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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무지로소이다
윤수일밴드 1집 - 떠나지 마/제2의 고향 (1981)
SIDE A
00:00 1. 떠나지마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03:57 2. 마지막 찻잔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09:39 3. 제2의 고향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13:45 4. 비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SIDE B
19:00 1. 당신은 나의 첫사랑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23:54 2. 호숫가 (윤수일 작사/윤수일 작곡)
27:47 3. 약속 (외국 곡) Eric Clapton - Promises
30:46 4. 침묵 (외국 곡) Rod Stewart - Passion
울산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윤수일은 5학년 무렵부터 자신의 친구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잡았다. 윤수일은 이후 인터뷰에서 “말없는 친구. ‘튀기’나 ‘양키’라고 놀리지도 않고 내 슬픈 마음을 달래주는 기타야말로 더할 수 없는 귀중한 친구가 됐습니다”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고교 시절 밴드를 조직하며 음악 생활을 시작한 윤수일은 펄벅 재단의 도움으로 울산공대 건축과에 진학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밴드를 하고 있는 혼혈 가수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한다. 그 밴드는 바로 골든 그레입스(Golden Grapes). 건축과에 진학한 건 당시 미국에서 건축 설계사로 있던 숙부가 권유했기 때문이지만, 학업을 다 마치기 전 가수로 진로를 택한 것이다. 결국 윤수일은 1975년, 펄벅 재단 고아원 출신의 함정필, 함중아 형제를 중심으로 신중현이 기획한 밴드 골든 그레입스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기타와 보컬을 맡는다. 이후 1976년 안타 기획에서 주최하고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며 가요계 정식 데뷔의 기틀을 마련한 후, 1977년 윤수일과 솜사탕의 유일한 음반에 수록된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히트시키며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MBC 인기가요와 TBC 베스트 세븐에 연 7주 이상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곡으로 이듬해 KBS-TV와 TBC-TV 최고 인기 신인상 수상을 수상했으며, MBC 10대 가수상 및 최고 인기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안타기획에 합류하게 된다.
안타기획은 최헌의 '오동잎'이라는 스매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70년대 중반 이후 불어 닥친 소위 트로트 고고의 유행을 견인했던 기획사다. 윤수일은 안타기획에 발탁될 때부터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부를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인터뷰에서 윤수일은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만, 어떤 신인 가수라도 최헌의 성공사례를 본다면 안타기획의 제안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대중의 취향을 꿰고 최헌과 윤수일을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트로트 고고의 젊은 작곡가 안치행의 히트 행진은 후속곡들로 이어졌다. 윤수일은 최헌과 힛트곡 경쟁을 하듯 '갈대'(1978), '추억'(1978), '나나('1979), '유랑자'(1980)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다.
1980년 가요계에는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 해금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조용필의 음악은 이미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상당부분 동떨어진 것이었고, 신중현은 대규모 밴드 뮤직파워와 함께 기존에 발표했던 '아름다운 강산'을 새로운 편곡으로 발표하며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또 다른 스타일로 돌아왔다. 혜성처럼 등장한 마그마가 유일한 음반을 내놓았고 역시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화려한 스테이지 매너와 기타연주로 주목받았던 작은거인이 국내 하드락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꼽히는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다. 산울림은 군에 갔던 김창훈과 김창익이 제대하며 완전체의 모습으로 정규 7집을 발표한다. 양병집에 의해 발탁된 동서남북은 프로그레시브락 경향의 음반을 발표, '망부석'과 '송학사'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김태곤이 세 번째 음반(1981년)을 통해 보여준 것 역시 국악과 접목된 프로그레시브락이었다. 하지만 마그마, 작은거인과 같은 대학가요제 출신 밴드들은 그 활동 영역이나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시인과 촌장, 동서남북과 같은 언더그라운드 출신 밴드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적었다. 메이저 가수에 속하는 김태곤과 조용필의 음반에서도 히트한 곡들은 락 스타일보다 트로트 성향의 곡이 주를 이뤘다. 그에 비해 윤수일 밴드의 첫 번째 음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별종의 음반이었다.
윤수일 음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도회풍'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특징은 윤수일 자신이 만든 곡들이 본격적으로 수록된 이 앨범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좋다. 피아노 연주와 스트링의 차가움이 격정적인 기타와 오르간으로 발전하는 '마지막 찻잔'과 1978년 발표한 '꿈이었나봐'의 간격은 가까운 듯 멀다. '제2의 고향'은 이 음반을 대표하는 히트곡으로, 두 번째 음반에도 한차례 더 수록되었다. KBS-TV '가요톱텐'에서 1981년 11월 10일과 17일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만큼, TV를 통해서도 자주 볼 수 있던 모습-노래하는 윤수일 곁에 선글라스를 낀 베이스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가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마이크를 향해 노래 부르는 장면-은 국내 밴드의 연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윤수일의 음악이 '도회풍'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지만, 또 한 가지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고독'이다. '도시 남자의 러브 에픽'이라 할 '비'는 빗소리와 천둥소리 효과음에 트윈 리드기타와 오르간의 블루지한 진행을 가지고 있지만, 가사에 등장하는 것처럼 '메마른 고독함'이 묻어난다. 그건 '도회풍'의 느낌과도 다름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윤수일의 음악은 고독한 도시 남자의 음악이다. 그리고 윤수일 밴드의 데뷔앨범은 윤수일의 이러한 음악성을 규정짓는 시작점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