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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없다
슈리 안나말라이 스와미의 마지막 가르침
스승
스승은 그대를 인도하며,
그대가 한 수행이 충분치 않다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동이에 물을 채울 때,
공간이 아직 남아 있으면 항상 물을 더 채웁니다.
그러나 동이가 완전히 다 차면, 즉 다 차서 물이 넘치면,
단 한 방울이라도 물을 더 채우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대는 충분히 물을 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의 동이가 가득 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승은 아직 공간이 남아 있고 물을 더 채워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대 자신의 판단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도달한 상태가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만일 스승이 "그대는 수행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스승의 말을 믿고 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젖은 나무는 쉽게 불이 붙지 않지만,
그것을 햇볕에 오랫동안 말리면
불이 훨씬 더 잘 붙겠지요.
장뇌, 가솔린, 등유, 화약 같은 재료들은
불길이 닿자마자 점화합니다.
헌신자들도 그와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승을 만나자마자,
혹은 진리를 처음 듣자마자 점화되고,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마르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린 뒤에야
불이 붙습니다.
기운
진인의 기운은 그가 육신을 떠난 뒤에도 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머무르고 사는 곳에 자기 기운을 남깁니다.
진인들은 좋은 기운을 남기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기운을 남기지요.
저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친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인이 남기는 기운은 미묘합니다.
라디오 방송은
우리가 정확한 주파수에 맞춘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진인의 기운에 맞출 수 잇습니다.
이것이 그 방송의 '파장'입니다.
만일 그대 자신을 이 주파수에 맞추지 않았으면,
그대는 진인이 어떤 장소에 남겨 놓았을 수도 있는 그 기운들을
체험하거나, 거기서 이익을 얻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육체
마음 속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한 생각 뒤에 또 한 생각, 그 뒤에 또 한 생각,
이래서 생각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대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
하나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나는 육체다'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그 위에 다른 모든 생각들이 꿰어져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이 생각을 하여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만 하면
마야(maya)가 따라옵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를 그치면,
마야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마야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 중략 -
마야가 산출하는 모든 것은 그릇된 관념이
증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참되지 않은 어떤 것을 참되다고 여기는 결과입니다.
- 중략 -
이 '나는 육체다'(I am the body) 하는 느낌과
그것에 의해 생겨나는 마야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평등보심(-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태도),
곧 우리로 하여금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과 같은 양극단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게 해 주는
평정 혹은 평등의 소견이 있을 때 사라집니다.
마음과 몸
육체는 그 자체로는 지각력이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마음 없이는 몸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움직입니까?
육체가 제공하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움직입니다.
마음과 몸은 입 안의 혀와 이빨과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빨은 혀와 싸워서 그것을 깨물지 않습니다.
마음과 몸도 마찬가지로 조화롭게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육체를 넘어서고 마음을 넘어서고 싶으면,
감각 기관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완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막에서 환상적인 오아시스를 만들어내는 신기루와 같이,
감각 기관들은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가 우리 앞에 있어서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있다는 인상을 창조합니다.
자기탐구
그대는 하나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반지니 목걸이니 하고 부르는데,
그 형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는
금이라고 하는 그것의 본체를
일시적으로 잊어버립니다.
자기탐구는,
우리가 바탕 위에 습관적으로 덧씌우고 있는 이름과 형상들
대신에
그 바탕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입니다.
질문
그대는 많은 질문을 할 수 있고,
저는 아무리 많은 답변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몇 시간이고 계속할 수 있지만,
그대의 질문이나 저의 답변이나 어떤 만족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들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어 봤자
그대가 진아 깨달음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대에게, '질문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답변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해 보라고 조언하겠습니다.
자신의 의문과 질문들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그 근원에 대한 그대의 탐구가
그대를 진아로 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무 질문도 없고 아무 답변도 없습니다.
일상 속의 수행
질문: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 가운데서 어떻게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스와미:
라마끄리슈나가 한 번은 그런 질문을 받고 그 대답으로,
제자리에서 뺑뺑 돌면서 놀고 있는 아이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뺑뺑 돌면 곧 어지러워서 넘어지겠지만,
만약 그 아이가 자기 팔 길이에 있는 기둥 하나를 꽉 붙잡고 뺑뺑 돈다면, 기둥을 잡고 있기 때문에 자세가 곧게 유지되어 넘어지지 않겠지요.
윤회계라고 하는 이 어지럽게 뺑뺑 돌아가는 세계에서도
그대가 진아라는 기둥을 꼭 붙들면,
자세를 곧게 유지할 수 있어서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어떤 보호책 없이
세속적인 일들과 접촉하는 것은
끈적끈적하고 불유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진아에 대한 기억으로
그대 자신에게 기름칠을 해 두면,
그대의 어떤 업무도 그대에게 들러붙는다든가
그대에게 어떤 곤란이나 불편을 초래하지 않게 하면서도,
세상 속에서 순조롭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아를 기억하고 있을 때에는
삶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게 됩니다.
슈리 바가반께서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게.
이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면 일이 부담이 되지 앟을 것이고,
어떤 문제도 자네를 건드릴 수 없네.'
일과 명상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구분하지 않으면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명상이 됩니다.
일과 명상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구분하지 않으면,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명상이 됩니다.
그리고 종류가 다른 일들 간에도 분별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좋은 일이고, 저것은 나쁜 일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모든 일을 동등하게 취급하면,
그대가 하는 어떤 일도
그대의 수행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앉아서 명상하지 말게.
자네가 진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충분하네.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자네에게는 이 수행으로 충분하네.
진정한 수행은
진아를 잊지 않는 것이지.
그것은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네.
자네는 항상 진아이네.
그저 그것을 잊지만 말게."
화
화를 내 보이는 것이 필요할 경우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역을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단지 특정한 순간에
필요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내면적으로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
약간 미친 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작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이 친구들은 모두 그가 어리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놀리고 조롱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네에게 좀 나쁜 소식이 있네. 자네 처가 과부가 되었다네."
그는 그들의 말을 믿었고, 슬퍼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내가 과부가 되었어! 내 아내가 과부가 되었어!" 하면서 말입니다.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 중 몇이 그를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왜 슬퍼하나? 자네는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나?
자네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 한탄하고 있는데,
자네 처가 어떻게 과부가 될 수 있나?"
"내 친한 친구들이 그렇다고 말했어."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친구들을 믿어. 아주 믿을 만한 사람들이거든.
그들이 내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임이 분명해."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천하에 어리석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믿지 않고 남의 말을 믿기로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라고 더 나은 게 있습니까?
우리는 감각 기관이 제공하는 간접 정보에 근거하여,
우리가 육체라고 믿습니다.
자기의 '내가 있다'는 체험은 우리 모두에게 현존하는데도,
요망한 감각기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우리로 하여금
명백히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려고 하면,
우리는 이 감각 기관들을 믿고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슬퍼하면서
"나는 속박되었어. 나는 깨닫지 못했어. 나는 자유롭지 못해"하고 한탄합니다.
심지어 스승이 와서
"그대는 진아다. 그대는 자유롭다.
왜 그대는 요망한 감각 기관들이 그대에게 제공하는 그릇된
정보를 끝끝내 믿는가?"하고 말해주어도, 그대는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대는 스승에게 말합니다.
"이 감각 기관들은 과거에 항상 저에게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해
왔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사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스승의 말씀이 서로 부합되고 진리를
드러내는데도 계속 슬퍼하면서 한탄합니다.
죽음
만약 수행에 대한 그대의 열의에 문제가 있으면,
그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7일 안에 죽을지 모른다."
그대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것인 척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루 24시간 진아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자신의 세간적인 업무에 아주 매여 있던 한 부자가
자기 침상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내 큰아들은 어디 있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 옆에, 침대 머리맡에 서 있어요."
아내는 명상적인 여자였고,
자기 남편이 곧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충고했습니다.
"지금은 세간사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편안히 마음을 놓고 진아 안으로 들어 가세요.
지금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랍니다."
남편은 다른 일들이 마음에 걸려 있었습니다.
" 내 둘째 아들은 어디 있소?"
"둘째도 침대 옆에 서 있어요. 그냥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하세요."
"그러면 내 막내아들은 어디 있소?
이 아이가 어디 있는지 나도 알아야겠소." 남자가 물었습니다.
'막내는 방 안에 당신과 함께 있어요.
우리는 모두 당신과 함께 여기 있답니다."
"전부 다 여기 있으면 우리 가게는 누가 돌보고 있소?"
죽어 가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초 뒤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세간적인 생각들이 그대의 삶을 소비하면,
그 생각들은 죽는 순간에 그대의 마음을 채우는 생각들이 되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대의 삶을 수행에 바치면,
즉 내적인 평안을 얻는 데 바치면,
죽는 순간에도 그대는 그 평안의 상태 안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음식
음식을 굶는 것은 장기적인 이익이 없습니다.
바가반께서도 우리는 몸에 음식을 굶기보다는
마음에 생각을 굶겨야 한다고 충고하셨지요.
우리가 수행을 잘 하려면 몸의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몸에 음식을 주지 않으면 몸이 약해져서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합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억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배가 고플 때 드십시오.
음식은 식욕을 느낄 때 더 맛있습니다.
남이 먹으라고 할 때 음식을 먹는 것은 훨씬 불만족스럽습니다.
식욕을 느낄 때 음식을 먹으면 우리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운명
만일 그대가 진아라면
어떤 운명도 그대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셔츠를 찢는다고 그대도 같이 찢어집니까?
아니지요.
그대가 아닌 어떤 것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은 금생으로 넘어온 (과거의)업에 따라
쾌락, 행복, 불행 따위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아에게는
집착도 없고,
초연함도 없고,
행복도 불행도 없고,
아무런 업도 없습니다.
육체는 진아가 아니며,
마음은 진아가 아닙니다.
진정한 '나'가 진아입니다.
그리고 진아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진아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조화
이빨과 혀는
둘 다 그대의 일부이며,
싸우거나 투쟁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일합니다.
마음과 진아가 하나라는 앎이 있을 때는
싸움도 없고 투쟁도 없고,
판단하거나 성취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화를 가지고
마음을 진아 안에 두고,
그것을 거기에 붙들어 두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명상입니다.
질문: 그러나 제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만약 모든 일이 예정된 대로 저에게 일어난다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것 아닙니까?
스와미: 그대를 괴롭히는 그런 모든 의심은 단지 그대가 '나는 몸이다' 하는 생각과 그것이 가져오는 모든 혼란스러운 결과들에 말려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력이 쓸데 있느냐 하는 분석을 하고 있느니, '나는 참나다' 하는 자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수행, 노력과 실천, 그리고 그것에 대해 그대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관념도, 그대가 자신을 참나가 아니라고 믿을 때만,
그리고 참나를 '도달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믿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개념일 뿐입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 왔나? 나에게.' 하는 일련의 생각도 진리에
대한 무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왜냐? 그것은 무지의 상태를 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제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대는 참나이지,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가공假空의 인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대가 참나 안에, 참나로서 머무르면, 그대에게 아무런 해害도 닥쳐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대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참나로서 머무를 때는 어떤 이원성도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핵심은 참나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고 나면 어둠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설사 어둠이 오기를 바란다 해도 오지 못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진아를 잊지 않는 것이다.
바가반은 저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 모인 곳에 자네가 왜 가야 하나?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게. 군중과 함께 움직이면 그들의 원습이 자네에게 감염된다네."
"앉아서 명상하지 말게. 자네가 진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충분하네.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진정한 수행은 진아(자기)를 잊지 않는 것이지. 그것은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네. 자네는 항상 진아이네.
그저 그것을 잊지만 말게."
"만약 자네가 진아를 이해하고 싶으면, 아무런 공식적인 수행법도 필요하지 않네. 자네가 항상 진아이네. 일을 하는 동안에도 진아를 자각하게. 자네는 진아이지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항상 '나는 진아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피하도록 하게."
"당신께서는 산꼭대기에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영적인 삶의 정상에 도달하셨지만, 저는 아직도 산 밑에 있습니다. 부디 제가 정상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나는 산 밑에 있다' 는 그 생각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충분하네.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우리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네. 내가 정상에 있고 자네가 밑에 있다고 자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은 자네의 생각들일 뿐이지. 만약 이 차이를 포기해 버릴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걸세."
"저는 바가반께서 하나의 좋은 방편을, 즉 저희들을 모두 해탈로
신속히 운반해 줄 수 있는 지知의 비행기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둘 다 지知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고 있지만, 자네가 그것을 모르고 있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