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40일 동안 순례길에서 느낀 글이란 점을 양지해주기 바란다. 여러 사람이 한 데 자고 먹는 숙소를 택하지 않고 침대 둘에 욕실과 화장실을 갖춘 숙소를 고집하며 레스토랑에서 끼니를 해결한 60대 부부의 여정이란 점도 기억해주기 바란다. 주관적이며 겉핥기로 느낀 것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점도 유념했으면 한다.
생장 피에드 포르를 떠나 피레네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와 론세스바예스부터 죽 도로를 따라 걸으며 느낀 것이 있었다. 차량은 보행자가 나타나면 멈춰 선다. 거의 예외 없이 지켰다. 아주 좋은 운전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비리 알베르게 들어가면서부터 느낀 건데 이 사람들 대화를 시작하면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한낮은 물론 저녁에도 밤에도 심지어 새벽 6시에도 거의 토론 수준의 대화가 끝 없이 이어진다. 새벽이라고 목소리 톤이 낮지도 않았다. 이탈리아 돌로미티에서도 경험했는데 이곳 사람들도 대화를 얘기를 수다를 무척 좋아한다. 커피를 만들면서도 탭으로 맥줏잔을 채울 때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 마르시야 데 라스 물라스 숙소의 주인장은 늘 체크인 할 때 했던 듯 지도 위에 붉은 색 사인펜으로 점과 선, 화살표를 찍어가며 짤막한 영어로 설명하며 우리가 알아듣는지 눈으로 연신 확인했다. 나바라나 라 리오하나 카스티요 이 레온이나 갈리시아나 주를 달리 하면서도 공통적으로 바르에 가면 늘 왁자한 수다가 벌어졌다.
축제도 늘 있었다. 로그로뇨의 숙소에는 새벽 2시나 4시나 5시에도 아이들이 들락거리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기 위해 하루를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팜플로나의 타파스 골목에는 모든 집들이 문전성시, 가게 앞 골목은 늘 사람과 견공들로 북적였다. 노숙자들도 견공들을 데리고 타파스에 맥주를 즐겼고, 남은 타파스를 노숙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안기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성당 앞에는 항상 걸인들이 있었는데 동전 대신 빵이나 음식을 안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 나라라면 노숙이나 구걸을 해도 부끄럽지 않겠다 싶었는데 가톨릭 국가라 그런 것인가 짧게 생각했다.
스페인에서는 거리낌 없이 사람들이 거리나 바르,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이 더 거칠 것 없었다. 개인의 자유를 사회나 다른 사람, 특히 국가가 침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 깊어 보였다. 처음에는 고깝기도 했는데 해롭다며 담뱃갑에 끔찍한 광고를 실으면서도 계속 만들어 내고 세금을 뜯어가는 우리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마을의 숙소에서는 순례객들의 저녁을 제공하면서 주인은 계속 이웃 주민들을, 심지어 큰 덩치의 개까지 자유롭게 레스토랑 안을 돌아다니게 했다. 아마 우리라면 손님 중 한 명이 독하게 별점 테러를 벌일 법한데 그 주인은 이해해주겠지 하면서 거리낌 없이 자기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껄껄껄 웃어댔다. 개인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해선 안된다고 진심으로 믿는 눈치였다.
그러면 마을이나 도시는 어떤가? 제국을 운영했던 나라라 그런지 공원이나 놀이터가 잘 조성돼 있었다. 길에는 타일이 많이 깔려 있는데 공공 근로자는 날이 밝기도 전에 온갖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공공 근로자가 참 많고 다양하며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들이 가는 새벽 바르에서는 늘 왁자했다. 그들이 앉으면 주인은 주문하지 않아도 커피와 맥주를 내왔다. 11시쯤이면 다시 바르에 들르고 점심을 먹고 일하다 시에스타에 쉬다 오후 5시 30분이면 다시 바르에 모여 목을 축이다 가족들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것 같았다. 유제품과 과일 채소 육류가 모두 싸니 그런 생활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작은 도시에 가면 저녁 7시쯤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끄러웠다. 밤 9시까지 타파스 가게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이 시간 아이들은 어느 마을에나 있는 마요르 광장에 나와 공을 차고 놀았다. 영유아들도 유모차에 앉아 저녁을 즐겼다.
수비리 알베르게 건너편 아름다운 별장 주변을 휠체어에 노모를 태우고 산책하는 중년 사내를 본 것으로 시작으로 도시마다 가면 휠체어를 끄는 내 나이 또래나 젊은 친구들을 어김없이 봤다. 처음에는 효자나 친절한 손주라고 생각했는데 볼수록 이런 공공 근로가 있구나 싶었다. 맞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런 모습이 선진국이구나 싶기도 했다. 복지 국가 모델로 북유럽 나라들을 생각했는데 스페인 모델도 꽤 괜찮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 하나는 이 나라 사람들이 3대가 어울려 식사하는 등 저녁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경우 누군가의 생일을 맞아 갖는 시간을 이들은 그저 하루 일과에 지나지 않는구나 싶었다. 숙소 응접실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할머니들도 곧잘 봤다. 교육열이 대단하고 부모 대신 손주 챙기는 문화가 있지만 가만 보면 바르에서도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와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런 끈끈한 가족의 모습이 핵 분열과 단절로 표현되는 우리 네 가족과 대비됐다. 비약하는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감정적인 면에서 닮았다고 여겨지는 스페인 사회와 우리 사회를 비교하는 연구가 있었으면 싶다.
여기에 더해 또 한 가지 그들은 매일 저녁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한 것 같았다. 어느 도시든 꽤 큼직한 서점이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안에서 독서 모임이 저녁마다 열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지붕 투어를 했는데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20여명 가운데 우리 부부 뿐이었다. 영어 해설을 하지 않았다. 작은 성당이나 교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영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 사랑이 이런 서점이나 문방구가 성업 중이게 만드는 원동력이겠다 짐작했다.
어느 저녁이나 동호회 활동에 전념하고 즐기는 세대 간 교류의 문화가 잘 뿌리내려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 점에서 복지 국가 모델로도 스페인은 한국보다 윗길이었다.
난 개인적으로 스페인을 후발 제국주의, 내전과 1차 세계대전 때 잘못 편을 섰고 유대인 박해와 축출에 가담한 범죄 조직으로, 가우디와 바르셀로나의 위대한 유산을 갉아먹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 목축과 낙농으로 힘겨운 나라, 프랑스 포도가 몰살되자 나중에 와인 생산에 뛰어든 후진국으로 여겼는데 실제로 40여일 스페인 북부를 여행하며 상당히 다시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물론 아직도 낙후하고 정비 안된 부분이 있지만 제국을 다스려 본 나라의 자긍심, 종교적 자산의 위대함을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