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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이것이 빠진 묵상은 기도가 될 수 없다
2014년 5월 15일에 방영된 EBS ‘리얼체험 땀: 링 위에서 세상을 배우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방황하던 한 고교생 영대(19)가 있습니다.
영대가 일정 시간 권투를 배우며 땀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영대는 ‘자신은 방황하는 중이고, 그런 자신을 붙잡아줄 강한 스승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영대의 스승은 박현성 관장(47)입니다.
과거 자기 모습과 꼭 닮은 모습인 영대를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둘의 첫 만남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영대는 박현성 관장 앞에서 의자까지 들며 위협합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영대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링 위에서 보여줍니다.
영대는 갈등합니다.
권투를 계속 배울지. 그리고 배우기로 합니다.
이제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박 관장은 다시 마지막 권투 스파링하자고 합니다.
박 관장은 과거 권투 유망주였지만 올림픽 문턱에서 두 번이나 좌절한 후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삶을 비관해 분신자살까지 시도하면서 인생에 기권을 선언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온몸에는 화상의 흔적이 있습니다.
박 관장은 자기 다리를 만지게 합니다.
딱딱하게 굳어 굽혀지지도 않는 몸으로 자신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지막 스파링에서는 영대가 자신을 한 번도 때리지 못하자 양손을 등 뒤로 하고 한 대 강하게 맞아줍니다. 방송 PD가 묻습니다.
“사부님은 왜 헤어지기 전에 대결하자고 하셨을까요?”
“점점 나아지는 내 모습을 보라고 그런 거 아닐까요? 저한테…. 느껴보라고. 딱 하나 정확한 게 하나 있어요.
생각하는 게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난 안 되겠다.’ 이런 생각 말고, 이젠 ‘내가 안 돼도, 한다.’라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글을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도 분명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서 무엇이 빠져있었을까요? 지향입니다.
방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렸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묵상기도가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영대는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스승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관장의 얼굴을 때릴 수 있을 수준으로 향상되었음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감사하게 되고 새로운 삶으로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묵상입니다.
묵상에 십자가가 빠지고, 그 때문에 감사와 찬미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닌 시간 낭비를 한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유일하게 나를 받아주신 분>
지금도 삶 자체가 고달프고 힘겨운 나병환자들인데, 변변한 치료제도 없던 예수님 시대 당시는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당시 그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래도 ‘추방으로 인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일단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용되었지만 성벽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다인이면 정기적으로 순례를 해야 할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성은 절대 출입금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입장 바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지?
자기 잘못으로 걸린 병도 아닌데, 무조건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조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도 벌레 씹은 듯합니다.
병세는 하루하루 점점 깊어만 갑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멀찍이 도망가기 바쁩니다.
점점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가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됩니다.
스스로 너무 무가치해 보이기에 스스로를 거부해서 자존감은 완전 바닥입니다.
이렇게 당시 나병환자들은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의 고초를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들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죽음과도 같은 나병을 말끔히 치유시키십니다.
공동체는 나를 따돌렸고 세상 사람들은 다들 멀찌감치 피해 도망갔는데, 다들 더럽다고 돌을 던지며 무시했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예수님께서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나를 받아주십니다.
내 참혹한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내 허물어진 마음을 달래주십니다.
예수님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치유의 에너지로 인해 나병환자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죽음의 기운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의 치유 이후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의 이방인만 제외하고 9명의 유다인들은 그 과정을 생략함으로 인해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요한 과정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불행하게도 9명의 유다인들은 그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런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죄인, 이교도 등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 하느님이라는 확고한 믿음, 그분이 보내시는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1. 13. 수)(루카 17,11-19)
<구원받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1)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할 수도 있고, ‘감사’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닙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병들어 있는 죄인들과 몸은 병약해도 성덕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성인들을 생각하면......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그는 평생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감사할 줄 모르는 믿음은 아직 부족한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이라는 더 큰 은총을 얻지 못한다.”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2)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자기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 말은, 그들 모두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치유의 말씀’이 아닌데,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너희가 청하는 대로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 라는 말씀이 생략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고쳐 주실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제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라는 말은, ‘저절로’ 병이 고쳐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이 간청할 때 바로 고쳐 주시지 않고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질문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과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가버린 아홉 사람은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친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몸의 치유’에서 멈추지 않고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3)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에게 가라는 말씀만 하셨고, 병이 나으면 되돌아오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아홉 명도 병이 나은 것을 알았을 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제들에게 갔을 것이고, 병이 나은 것을 확인 받았을 것이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예물을 바쳤을 것이고,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었지만, ‘병의 치유’에만 만족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관심 갖지 않고,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도 관심 갖지 않고, 병이 치유된 것만 기뻐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병이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즉 ‘메시아’ 라는 것을 깨달았고, 믿었고, ‘병의 치유’보다 더 큰 은총을,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제에게 가던 길을 중단하고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병의 치유 이상의 구원’을
희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4)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병의 치유를 당연한 일로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병이 나은 것에 감사드리지는 않고 하느님께서 당연히 해 주셔야 하는 일을 하신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즉 자기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던 일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