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씨의 소설 [미안해요, 호아저찌]를 읽고 마음이 심란했다. 평소 내가 베트남에게 가졌던 아픔과 아쉬움을 이순원씨가 대신 이야기 주었던 것 같아 한편으로는 가슴 한 쪽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져 있던 혼란스러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혼란스러움의 강도는 이순원씨의 소설을 읽고 나서 더욱 깊어졌다.
호치민은 체게바라와 함께 혁명가로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다. 호치민은 1969년 79세의 일기로 미국과의 전쟁 중에 사망을 해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체게바라는 39세인 1967년 사망하였는데, 그 전에 이미 미국의 세력을 등에 업은 부패 정권을 몰아내는 쿠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뒤였다.
체게바라는 혁명의 달콤한 권력을 뒤로하고 미국과 부패 정권과 투쟁했던 볼리비아 반군의 지도자로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활약하다 농민의 신고로 잡혀 그날 총살 당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제국주의(미국)을 상대로 싸웠다는 것이고 그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호치민은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사망했고 체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직접 혁명에 뛰어 들어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가 두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약한 나라의 편에서 부패하고 강한 세력들과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싸웠던 것이다.
또, 두 사람은 죽고나서도, 호치민은 그의 작은 오두막에 신발 한짝과 책 한권을 남겼을 뿐이고, 체게바라는 총 살 당한 후, 그의 작은 베낭에서 비망록 두권과 책 한권이 발견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두 나라 베트남과 쿠바는 그 후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쿠바는 미국과 끝까지 타협을 않아 경제봉쇄를 당해 아직도 가난한 나라의 대열에 서 있다.
베트남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제 원조와 투자은행의 경제 협력을 받아들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비슷하게 가난했던 두 나라의 경제 규모는 앞으로 현격한 차이가 날 것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미국과 일부 선진국에 의해 주도되는 경제 성장이라는 개념이다. 그런 방식의 경제 성장 뒤에는 세계무역과 그것이 원인이 된 식민 전쟁이 숨어 있고 베트남은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가치를 버리고 또 다시 최악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적으로 보면, 무역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식량이나 에너지를 거의 자급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국제무역에 깊이 얽혀들게 된 것은 겨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세계 어디선가 일어난 사건이, 그 즉시 일상생활의 식품이나 일용품의 가격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른 바 ‘세계화’ 라는 현상은 최근 20 여년 이래의 현상이다.
따라서 무역은 원래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역을 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과학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역은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 또한 아니다. 리카르도의 비교생산비설은 무역의 현실을 논한 것이지 무역이 옳다는 것을 고찰한 것은 아니다. 고대의 스파르타나 현대의 부탄과 같이 국제무역을 거부하고 자급을 원칙으로 하는 나라도 있다.
무역은 필수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이다.
호치민과 체게바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https://band.us/@ssun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