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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8월 18일,서울에서 출발한 서로군은 8월말 전주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도원수 권율,우의정 이덕형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합류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에 이르되
`조선군은 명나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있어서 항명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로군은 전주에서 군을 재편하고
다시 남하하여 남원과 임실 방면을 거쳐
순천로,낙안로,광양로 3개 방면으로 진격하였습니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제독 진린은 수로군을 편성하여
바다로 진격하였습니다.
1598년 9월 15일 수로군은 고금도에서 출항하여
그날 저녁 나로도에 기항하여 3일정도 이순신과 진린이 술을 마시며 머물다가
9월 18일 오후 2시에 출항하여 그날 저녁 방답진에 머물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수로군은 참혹하게 변한 여수의 옛 전라좌수영을 거쳐
계속 항진하였고 밤이 되었어도 달빛을 따라 항해하여 하개도에 정박 하였다가
9월 20일 새벽에 다시 출항하여
그날 아침 8시에 순천 예교성 앞바다의 유도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때 명의 서로군도 왜교성을 포위한 상태였고
왜교성의 적군은 수륙의 조명연합군의 위용에 위축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로군이 도착한 9월 20일,육상에선 재미있는 일이 전개 되고 있었습니다.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애초에 순천 왜교성의 일본군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를
계략을 통해 사로잡고자 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무사히 철수하기 위해서
조선과 명에 강화협상을 주도해야 사람을 자신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고니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가장 먼저 통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함구 하였고
그 것을 알고 있던 유정은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9월 19일,유정은 고니시에게 강화회담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다음날인 9월 20일에 연합군 진영과 왜성의 중간 지점으로
고니시가 오면 유정이 직접 소수의 수행원을 데리고 마중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고니시도 동의 하였고
다음날 아침 고니시는 수행원 몇 명과 호위기병 10여명을 데리고 왜교성을 나왔습니다.
한편 유정은 광양에 주둔한 명군을 동원하여 고니시의 퇴각로를 막게하고
회담 장소 양편에 장사를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은 천총의 복장을 입고 기패관 왕문헌을 제독 유정으로 위장시켰으며
우후 백한남을 도원수 권율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전라도 순찰사 황신이 직접 고니시를 맞이하게 하기로 하되
전서구(신호 알리는 비둘기) 20마리를 동원하여
고니시가 오면 날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니시 일행이 순천과 왜교성의 중간 지점인 해룡창에 이르러
유정과 만나려 할 즈음에
전서구가 약속 시간보다 빨리 날면서
명군이 대포를 쏘았고
매복병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에 고니시는 크게 놀라고 한편으로 사태를 짐작하여 도망쳤으며
일본 구원군이 명 추격군을 저지하여 고니시는 무사히 성안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난리로 강화회담을 위해 마련된 상 위의 고기.면 등의 음식물이
예교성 주위 10리 걸쳐 낭자 하였습니다.
고니시 생포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서로군은 바로 왜교성 바로 앞까지 나아갔고
마침 바다에 수로군이 당도하여 검은 돛을 단 연합 수군의 전함들이
왜교성 앞바다의 유도에 정박하여 전선이 왜성 방향으로 드나들며 포를 쏘니
일본군은 그저 성을 단단히 지킬 뿐 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은 수로군과 달리
서로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9월 21일,서로군의 공세가 미미한 가운데
수로군은 아침부터 바다에서 왜교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수로군은 하루종일 활과 포를 쏘며 싸웠지만 썰물로 인해 성에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남해의 일본군이 작고 가벼운 배로 정찰하러 오자
조선 수군의 허사인 등이 추격하였습니다.
결국 정찰하러 온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버렸으며
조선수군은 적이 버린 배와 각종 물품들을 획득하여 진린에게 주었습니다.
9월 22일,이날도 전날처럼 서로군의 소극적 공세와 수로군의 적극적인 공세가 전개 되었고
이 과정에서 명 수군 유격 계금이 어깨(오른쪽 팔이라고도 합니다.)에 총상을 입었고
명 수군병 11명이 전사 하였으며(혹은 수를 알지 못할 정도라고도 합니다.)
조선 수군도 지세포만호와 옥포만호가 총탄에 맞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9월 23일,지지부진한 공세에 화가 난 진린은
분풀이를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돌렸습니다.
서천 만호,한산대장,홍주대장 등이 곤장 7대를 맞았고
금갑도만호,제포만호,회령포만호 등이 곤장 15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서로군의 유정은 공성전에 필요한 사다리와 기계(운제거) 등을 제작하고
땔감을 수집해야한다는 이유로
공세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6일까지 수로군은 서로군의 공성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렸고
9월 27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는 강한 북서풍과 궂은 날씨로 인해
수로군이 출격 및 함대 운용을 할 수 없었습니다.
9월 30일,저녁에 명나라 유격 왕원주,유격 복승,파총 이천상이 배 100여척을 이끌고
수로군에 합류 하였습니다.
이날 밤 수로군은 등불을 밝혀 수로군의 위용을 일본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0월 1일 새벽,진린은 유정에게 찾아가 수륙 총공격을 의논하였고
다음날인 10월 2일,서로군과 수로군은 총공세를 감행하였습니다.
이날 서로군이 성 밑으로 60보 진격하니
일본군은 격렬히 총을 쏘았고
유정은 깃발을 내리고 독전도 없이 군대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부총병 오광 휘하의 병사들은 유정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명령이 없어서 순거에서 졸았으며
후방에 배치된 군사들도 참호에서 잤습니다.
그 상황에서 열심히 싸우던 수로군도 썰물로 인해 물러갔습니다.
명령이 없어서 성 앞으로 진출한 군대는
반나절 동안 일본군의 사격에 노출 되어 헛되이 죽어갔고
일본군이 밧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가 크게 놀라 100여보 후퇴하여
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은 명군의 사다리를 불태우고 뒤늦게 후퇴하는 서로군을 추격하여
이날 명군 800여명이 전사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정은 이날 진격이나 퇴각의 명령을 전혀 내리지 않고 전투를 방치해두었습니다.
이날 수로군은 아침 6시부터 정오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치뤄
수없이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여 시체들이 해안 언덕 밑에 널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전투에서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을 포함하여
29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 하였으며
제포만호 주의수,사량만호 김성옥,해남현감 류형,진도군수 선의문,강진현감 송상보가
총탄에 맞았습니다.
명군은 수군병 5명이 총탄에 맞아 전사 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0월3일에도 서로군과 수로군은 수륙으로 총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날 수군이 발사한 화포 중 대총이 고니시의 막사를 맞췄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크게 놀라 고니시의 막사가 있는 성 동쪽으로 몰려갔고
상대적으로 성 서쪽의 방비가 허술해졌습니다.
이때 조선군 지휘관 김수가 유정에게 공성을 청했지만
유정은 노기를 띈 표정으로 거절 하였습니다.
이때 성위에 어느 여인이 올라가 서로군을 향해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끝내 유정은 팔짱만 낀채 무시 하였고
서로군은 성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이날밤 진린은 조수가 이로워 싸울만하다고 여겨
유정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야간 총공격을 제의 하였고
유정은 승낙하였습니다.
명 수군을 중심으로 수로군은 초저녁에 왜교성을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왜성위에서 바다로 총포를 쏘며 저항했습니다.
수로군의 장수들과 장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자정때까지 일본군 전선 10여척을 유인하여 격침시켰고
또한 정박되어 있던 일본군 전선들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육상의 서로군은 그저 불만 밝히고
큰소리로 고함만 칠 뿐 이었습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서로군을 무시하고
수로군에게 모든 군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조수가 썰물로 바뀌어 이순신이 퇴각을 명령하였는데
격렬한 포격으로 인해 명령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진린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일본군 전함 소각에 몰두하고 있어서
결국 명 수군은 썰물로 인해 갯벌에 갖히고 말았습니다.
곧 왜성에서 일본군이 쏟아져 내려와서
일본군은 명군의 호선 20척과 사선 19척을 불태우고(혹은 23척,126척이라고도 합니다.)
수많은 명 수군병을 죽이거나 잡았습니다.
이때 명 수군 제독 진린도 배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갯벌엔 이순신이 명 수군을 호위하기 위해 배치한
조선수군 판옥선 7척이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수군이 명 수군을 위기에 방치해 두었다는 책망을 피하기 위해 배치한 함대로서
그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갯벌에 정박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화살로 저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살육당하거나 잡힐 위기에 처했던 명 수군병 140여명이 구출 되었고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판옥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명 수군과 조선 수군 함대는 10월 4일 아침 갯벌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안골포만호 우수가 총탄에 맞았습니다.
10월 4일,서로군은 공세를 중단하였고
수로군은 이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싸웠습니다.
도원수 권율이 유정에게 전투 개시를 요구하였지만 유정을 전투를 명령하지 않았고
진린이 유정에게 직접 찾아가 유정 앞에서 장수 수 자 가 새겨진 깃발을 찟으며 항의하길
`왜 싸우지 않소? 내 심기가 좋지 않으니 보고해야겠소.'
라고 하니
유정은 싸울만한 장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은 성밖으로 나와 마음껏 돌아다니며 서로군을 향해 총을 쏘아댔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어제처럼 모든 군력을 수로군에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수로군의 집요한 공세에 결국 일본군은 성안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이것이 수로군의 마지막 공세이자
사로병진 작전에서 마지막 공세 였습니다.
10월 5일엔 강력한 북서풍이 불어 수로군은 왜교성을 공격하지 못했고
서로군은 아예 전투를 포기한 것 같았습니다.
왜교성의 일본군은 사천신성의 일본군과 봉화로 신호를 주고 받고 있었으며
권율과 이순신은 외부의 일본 지원군에 대비하여
충청도 조선군이 섬진강 방면의 육로를 방비하게 하고
경상우수사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동명이인)의 함대가
노량해협을 지키게끔 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정은 동로군의 패전(1598년 10월 2일 사천신성 전투)소식을 접하였고
마침내 철군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1598년 10월 6일부터 서로군은 왜교성의 포위를 풀기 시작 하였고
밤을 통해 군대를 부유창 방면으로 퇴각시켰습니다.
서로군의 퇴각은 10월 9일까지 진행 되었습니다.
이순신과 진린은 10월 6일에 도원수 권율로부터 서로군의 퇴각 서신을 받고 분개 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과 진린은 유도에 연합수군을 주둔케하여 순천의 일본군 견제하는 한편,
일본군의 퇴각을 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로서 사로병진 작전은 종료 되었습니다.
작전 종료 이후 조선 조정은 사로병진 작전 기간동안의 조선군 피해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결국 정확한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서로군 소속 조선군 피해만 추정 보고 되었는데
전사자 200여명에 부상자 600여명 이었습니다.
명군과 일본군의 피해 역시 정확히 조사되지 않았습니다.
서로군은 퇴각하면서 각종 무기와 군량미 3천여석을
왜교성 인근에 방치하였습니다.
비록 소각명령이 내려졌긴 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왜교성에서 순천에 이르는 서로군 퇴각로엔
서로군이 흘린 쌀알이 길에 낭자하였습니다.
처음 왜교성안의 일본군은 경계하여 성을 나오지 않았지만
서로군이 철수한지 4~5일이 지나자 조심스럽게 나와
서로군이 버리고간 군량미와 무기들을 접수 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천과 왜교성 중간지점의 길에 기마병을 보내
흰 바탕에 붉은 그림을 그려넣은 깃발을 꽃고 돌아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군량과 무기가 부족했었는데 마침
중국과 조선이 이렇게 무기를 주고 군량을 보조해주니
대단히 감사하다.'
그동안 서로군 후방에서는 조선의 노인과 어린이들이
제때에 군량을 보급하기 위해 수레를 끌거나 군량을 짊어지고 운반하고 있었고
폐허더미의 농촌에선 관리들이 전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집에서
군량을 공출하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아 명장님 ㅠ_ㅠ 명작입니다! 크 재밌어요!
저때 푼 삽질의 흙만으로도 판교신도시 재개발사업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진록은알겠는대 3D사진은 뭐죠??
엠파이어즈라고 한국에 많은 애정을 가진 게임 있스빈다.
대단
간만에 보는 이.... 정말 멋지십니다.
이순신 레벨8이라는
오랜만에 제국의명장 님의 걸작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