가 맞으니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다.
내가 노란색을 좋아 한다고 노란 가을 국화가 있는 그림 옆에 “~ 오상고절이 너뿐인가
하노라“ 하는 한시를 써넣은 귀한 작품을 선물해 주시기도 했는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하는 그런 분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기도 하고, 세종문화회관의 참전 수훈자 모임에서 연금을 올려달라는 결의에 반대하며 “나는 살아남아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데 돈을 더 받겠다고?” 라고 소리치며 회의장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전화국에 전화를 신청하면 요즘엔 당일로 가설 되지만 그때는 3~4 년은 기다려야 할 때다.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보여주니 다음날 전화를 가설 해 주더라고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김 재 곤 선생님, 그런 분들이 요즘에도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또 한분.
나라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당시의 권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학교를 방문했다.
교무실에 교장이하 모든 선생님들이 숨소리조차 없이 긴장하여 모여 있다.
이후락 씨가 젊잖게 “뭐 내가 도와줄 일이나 건의할일이 있으면 말씀들 해 주세요” 라고 하니
감히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입을 열 처지가 아니라 모두다 말이 없다.
이때 유 장 득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대통령이나 외국 귀빈들이 올 때 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흔들게 하는데 학교 수업에 지장이 많다 이것을 없애 달라”
순간 교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후락 씨는 움찔하고 놀라는 기색 완연했다.
그러나 임자는 임자를 알아보는 법,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이후락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어색한 사태는 수습 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수업이 없으니 그런 행사를 좋아 했는데, 지금 북한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걸어서 퇴근하는 선생님을 발견하면 이후락 씨가 탄 검은색 찝차 는 삐익 하며 급정거를 하고 차에서 내려서 선생님께 정중하게 예를 가추고 는 했습니다.
유 장 득 선생님은 이북에서 악질 고위 보위부 간부를 유도로 습격하여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길로 혼자 남하하신 분입니다.
물리, 수학, 서양화 그리고 서예에 조예가 깊으셨고 사진에도 솜씨가 대단 하셨으며 유도선수이기도 하셨습니다.
휴일에는 학교 교정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밀짚모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 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몹시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유 장 득 선생님은 제 고등학교 은사님 이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찾아뵙곤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10분 쯤 전에 휴지를 2장 뽑아 드리니 1장이면 충분한데 낭비한다며 사모님께 호통을 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과연 선생님답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교직원 봉급을 계산하며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가장 불리하게 배정한 계산근거를 발견 하고는 교무실을 뒤집어엎은 일이며, 내 동창이 해병대에서 권총을 휴대하고 외출을 나와서 학교 교무실에 찾아와 “유장득 선생을 쏴 죽이려 왔다, 불러와라!” 하고 난동을 부리니 선생들은 모두 다 놀라서 도망가고, 유 장 득 선생님이 혼자 대면하여 사태를 해결한 적도 있었습니다.
미제 야전침대 마구리 참나무 각목으로 얻어맞던 것이 한이 맺혀서 일어난 해프닝 이었지요.
아 그때 기압으로 얻어맞기 전 그 긴장되던 순간 이라니 hi hi hi
유장득 선생님은 현직 교장으로 교감을 침대 마구리로 “빳다”를 친 기록도 가지고 있답니다.
이후락 씨는 돌아가시기 전 만년에 경기도 광주시 도평리에 도평요 라는 도자기 굽는 가마를 별장에 설치하고 취미생활을 했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면 문 앞에 “접근하면 발포 한다” 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숲이 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변했다. 권력도 그렇게 허무한 것을.
유 장 득 선생님은 돌아 가셔서 파주에 있는 동화가족묘원에 모셔져 있다.
부디 편히 영면 하시기를.
첫댓글 대단한 이야기.
그렇게 읽었습니까? hi hi hi.
노인들은 과거에 산다는데... 혹시 내가 "치매" 기가 있는것은 아니겠지요? 흥보 아우님!
대단하신 글솜씨.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자주 좋은 글을 올려주십시요.
재미 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냥 옛 생각이 나서 써 보았습니다. 내가 나이가 좀 많기는 한모양 입니다. 이런글을 쓰니 hi hi hi.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