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루카 17,20-25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4일 [연중 제32주 목요일]
복음: 루카 17,20-2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간절히 입국을 원하는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 하느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현존 속에 더이상 고통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행복한 세상...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와 관련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물론 이 세상은 때로 정의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심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강론>
(2024. 11. 14. 목)(루카 17,20-25)
<종말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1)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종말’이 언제 오느냐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은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느냐고 질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종말은 눈에 보이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다든지 저기에 있다든지 하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나중에 예수님 재림 때에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또는 종말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가운데’ 라는 말은, 딱 중간 지점이라는 뜻이 아니라, 종말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종말이 완성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종말을 완성하러 오시는 분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관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은 “박해와 고난을 겪다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될 텐데”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는 “말할 수 없다.”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만일에 인간들이 종말의 날과 시간을 미리 알게 된다면, 또는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신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회개하면서 그 날을 잘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인간 세상 전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종말론자들 때문에 많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아는 것은
결코 인간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지금’ 깨어 있으면서, ‘지금’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라는 말씀은, 사이비 종교와 종말론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누가 따로 알려 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되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전에 종말이 먼저 오기를 희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의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겪더라도 영광스럽게 재림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4)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기후 위기 때문에, 또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또 대규모 자연 재난들 때문에 종말을 더 의식하고,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신앙인들이 기다리는 ‘그 날’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망하는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고 완성되는 날인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려면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