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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인 안종연과 문학인 박범신의 만남 ● "내가 쌀을 주었으니 당신이 그것으로 떡을 만들든 밥을 짓든 하시오." 3년 전 사단법인 문학사랑과 대산문화재단은 2010년 『문학과 미술의 만남』전 을 위한 문학가로 중후하고 선이 굵은 문체와 그림을 그리는 듯한 뛰어난 묘사력으로 섬세한 감성을 표현하는 박범신을 선정했다. 박범신의 소설은 독자들의 공감각적 감수성과 교감하는데 뛰어나 타 장르 예술가에게도 풍부한 상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주최측은 박범신의 소설을 시각언어로 풀어낼 작가로 미술인 안종연을 선정했다. 안종연은 여러 가지 매체를 이용하여 공간을 연출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문학작품을 직설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메시지를 시각화하고 의미를 확장시키는 작업방식이 가능한 작가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비롯하여 시간과 우주에 대해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두 작가는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쌓아가며 이번 전시를 만들었다. 박범신은 전시에 앞서 안종연에게 "내가 쌀을 주었으니 당신이 그것으로 떡을 만들든 밥을 짓든 하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소설에 대한 해석과 상상의 자율성을 안종연에게 주었다. 안종연은 박범신이 소설 가운데 건져 올린 화두를 자신의 시각언어와 결합해 안종연만의 서사를 펼쳤다. 안종연 작업은 소설가와 화가의 만남이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던 문학서사와 시각서사의 '단선적인 만남'을 넘어 '심층의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종연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문학적 서술 자체를 시각화하기 보다는 주제의식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미니멀한 평면과 입체, 그리고 영상과 설치에 이르기까지 예술언어 전 영역을 두루 오가며 문학서사를 시청각언어로 재해석하였다. 작품의 제목은 두 작가가 서로 상의하여 결정했는데, 이는 박범신 소설의 목차와 같다. 작가가 배치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박범신 소설 속 장면들을 여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새로운 예술생산을 매개하며, 나아가 탈장르 소통이라는 문화생산을 견인한다.
생멸하는 모든 존재를 향한 헌사 - 시간의 주름 ● "나는 시간의 주름살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감금해 가는지 진술했고,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다 처형된 한 존재의 내면풍경을 가차없이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박범신) ● 박범신은『주름』을 통해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 소멸하는 존재들에게 헌사를 바쳤다.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통해서 나온 '시간의 주름에 관한 기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 존재에 관한 방대한 저작 속에 담긴 시간성의 문제는 시각예술가 안종연 또한 늘 고민하고 있던 화두였다. 안종연은 전시에 앞서 그 제목을 'wrinkle of time' 아닌 'groove of time'으로 정했다. 주름을 직역한다면'wrinkle'(주름)이지만 'groove' (홈)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넘어 시간의 깊이까지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박범신이 문장으로 써 내려간 생멸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바친 '시간의 주름'을 시각화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두 작가가 성찰한 '시간의 주름'을 보고 듣고 느끼는 공감각적 명상의 자리가 될 것이다.
검은 보라빛 바다의 중심, 그 소멸과 생성의 공간 ● "과실 속에 씨가 있듯이, 태어날 때 우리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씨앗을 우리들 육체의 심지에 박고 태어난다. 생성과 소멸은 경계 없는 동숙자이다. 우리가 청춘으로 불릴 때조차 푸르른 생성의 그늘 속에선 사멸의 씨앗이 은밀히 자라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겐 다섯 살의, 스무 살짜리 청년에겐 스무 살의, 일흔 살 노인에겐 일흔 살의 생성과 소멸이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지향하는 사랑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박범신, 『주름』) ● 『주름』에서 '검은 보라빛'은 남자 주인공을 매혹하는 신비롭지만 치명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검은 보라빛에 매료된 남자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빛을 따라 유랑을 시작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보라빛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암시하듯 결국 남자는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는 죽으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되기를 소망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결국 생성과 소멸은 함께 한다. 안종연은『주름』을 비롯하여 박범신의 소설에서 품고 있는 이미지 보라빛에서 영감을 받아 전체적인 작품톤을 만들어나갔다. 그 가운데 작품 「검은 보라빛 바다의 중심」은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처럼, 때로는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처럼 보라빛 공간을 펼쳐 보인다.
주름을 지우는 시대에 울리는 경종: 오늘을 살아가는 50대들의 이야기 ● 『주름』은 겉으로 보면 50대 남성이 경험한 '극한'의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가정과 사회를 위해 포기한 '등 위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나의 옛 꿈'을 한 두가지씩 품고 있는 50대 가장이 자신의 오랜 꿈 하나를 다시 회수하고자 고군분투 하는 내용이 담긴, 20세기말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슬픈 모더니티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꿈을 되찾기 위해 처음에는 한 여자를 좇아 일상을 송두리째 버렸고 종래엔 성(性)과 사랑, 죽음과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좇아 계속되는 유랑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자유와 유랑의 끝에는 '텅 빈 중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은 나이 드는 것이 두려운 시대이다. 나이듦에 따라 생기는 지혜와 지식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정보화 사회 속에서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자연스럽게 생긴 주름마저 흉이 되어 지운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50대의 남자는 하루 하루가 무기력하고 허무하다.『주름』의 주인공도 매일매일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50대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무난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과감히 버리고 유랑을 떠난다. 60대의 박범신 작가가 만든 평범한 50대 남자의 도발적 선택에 대한 50대 남자 이야기를 50대 여성작가인 안종연이 풀어냈다. 내면의 원숙미는 무시한 채 외모만을 중시하는 사회 현상 속에 50대 60대 두 작가의 '시간의 주름'을 성찰하는 전시는 성(性)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에 녹아있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노동으로 성찰의 공간을 짓는 수행자 ● 안종연은 캔버스를 비롯하여 스테인리스 스틸, 두랄루민, 유리, 돌 등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들까지 두루 작품의 재료로 섭렵한다. 그는 요리사가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서 그에 알맞은 재료를 고르듯 작품을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에 걸맞는 재료를 고른다. 하지만 알맞은 재료의 선택만으로 작가가 원하는 결과물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재료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인데 안종연은 재료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느낌을 뽑아내는데 능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단숨에, 손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종연의 작품은 대부분 혹독하리만치 많은 노동력과 긴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스테인레스 스틸에 점을 찍어 만든 작품은 모교 교수들로부터 "Insane!" 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완성했다. 드릴로 스테인레스 스틸에 수천 수만 번의 점을 찍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작업에 손목이 성치 않지만 한 점 한 점 찍어 완성한 작품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안종연만의 그림이 된다. 오랜 시간 한 점 한 점 찍어 내리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 인내심은 마치 수행자의 자세와도 같다. ● 이번 전시를 계기로 새롭게 만난 재료인 에폭시를 이용한 작업은 맨 아래층의 밑그림과 표면 사이에 상당이 두꺼운 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히 두꺼운 마티에르가 아닌, 밑그림을 그리고 에폭시를 붓고, 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에폭시를 붓고 하는 모든 작업과정을 켜켜이 담은 시간의 흔적이다. 에폭시는 기온과 환경에 예민한 재료기 때문에 같은 중량으로 같은 환경에서 사용하더라도 그때그때 발색이 달라져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하다 보면 이처럼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하지만 안종연은 제대로 작품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하여 작업한다. 이 밖에도 스테인레스 스틸, 유리구슬을 이용한 작업 모두 대단한 노동력과 시간의 결과물 들이다. 새로운 재료와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는 다양한 매체 위에 긴 시간 끈질긴 노동의 손길로 '시간의 주름'을 다채롭게 형상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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