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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25일 목요일 말씀묵상 ♣
성경:고린도전서13:8-13(신279P)
제목:사랑의 영원성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2)제일은 사랑이라.헬, 더 큰 것은
할렐루야!오늘도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실 때 성령님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줄로 믿습니다.
***{제목}***“사랑의 영원성”
어제 본문(고전13:1-7)은 너무나 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장은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3절은 사랑의 중요성을, 4-7절에서는 사랑의 성격을, 8-13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은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절대 필요한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1).사랑이 없는 모든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모든 희생적인 행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7절에 보면 아카페적인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6절에는 소극적인 면을 말씀했다면 7절은 적극적인 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아카페적인 사랑의 은사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사를 받으심으로 우리 가정과 직장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 교회가 주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영원성”(고전13:8-13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어제 헬라어로 분류하는 사랑은 다섯 가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1).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2).가족 간의 사랑인 스톨게.
(3).친구 간에 사랑인 필리아.
(4).자선적인 사랑인 필란드리아.
(5).신적인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카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나 친구간의 사랑, 혹은 동지간의 사랑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다가 낙심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에게서는 완전한 사랑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 사랑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요, 그런 사랑만이 진정한 만족이 있고 우리 인간들이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큰 책임 중의 하나가 이 아카페적인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에 나가서 나타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가정이나 직장, 그들이 활동하는 곳에서 사랑의 빛이나 향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기독교인은 생명을 잃은 자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성숙됨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식구나 직장동료가 그 사랑 가운데 변화되는 역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성숙하려면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1-3절에 보면 유아기의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단계를 말합니다.
어느 의미에서 위의 열거한 다섯 가지 사랑 중 네 가지인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이나 자선적인 사랑도 아카페적인 사랑의 요소가 얼마큼 있으나 그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사랑이 그 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아카페적인 사랑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에도 자기중심적인 것이 많아서 자식이 커서 어머니의 사랑을 몰라준다든지, 자기가 희생적으로 사랑한 것에 비하면 그 효도심이 너무나 작을 때는 대단히 섭섭히 여기거나 원망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섭섭함이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으로 나타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연속극에서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은 가정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도 많은 가정들이 고부간에 갈등 때문에 적지 않은 트러블들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요즈음 인터넷에 보면, “최근 아파트 이름이 점점 길어지고 타워팰리스, 미켈란쉐르빌, 아카데미스위트, 현대하이케리온, 롯데캐슬모닝 등 외국어로 되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라는 유머스러운 질문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엉뚱합니다. “시어머니가 아파트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 시어머니들에게는 너무나 섭섭한 이야기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에 관계된 미국 농담도 좋은 것은 별로 없고 대개가 악평에 속합니다.
이런 농담이 있다고합니다. “에덴동산을 왜 낙원이라고 하는지 아니?”라는 질문에, “하와에게는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이야”라는 대답입니다.
왜 가장 사랑이 많은 어머니들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까? 어머니의 사랑에도 이기적인 면이 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카페 이전의 사랑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유아기 단계에 불과한 사랑입니다.
유아기에는 모든 사랑을 자기중심에서 합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 기분에 따라 사랑합니다.
고전13장1-3절에 보면 유아기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가 명심할 말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과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구제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나 순교가 별거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귀하고 너무 아름다워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요, 내게는 결코 유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카페 사랑이 빠진 방언이나 천사의 말, 아카페 사랑이 빠진 예언의 능력이나 구제, 혹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과 순교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인정하지 않으시므로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유아기의 사랑을 버리고 이제는 아카페 사랑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4-6절까지는 소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유아기 때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크게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떼를 쓰던지,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든지 용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년기에 와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깨우치게 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때는 부모나 교사로부터 “하지 말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밥을 흘리지 말라” “떠들지 말라”’ “늦잠을 자지 말라” “싸우지 말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소년들은 성장합니다.
본문 4-6절에서 보면 “아니하며”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4절에서 보면 아카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다른 이에게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합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5절에서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남의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6절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는 전부 남에 대해서 해서는 안 될 것을 나타내면서 아카페 사랑의 단계에서 소극적인 부분부터 배워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아기 때는 나만 알고 내 중심적인 사랑만 하던 성도가 “이제는 남에게 상처주지 않을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까?”라는 데 신경을 쓰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알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어느 분이 교회를 나오면서부터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술을 먹고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아이들 앞에서도 아내를 때리면서도 그것이 남자답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사랑이 자라간다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유아기 성도처럼 말과 행동도 막하고, 남에게 무례히 행함으로 상처나 고통을 주며 사는 자가 있습니까?
혹은 남의 악을 들추어내기를 기뻐하는 자가 있습니까?
아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서 은사를 받은 자일지라도 사랑의 불법을 저지르는 자라는 책망을 면치 못하는 줄 아시고 앞으로는 사랑이 더 성장하는 단계에 이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7절에 보면 청년기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청년기는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모에게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가정을 책임지려 합니다.
즉 적극적인 사랑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4-6절은 아카페적인 사랑의 소극적인 면이 소개되고 있다면 7절은 적극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적극적인 아카페적인 사랑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1).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참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집니다.
벧전4:8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지 않고 덮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2).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아카페 사랑은 형제를 믿는 것입니다. 남들은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을 말합니다.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썼던 오 할레스비라는 분의 고향에 신앙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녀의 먼 친척을 찾아가 자신을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맡아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 비록 나이는 많지만 결코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죽음이 아름답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렸고 주님은 나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아무도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맘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어머니처럼 그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장담처럼 여생을 평온하게 사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젊은 부부가 방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가 주무시는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담긴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믿어 주었으며, 나의 신앙과 기도를 믿어 주어서 나와 함께 살아주고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
그리고 할머니가 가졌던 깜짝 놀랄만한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 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카페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할지라도 믿어줄 때 상대방은 감동이 되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아카페 사랑은 오늘의 부족, 오늘의 결점, 오늘의 연약을 보지 않고 먼 미래의 원숙을 바라보고 참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여러분!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나 제자 중,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나폴레온은 어렸을 때 학교 성적이 42명 중 42등이었고, 뉴턴은 꼴지 부터 둘째였으며, 문학가 엘리엇은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못해 줄곧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인가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았기에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말은 수동적으로 참는 것과 다릅니다. “견딘다”는 말은 어떠한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전진 하면서 나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것만 아니라, 그것을 지시고 견디어 가시면서 부활을 향해 전진해 가신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난관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아카페 사랑을 가지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딤으로 마침내 사랑의 큰 성숙을 가져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8-13절에 보면 장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장년의 단계는 원숙한 단계입니다.
1-3절까지의 말씀에다가 “사랑이 없으면”라는 말 대신에 “사랑이 있으면”라는 말을 넣어보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는 방언과 천사의 말, 사랑이 있는 예언의 능력과 믿음의 능력, 사랑이 있는 구제와 순교는 모든 것이 유익한 자요, 모든 것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단계가 장년의 단계입니다.
그 단계는 나누어주는 단계입니다. 사랑으로 은사를 베풀며, 사랑으로 따뜻한 말과 격려를 합니다. 사랑으로 용서와 희생을 줍니다.
장년의 단계에 이르니 유아기의 단계를 벗어납니다. 유아기 때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자기중심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장년의 단계에 이르러서 나누어주기 시작하니 부분적으로 체험하던 것에서 온전한 것으로 체험이 됩니다.
8-11절을 읽어 보십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은 다 페하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가 대단한 것 같으나 천국에 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은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은사만은 천국에 가서도 너무나 귀한 것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 그런 은사를 받았다고 우쭐거리는 모습은 아직도 어린 신앙의 단계에 불과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과거에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했으나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분명해졌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거울이란 지금과 같은 유리 거울이 아니고 구리거울 입니다. 그러므로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와 같이 과거 자기중심적일 때는 욕심의 눈으로 보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희미했으나 이제는 아카페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의 세계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깨닫게 되고 부활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페 사랑이 신령한 눈을 열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단계가 사랑의 은사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에게 이런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높은 산길을 걸어 오른 후에 너무 더워서 웃옷을 벗어 놓고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어떤 술 취한 사람 하나가 올라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고 시비하면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럼에도 김 목사님은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맞았습니다.
이윽고 그 사람은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때 김 목사님은 말하기를 “형님, 다 때렸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 때렸다. 왜?”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예수님을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말했습니다. 상대방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내가 김익두야.”라는 순간, 그 사람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황해도 지역에서 유명한 깡패 김익두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빕니다. 그러자 김 목사님은 점잖게 말하기를 “내가 방금 뭐라고 하던가?”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을 치렀을거야.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예수님을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지 않았나”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러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고 묻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고 하면서 그를 강제로 부흥회에 참석시켰고, 후일에 그 사람은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을지라도 급한 성질이 완전히 사라졌겠습니까? 아마, 이유 없이 한 두 대 매 맞을 때는 “뭐 이런 잡놈이 있어”하고 번쩍 들어 패대기를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아무 이유도 없이 때리는 것을 어떻게 참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사랑의 은사를 받으니까,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혈기대로 성질을 부렸다면, 사랑의 은사는 물론이고 믿음의 능력이 떠나감으로 부흥집회는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김 목사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그의 행패를 참았습니다.
그 결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 행패 부리던 사람이 변하여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그 부흥집회가 큰 은혜로 넘쳤던 것입니다.
과연, 김익두 목사님은 사랑의 장년의 단계에 이른 모습입니다. 왜 믿는 성도가 있는 가정이나 직장이 변화하지 못합니까? 자기중심적인 유아기 사랑에만 머물 뿐, 아카페적인 십자가 사랑으로 나누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이 성숙하려면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1-3절에 보면 유아기의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2. 4-6절까지는 소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3. 7절에 보면 청년기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즉 적극적인 사랑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4-6절은 아카페적인 사랑의 소극적인 면이 소개되고 있다면 7절은 적극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적극적인 아카페적인 사랑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1).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2).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3).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4).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4. 8-13절에 보면 장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사랑으로 밀알이 될 때만이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에 큰 변화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사랑의 은사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러므로 유아기 단계에서 소년의 단계로, 소년의 단계에서 청년의 단계, 더 나가서는 장년의 단계에 이르심으로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까지 변화를 나타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고린도전서13:8-13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유아기의 사랑에서 장년의 사랑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즉 믿음,소망,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