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稷昔艱危-지난날 나라가 어려워 奔鯨蕩溟渤-뛰는 고래가 바다를 뒤엎도다. 關門失鎖鑰-국방의 방비를 잘못하여 列郡如破竹-국토가 대 쪼개듯 당했었다. 景福呼白烏-경복궁 문에는 흰 까마귀 울어대고 宮闕烟塵勃-궁궐에 연기와 티끌이 일어났노라 玉輦累遷次-임금 수레 여러 번 옮겨져 六月巡沙磧-유월에 모래밭을 헤매었도다. 寧知太師宅-어찌 알았으랴, 조상을 모신 사당 化作傖人窟-왜놈들의 소굴이 될 줄이야 !! 유성룡(柳成龍)
앞 수레가 부서진 줄 알면서 바퀴 고칠 줄 모른다면 !!
국보 132호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있다. 국보 76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쓴 이순신 장군과 같이 전쟁을 직접 체험한 기록이다. 세계사에 흔치 않은 전쟁체험기록이다.
징비록(懲毖錄)의 “징비(懲毖)”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는 책(出典)은 시경(詩經) 주송(周頌) 소비편(小毖篇)에 있는 말이다.
“징비(懲毖)”의 뜻은 以從前的過失為教訓戒慎不再犯錯 “전에 잘못한 일에 대하여 혼이 나서 늬우치고 고치고 삼가하고 근신한다” 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1598년 7년간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1594년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선조(宣祖)에게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라는 제목의 상소(上疏)를 올렸다. 전쟁에서 적군을 막아 지키는 방책을 열 가지로 논한 글이다.
이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 상소(上疏) 내용은 전쟁에 나아가서 싸우는 일과 물러나서 지키는 일을 시기(時期)와 형편과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류성룡(柳成龍)은 이 글에서 “척후(斥候)”와 “요망(瞭望)”의 효율적 중요성을 첫 번째로 꼽았다. ※척후(斥候)-적군의 상황을 몰래 살피는 것 ※요망(瞭望)-높은 곳에서 적(敵)의 형세(形勢)를 살피는 것
적병의 동향을 미리 파악해 먼저 공격을 하려면 한발 앞서 적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안목(眼目)과 작전이 중요하다고 했다. 적어도 전투 5일 전에 몰래 적진 200리 지점까지 척후병(斥候兵)을 보내어 적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군대에 사전 염탐(廉探)이 없으면 “소경이 눈먼 말을 타고 밤중에 연못가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의 특명을 받은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 직위로 경상도 상주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일(李鎰)은 왜군이 코앞에 왔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왜군이 상주에 오기 하루 전에 개령현(開寧縣)에 사는 주민이 이일(李鎰)에게 왜군이 가까이 와있다고 알렸다. 그런데 기가찰 일은 이런 주요하고 위급한 보고를 한 사람을 “군대를 동요시킨다”며 이일(李鎰)은 그 사람의 목을 베었다.
이일의 칼 앞에서 그 백성이 부르짖었다. “내일 아침까지 적이 안 오면 그때 내 목을 베시오.” 이일은 들은 체도 않았다. 이일(李鎰)의 군대는 이튿날 왜군에게 전멸 당했다.
선조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장군이 있었다. 선조때 조선의 국방을 양 어깨에 책임진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국방역사에 영원한 오명(汚名)을 남기고 있는 장군이다.
신립(申砬) 장군이 왜적을 막으려 충주에 도착했을 때 왜군은 이미 문경새재(鳥嶺)를 넘은 뒤였다. 장교 한사람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신립은 유언비어로 군사를 동요하게 한다며 그 장교의 목을 베었다.
바로 그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역사에 길이 오명(汚名)으로 남고 있는 “신립의 군대 전멸”을당했다. 척후병(斥候兵)을 놓아 왜적의 동태를 손금 보듯 파악해도 이길까 말까 한데, 미리 알려준 왜군의 정보를 무시하니 속절없이 패한 것이다. 신립 장군은 패전 후 충주 탄금대에서 자결하였다.
신립(申砬)은 명문가(名門家)의 자손이었지만 조선역사에 치욕의 군인으로 그 이름이 영원히 남아있다. 임진왜란 하면 승전(勝戰)한 이순신 장군과 패전한 신립(申砬) 장군이 나란히 조명된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이런 일이 똑같이 되풀이될까 염려하여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국방관련 저서인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에 유성룡의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를 책의 맨 앞글에 넣었다.
이런 치욕의 역사가 임진왜란뿐이었겠는가? 일본에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 고종(高宗) 정권이 그랬다. 북한 김정은을 상전(上典) 모시듯 한 문재인 정권이 그랬다.
가난하게 살아도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자유민주주의로 사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다. 과학이 발달한 이 좋은 세상에 지금도 김정은 한사람을 위해 굶어 죽는 북한 주민. 푸틴의 독재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죽어가는 그 귀한 젊은 생명들 시진핑 한사람 권력을 위해 희생되는 14억 중국 국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헨리 패트릭의 자유에 대한 절규 !
성경에서도 자유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The truth shall set you free ! 진리(眞理)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대한민국은 하늘이 무심치 않아 친북좌파의 정권을 교체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외친 정권이다. 친북좌파들의 언론 선동에 의한 “윤석열 지지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윤석열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지 이제 겨우 4개월이다. 먼 길을 가기 위해 신발 끈을 조이는 시간이다. 마치 4년이 된 것 같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이 친북좌파에 오염되어 있다는 증거다.
친북좌파 정권의 대한민국 국민 해수공무원 피살을 월북이라 하였다 탈북민을 눈을 가려 강제 북송하였다. 북한 핵 폭탄을 그대로 둔 채 “종전선언”만 부르짖었다. 김정은을 위한 문재인의 충정이다. 어찌 존엄한 사람의 생명을 김정은 독재의 제물로 바친단 말인가?
《유성룡(柳成龍)이 말했다. 夫知前車之旣敗, 而尙不知改轍, 則是固覆敗之道也. “앞 수레가 부서진 줄 알면서도 바퀴를 고칠 줄 모른다면 앞으로 가는 길은 진실로 뒤집히고 부서지는 길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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