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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넷 독일 미망인을 숨죽여 지켜보던 조선인…
법정서 20년형 받고 옥사한 이유는
1941년 동아시아에 전운이 감돌 때, 일본 군부가 국가적으로 전쟁 참여를 독려합니다. 대국 미국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12배에 달하는 국력 차이. 그들은 그 지표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했습니다. 모두가 무리라고 말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도 모두 승리한 전력도 있었습니다. (오만으로 불러 마땅한)자신감으로 가득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전투기.
일본 군부는 당시 정치를 움직이는 핵심 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의 정책과 계획은 국가의 핵심 의제가 되었지요. 의회도, 정치도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내가 용감히 반기를 들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 그들과 협상을 해야한다”고 외칩니다. 국제 외교 사령탑 격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였습니다.
일본의 군부는 그의 제안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1941년 오늘날 하와이로 알려진 진주만을 공격합니다. 선전포고도 없었습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선전포고는 일본측이 공습을 벌인지 1시간 뒤에야 미국측에 전달됩니다). 명백한 전쟁범죄. 도고 시게노리의 외침은 메아리에 그쳤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내려온 배경이었습니다.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또 다른 이름은 박무덕. 그가 조선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년 뒤, 일본에 강력한 무기 두 방이 떨어집니다. 원자폭탄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강제적 항복문서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26만명이 사망한 뒤였습니다. 다시 평화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할 시기. 일본 대표로 도고 시게노리가 다시 소환됩니다.
그에겐 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박무덕. 예 그렇습니다. 그의 핏줄에는 조선인의 DNA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핏줄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외교 수장으로 올랐던 그의 인생은 디아스포라의 극적인 드라마와 같습니다.
도공의 후예 박무덕
박무덕은 1882년 가을 일본 가고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 온 도공의 후손이었지요. 이 섬나라에 정착한 지 30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조선인 도공 이삼평 기념비. [사진출처=そらみみ]
그의 아버지 박수승은 도공으로서 제법 큰 돈을 번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마을의 다이묘(영주)도 조선인 출신 도공들을 각별히 아꼈습니다. 마을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적으로도 차별받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으니 조선인 정체성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1871년, 조선인 도공들의 삶은 격변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영주제도가 폐지되고 중앙집권화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폐번치현). 서구 열강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선 자국민 중심의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을 둘러싼 왜군들. 이 전쟁으로 수많은 도공이 일본에 끌려가는 참사를 낳았다.
자연스레 조선인을 멸시하는 풍조도 퍼져갑니다. 영주로부터 특혜와 보호를 받던 도공 조선인들은 이제 차별과 멸시의 공간으로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차별은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공간을 가리지 않고 퍼져가기 마련입니다. 조선인 도공들은 어디를 가도 혐오의 눈빛을 피할 수 없었지요. 아버지 박수승은 결단을 내립니다. “무덕아, 너는 앞으로 도고 시게노리다.” 집안의 성을 ‘도고’로 바꾸고, 아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지어준 것이지요. 살아남으려 ‘창씨개명’을 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박무덕은, 그렇게 도고 시게노리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1670년대 제작된 카키에몬 주전자.
차별의 아픔을 공부로 승화하다
‘공붓벌레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책을 놓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습니다. 조선인 출신인 그와 가까이하려는 일본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교의 부잣집 친구들은 시게노리와 같은 조선인이나 농부의 자제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책 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시게노리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농부의 자제였던 사키토모 요시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조차 싫어 이지메(따돌림)를 했으므로 우리는 신사 경내같이 조용한 곳에서 공부했다.” 133명 중 1등. 시게노리의 성적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시게노리가 가장 사랑한 학문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였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높아지던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 했겠지만, 어쩌면 차별적 일본 사회에 대한 저항감으로 새로운 이상향을 세웠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의 마음속에는 외국을 향한 동경이 커졌지요. 시게노리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문학을 읽으며 세계관을 넓혀갑니다. 마침내 도쿄대 독문과 입학에 성공하지요. 1904년의 일이었습니다.
1827년에 지어진 ‘붉은문’이라는 뜻의 아카몬은 1903년 도쿄대학교 문으로 활용됐다.
문학청년 시게노리, 관직에 뜻을 품다
“문학에는 재능이 필요한가 보다. 나는 영원히 (이름) 남을 시인은 되지 못할 터이다.”
시게노리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러나 재능이 없음을 이내 깨닫습니다. 아버지 박수승도 시게노리가 일본 관료로 자라길 바랐습니다. 그가 외무고시에 도전한 배경이지요.
공부천재로 불린 그였지만 고시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떨어져서야 마침내 외무고시를 패스합니다. 1912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습니다. 아버지 박수승은 일본 고위 관료가 된 시게노리의 본적을 옮깁니다.
‘조선인 도공마을’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가 또 다른 차별을 받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300년 동안 가문이 지켜온 터전이었지만,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이쇼 시대(1912~1926년)의 외무성.
그에게 찾아온 뜻밖의 사랑
“혹시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
‘숙맥’ 시게노리에게도 사랑이 찾아옵니다. 여러 차례 일본인 여성과 혼담이 오갔지만, 혈통 문제로 무위에 그친 뒤였습니다. 그가 스위스를 거쳐 베를린에서 근무할 때, 어쩐지 한 여인이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독일인 신문기자인 에디타 드 라론드였습니다.
시게노리는 독일문학을 잘 알았고, 라론드는 일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두 사람은 괴테를 계기로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마침내 시게노리가 그녀에게 청혼합니다. 1922년 일본에 돌아가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구했지요. 결과는 당연히 반대였습니다. 보수적인 조선인 부모들이 외국인과 혼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요.” 제네바에서 근무할 당시 도고 시게노리가 부인 에디타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거기에 또 하나. 에디타는 초혼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유명 건축가인 게오르그와 결혼해 아이 넷을 두었었지요.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정도로 동아시아에서도 이름난 건축가였지만, 폐렴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애 딸린 미망인, 거기에 외국인 며느리를 좋아하긴 쉽지 않았지요. 시게노리 나이 어느덧 마흔. 부모도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 두 사람이 혼인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은 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새 아빠, 고향이 어디라고요?” 도고 시게노리 부인 에디타가 전 남편과 낳은 딸들.
조선인을 챙긴 시게노리
“자네 조선인인가. 일본제국 외무성으로 와서 나를 찾게.”
시게노리는 평생을 조선인이라는 낙인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핏줄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요. 1933년 한 조선인이 일본 외무고시를 패스합니다. 후일 대한민국 외무부 정무국장을 지낸 장철수였습니다.
“저와 같은 조선인이시라고요?” 일본 외무고시에 합격한 조선인 장철수.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의 베테랑 외교관이었지만, 신입인 그를 직접 불러 격려하고 술도 사줬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가 자신 스스로를 완벽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외교관으로서 그의 능력은 출중했습니다. 1937년에는 독일 대사를, 이듬해에는 소련 대사를 거칩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나치의 폭력성과 유럽의 전운을 감지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1941년 10월 외무대신으로 발탁됩니다.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공격해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기 정확히 두 달 전이었습니다.
조선 총독부 건물은 시게노리의 부인 에디타의 전 남편 게오르그가 지었다.
전쟁에 반기를 든 조선인 히게노리
명민한 감각을 가진 시게노리. 그는 내각과 군부가 미국을 공격하려는 정세를 눈치채고,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미국이 일본군에게 중국에서 철군하라는 요구를 하자 군부 사이에선 반미 감정이 일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내각과 군부는 전쟁으로 일본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요. 시게노리는 외쳤습니다. “일본이 중국에 병력을 장기 주둔해 압박하는 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공헌하는 일이 아니다.” 미국의 논리에 동조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그였습니다. 최고 권력자들끼리의 만남으로 전쟁의 긴장감을 낮추려 했던 것입니다.
“자네 전쟁을 반대하나? 그건 일본을 반대한다는 말이지.” 도조 히데키 1942년 12월.
그러나 후임 총리 도조 히데키는 육군 출신의 강경파였습니다. 그에게 ‘평화’를 외치는 시게노리는 눈엣가시였겠지요. 결국 시게노리는 외무대신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향한 마지막 ‘브레이크’가 망가져 버린 셈이었지요. 일본의 폭주는 역설적으로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일본은 결코 미국과 유럽을 이길 수 없을거야.” 1937년 베를린에 주독일 일본대사로 부임한 도고 시게노리. 오른쪽이 부인 에디타, 왼쪽이 딸 이세.
원자폭탄으로 초토화된 일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 것이었습니다. 사흘 후에는 나카사키에 원자폭탄 팻맨이 떨어지지요.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상공(왼쪽)과 나가사키 상공.
시게노리는 탄식했습니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예상이 빗나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수개월 전까지도 일본의 권위자들은 이번 전쟁에서 원자폭탄이 실용화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한마디로 전체적인 수준의 문제였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때, 일본은 다시 ‘해결사’를 필요로 합니다. 모두가 “전쟁”을 외칠 때, 홀로 “평화”를 외친 한 사람. 도고 시게노리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4개월 전인, 1945년 4월이었습니다. 시게노리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잽(일본을 비하하는 단어), 다음은 너 차례야,” 일본 침공을 준비하는 엉클샘을 묘사한 미국 육군 선전 포스터.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이 모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내용. 일본 입장에 굴욕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주저하는 내각과 덴노에게 시게노리는 일갈합니다.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선인 포로 출신의 후예가 일본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아이러니. 8월 15일, 쇼와 덴노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다고 발표합니다. 일본의 패전이었습니다. 우리의 광복이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미국 함정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전쟁 반대자, 그러나 전쟁의 부역자
“도고 시게노리는 전범이다.”
전후 처리가 문제로 떠오릅니다. 시게노리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금고 2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외무대신으로 근무했던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복역 중이던 1950년 7월23일 시게노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68세였습니다.
“저는 전쟁에 반대했소만...” 재판 받는 도고 시게노리.
시게노리의 핏줄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부인 에디타와 낳은 딸 아이 ‘이세’가 있었습니다. 이세는 후미히코라는 외교관과 결혼합니다. 장인 시게노리의 영향 때문일까요. 1973년 한국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여 한일 관계가 경색되자, 후미히코가 해결사 역할을 자처합니다.
“한국은 우리 일본의 안보상 중요한 나라입니다.” 도고 시게노리의 사위인 도고 후미히코는 주미 일본 대사로서 활약하며 한국의 필요성을 강조한 친한파 인물이었다.1976년 포드 대통령과 악수하는 후미히코.
후미히코는 1969년 미국과 일본의 오키나와 반환 교섭 실무 책임을 맡을 때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문구를 넣은 ‘친한파’ 인물이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부터 20세기 근대사까지. 박무덕에서 도고 시게노리가 되기까지. 그의 이름에는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향기가 진하게 배 있는 셈입니다.
도고 시게노리는 한국과 일본 모두의 정체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다면체적 인간이었다.
<네줄요약>
ㅇ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반대했던 인물은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였다.
ㅇ조선인 도공의 후예로서 한국 이름을 끝까지 지키다 일본 고위관료가 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ㅇ패전이 임박하자 일왕과 정부에 항복을 권유한 인물이기도 했다.
ㅇ전범으로 결국 처벌받은 그는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진하게 품고 있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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