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과 죄, 복음, 그리고 율법
이번 주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와, 죄와
율법, 그리고 죄로 깨어진 관계를 누가 회복시키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 59:2),
우리를 속이고 상처 입히며 결국 파멸로 이끈다.
죄와의 싸움 즉 대쟁투는 실재이며 우리 모두는 이 전쟁 한 가운데 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가장 큰 전투이다.
오늘 우리는 영적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본성(생각, 동기, 행동, 말)이 추구하는 쾌락 때문에 죄를 단지 삶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치부한다.
또 그것은 직장, SNS, 쇼핑, 운동, 음식일 수도 있다.
사회가 죄에 익숙해지면서 교회조차 죄를 죄라고 부르기를 어색해 한다.
사탄은 굳이 노골적인 죄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
그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들, 손안의 작은 스마트폰의 화면, 무심히 흘러가는 영상,
한없이 길어지는 나태함, 크게 티가 나지 않은 잘못과 속임수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들을 알고 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직접 읽지는 못하지만 예리한 관찰자이기에 우리가 무엇에 시선을 두고 어떤 말을 흘리는지 끈질기게 살핀다.
사탄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라도 거점을 얻기 위해 우리의 생각, 의도 그리고 행동을 바꾸려고 힘쓴다.
바울은 이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내 신앙과 믿음이 자신만만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사람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마 6:2)
자신의 헌신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 신앙의 깊이로 남을 내려다보는 우월감은 영혼이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신앙의 균열이다.
이런 우리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은 책망보다 먼저 모본을 보여 주셨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무기로 삼으셨고, 그것이 광야의 시험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비결이었다.
우리도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을 것을 기억해야 한다(마 6:33).
우리의 영적싸움도 행동의 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선 생각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1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엡2:3).
본질적으로 이들에게는 성령이 없다(유1:19).
성령이 없는 사람을 육체에 속한 자라고 했다.
창세기에서 이런 사람을 육체가 되었다고 했다.(창6:3)
시편에도 이런 사람을 육체뿐이라고 했다(시78:39).
육신, 이 몸은 한 번 죽어야 하는 사망의 몸이다(롬7:24).
이 몸의 지체에는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다(히12:1).
우리가 이런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는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사탄은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공격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것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대쟁투의 핵심이다.
사망과 생명의 싸움이다.
생명의 성령께서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다(롬8:2).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성령님과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2 사람은 생각에 따라 인격이 형성된다고 성경은 계시한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잠23: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예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생각은 물건이 아니라서 잡아 던져 버릴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생각을 다스리기 위하여 말씀이 생각의 근원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시139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앉고 일어서는 것을 다 아신다고 계시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요일 3:4)
우리의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시 51:5, 렘 17:9).
율법은 죄의 실체를 드러낸다.
율법은 죄가 영혼을 조용히 갉아먹기 전에 그것을 깨닫게 하는 통증이다.
율법은 마치 우리가 주변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안경을 쓰는 것과
같고 우리의 실제모습이 어떤지를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같다.
율법은 우리 삶과 성품을 명확히 보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죄의 장벽을 제거하고 회복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의 율법의 아름다움을 왜곡하여 급기야 어떤 이들은 율법을 짐으로 여기게 되었다.
율법을 생각하면 주로 사랑과 자유가 아닌 율법주의가 연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라고 말한다.
율법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복음과 율법이 함께 가는 이유이다.
즉, 우리가 율법을 얼마만큼 신뢰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법적지위의 측면에서 율법은 오직 정죄할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율법은 결코 용서하지도, 의를 주지도, 대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가 왜 용서받아야 하고 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며 왜 속죄가 필요한지를 지적할 뿐이다.
그래서 율법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는 일을 성취한다.
비신자에게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사회 법규에 어긋난 행위를 떠올린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정의합니다.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이 두 말씀은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율법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드러내는 진단 도구이다.
율법이라는 기준이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적상태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다.
율법의 본질은 결국 관계이며, 그 관계의 토대는 사랑이다.
사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사랑의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켜 왔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유보다 율법주의가, 사랑보다 정죄가 먼저 떠오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한계를 보여 주어 십자가로 향하게 하고,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한다.
율법이 짐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과의 관계가 식어 있다는 신호이다.
율법과 복음
율법과 복음은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과 같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코 우리를 구원의 길로 데려갈 수 없다.
율법은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 깊은 뜻이 비로소 환히 드러난다.
율법은 바로 영상장비(X선)과 같아서 내 영혼 깊은 곳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지만, 그 죄를 용서하지도,
의롭다 선언하지도, 속죄하지도 못한다.
율법이 발견한 그 병을 친히 고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갈보리 십자가는 율법과 복음이 서로 입맞추는 자리이다.
그날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을 요구했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형벌을 친히 짊어지셨다.
죄인을 살리시려고 의로우신 분이 죽으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율법의 엄정함과 복음의 풍성함을 한꺼번에 바라 볼 수 있다.
율법의 단 한 획도 약화되지 않으면서 죄인이 온전히 용서받는 놀라운 신비가 바로 그곳,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갈보리를 자주 바라보는 사람은 율법을 짐으로 느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의 적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이다.
복음을 깊이 만난 사람은 결코 율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앎과 행함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면서 청중들이 가슴깊이 새겨야 할 마지막 도전을 남기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의 결과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마7:21~29]
복음과 성경진리를 아는 일은 중요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동행을 깊게 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듣는다면 우리는 도전을 받고 변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그분의 계획이 숨 쉬는 매 순간 우리의 영혼에 새겨질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위에 세워질 수 있다.
이 친밀한 관계를 위한 설계도는 결코 비밀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속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제시하신다.
이 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주장하며 그 의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영원한 성경진리를 아는 일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동행을 깊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지식의 가치를 결코 작게 여기지 않는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무지는 영혼을 어둠 속에 가두고 거짓 앞에 무방비로 세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식이 머물러야 할 더 깊은 자리를 가리키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예배를 통해, 개인적인 묵상을 통해 듣게 된 말씀이 일상의 자리에 뿌리내리고 서로 엮어질 때
우리의 생애도 반석이신 예수님 안에서 무너지지 않게 된다.
결국 신앙은 얼마나 많이 아느냐의 앎이 아니라 아는 만큼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느냐는 삶의 문제이다.
[26.2기.9과 안교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