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나무
강순
언젠가부터 밤을 읽는 습관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사라져간 버스 정류장
내가 읽던 가을밤 열두 시의 페이지는 23쪽
지친 얼굴을 목 위에 매단 알바생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페이지에 갇혀 목이 더 길어져
낮 동안 생채기 난 가지들이 위로를 주고받을 때
새들이 떠난 방향으로 병든 잎들
작은 유언도 못 남긴 채 떨어져내려
어지러운 소문을 뒤집어쓰고 도시를 돌아 나온 바람
내가 가진 별난 얘기를 나눠 줄게
한밤의 명치를 이리저리 흔들어댈 때
당신들이 아직 읽지 않은 오백 권의 시집만큼 뜨거워져
당신들은 심장에 박힌 무지개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나는 바람의 문장들 중 몇 개의 별점을 해독하는 중
은하수를 지키는 직녀는 옷감 대신 책장을 넘기며
죽은 새들을 살려내는 주문을 외고 있다네
직녀야 직녀야 네 이야기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되니?
슬픔과 희망의 문장들은 일란성쌍둥이 운명
오십삼 페이지 얼룩진 자간에서도 서로를 찾네
정류장에 오래 머무는 실업자의 그림자는
주름진 밤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치대었던 냄새가 나
외로운 미물들이 눈물의 이유를 숨기는 이유는
입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따뜻한 입을 갖지 못한 고양이들이 거리를 부유할 때
나는 읽지 못한 수많은 페이지들을 상상해요
사실, 나도 내 페이지를 다 찾아 읽지 못했어요
밤을 읽는다는 건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
고열 앓는 줄기와 뿌리를 지켜내는 것
당신들의 무관심에 어느 날 내가 다 뽑힐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해독법은 오류일까요?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등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기금 수혜.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