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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감정의 정점이다. 사람들은 눈물을 보면 흔들린다. 극적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18살 소년 이형종(서울고)은 5월 3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제41회 대통령배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눈물도 흘렸다. 이형종은 그 눈물로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패전투수가 됐다.
빨간 알약과 9회말
제주관광산업고 김수완(18)은 4월 26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대회에서 순천 효천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작성했다. 이날은 하루에 노히트노런이 두 번 나올 뻔했다. 이형종은 이어 벌어진 포철공고전에서 8회말 1사까지 무안타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웃카운트 5개를 남겨두고 안타를 맞아 대기록을 놓쳤다. 이형종은 “타자가 직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변화구를 던질까 고민하다 직구를 고집한 게 안타가 됐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피칭은 눈부셨다. 22개의 아웃카운트 가운데 16개가 삼진이었다. 서울고는 이형종의 활약으로 5월 3일 결승전에 진출했다.
동대문운동장은 활기에 넘쳤다. 결승전에 올라온 광주일고 김경열의 어머니 정학순 씨는 “버스 24대를 동원해 학생과 동창들이 상경했다”고 했다. 서울고 김병효(40) 감독도 “우승하면 응원하러 온 전교생이 동대문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이벤트가 계획돼 있다”고 말했다. 베테랑인 KBS 유수호 아나운서도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대통령배 결승전이라. 감회야 언제나 새롭지. 지금도 결승전 중계를 하면 톤이 올라가.”
더그아웃에 있는 이형종의 얼굴은 밝았다. 피부가 유난히 하얀 이형종은 “우승 가능성은 100%입니다. 하던 대로 열심히 던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형종의 손바닥에 놓인 빨간 알약이 눈에 띄었다.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알약을 사탕처럼 씹어먹는다. 전장에서 장수가 적장에게 “나, 부상이요”라고 광고하는 격이다. 이 같은 지적을 하자 이형종은 뒤돌아서서 우물우물 약을 삼켰다. “저 녀석이 저렇게 순진해요.” 김병효 감독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팀의 에이스를 바라봤다.
알약의 정체는 진통제였다. 대회 전부터 이형종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왼쪽 골반을 받쳐주는 뼈가 아팠고 허리 근육도 좋지 않아 마사지를 받고 주사를 맞으며 대회에 나섰다. 이형종은 결승전 전까지 4경기를 치르면서 신일고와의 준결승전 147개를 포함해 20⅓이닝 동안 330개의 공을 던졌다. 그러고도 결승전 전날 밤 선발등판을 자원했다. 무리라고 판단한 김병효 감독은 “위기 때 (이)형종이를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 위기가 너무 빨리 왔다. 서울고는 1회초 3점을 먼저 뽑았지만 1회말 수비에서 선발 안성무가 1사 뒤 1점을 내줬다. 곧바로 이형종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나 공은 표적을 잃어버렸다. 이형종은 3회까지 4사구 7개를 내주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서울고가 7-6으로 앞선 6회말 이형종은 다시 등판했다. 마지막 카드였다. 9회초까지 9-8로 앞서며 우승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스트라이크존이 너무 좁게 느껴졌다. 9회말 첫 타자 정찬헌을 맞아 3구째 직구가 볼로 판정 받자 이형종은 눈을 크게 뜨며 불만을 나타냈다. 가까스로 버텨가며 2사 1,3루까지 갔다. 우승까지는 이제 딱 한 명의 타자만 남았다.
그러나 4번 타자 이철우는 동점 우전안타를 날렸다. 5번 조성진에게는 몸에 맞는 공을 내줘 2사 만루. 타석에는 6번 타자인 2학년 포수 윤여운이 섰다. 볼카운트 2-2. 이형종은 6구째에 프로 스카우트들이 최고로 평가하는 빠른 공을 던졌다. 그러나 지친 어깨와 무너진 폼에서 위력적인 공이 나올 수 없었다. 윤여운이 친 공은 끝내기 우전안타가 됐다. 10-9. 광주일고의 역전 우승이었다. 광주일고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뛰쳐나왔고 이형종은 마운드에 주저앉아 서러운 눈물을 뿌렸다.
“어떻게 결승전에서 두 팀이 19점을 냅니까. 고개 숙인 이형종, 안타깝습니다. 제가 눈물이 나올 정도입니다.” TV에서는 유수호 아나운서의 말이 결승타의 순간을 5초 간격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서울고 동문들은 심판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을 문제 삼으며 2, 3학년 선수들을 시상식에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 진통 끝에 시상식이 열렸다. 윤여운은 “이형종은 직구를 많이 던진다. 끝까지 직구만 기다렸다. 이형종도 좋은 투수이지만 난 잠잘 때도 누워서 타격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도 이형종은 더그아웃에서 코치들에게 안겨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는지도 모른다.
프로 그리고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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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다음날인 5월 4일 이형종은 안정을 찾은 듯 했다. 광주일고 타자 4명을 공으로 맞춘 점을 미안해 했다. "8회부터 계속 점수를 줘 이미 그때부터 감정이 올라왔다. 9회에 동점타를 맞자 참았던 감정이 폭발했다. 팀이 많이 앞서 있었는데 역전 당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내 몫을 제대로 못해 동료들한테 정말 미안했다.”
이형종이 밝힌 눈물의 이유다. 이어 이형종은 “홈페이지에 많은 분들이 찾아와 격려해줬다. 댓글이 천 개가량 달렸는데 '악플'은 두 개뿐이었어요"라고 웃었다.
LG행이 결정됐다고도 털어놨다. 총액 4억 5천만 원이었다. “대통령배 직전부터 아버지가 LG와 접촉했다. LG가 고교투수 최고대우를 약속했다." LG의 요청으로 5월 7일 신체검사를 받았고 정상 판정이 나왔다. LG는 5월 16일 이형종과의 계약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형종은 5월 15일부터 강동구청 부근의 재활센터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 크게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골반 근육이 아파 공을 던질 때 오른쪽 등근육에 통증이 느껴진다.
프로지도자들은 컨트롤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스카우트들은 스피드를 먼저 보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이미 시속 147km를 찍은 강속구는 이형종에게 LG의 1차 지명이라는 선물을 안겨 줬다. 그러나 숙제는 많다. 한 LG 스카우트는 "결승전 때 이형종을 보고 당황했다. 투구 폼이 많이 무너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형종은 이번 대통령배대회에서 26⅓이닝 동안 4사구 24개를 내줬다. 대회를 주최한 <중앙일보>는 이형종의 투구 장면이 담긴 사진을 실은 적이 있다. 이 사진에서 이형종의 고개는 왼쪽으로 크게 틀어져 있다. 투구의 축이 안정되지 않은 아주 나쁜 자세다. 한 스카우트는 “고개와 팔 사이의 각도가 매우 크다. 불필요한 힘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스카우트는 “스피드는 좋지만 제구력은 전국대회 수준을 100으로 할 때 70을 주겠다”고 했다. 대통령배 결승전을 앞두고 광주일고 허세환 감독은 “볼만 건드리지 않으면 이형종은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형종의 투구폼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김병효 감독은 “1학년 때는 제구가 잘 됐다. 투구폼도 예뻤다. 2학년 때도 잘 던져 1년 선배 임태훈(두산)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부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구속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형종도 "시속 150km를 던지고 싶었다"며 3학년 때부터 스피드에 집착하게 됐다고 인정했다. 좋아하는 투수도 삼성의 강속구 투수 배영수다. 이형종은 3학년 때부터 배영수처럼 투구 전 글러브 안에서 공을 살짝 튕기는 동작을 했다.
경기 운영도 아직 미숙하다. 이형종은 결승전 9회말 동점타와 역전타를 2-1, 2-0 등 모두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맞았다. 구종은 모두 직구였다. 이유가 있었다. 9-8로 앞선 9회말 2사 2루, 2번 허경민 타석 때 이형종은 새 볼로 바꾼 뒤 어이없는 폭투를 했다. 구종은 변화구였다. 이형종은 "주자를 3루에 두고 변화구를 던지기가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김병효 감독은 “벤치에서는 변화구 사인을 냈는데 들어간 공은 직구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형종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형종의 눈물을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가 내년에 뛰어들 프로는 냉혹한 세계다. KIA 김봉근 투수코치는 5월 15일 “부산 원정에서 그 경기를 봤다. 투수 출신으로서 안쓰러웠다. 내 가슴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이형종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코치는 그러나 "투수는 무조건 포커페이스여야 한다. 흔들리는 자세를 상대팀에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LG 유지홍 스카우트 팀장은 “지금 제구력으로는 1군에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김유선도 2군에만 머물고 있다. 유팀장은 "하지만 지금이 이형종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이형종을 중학교 때부터 지켜봤다. 이제 입단도 결정됐으니 더 나은 투구내용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종의 홈페이지에는 비틀즈의 ‘필요한 건 사랑이 전부(All you need is love)’와 가수 에반의 ‘남자도 어쩔 수 없다’는 노래가 흐른다. 그러나 이형종이 앞으로 사랑만 받고 마운드 위에서 어쩔 수 없어 한다면 곤란하다. 낡은 슬픔 위에 새로운 눈물을 더하는 것은 죄악이다. 18살 이형종, 갈 길은 멀지만 미래는 밝다.
SPORTS2.0 제 52호(발행일 5월 21일) 기사
최민규, 심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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