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라 밥이다 외 2편 / 김영
서울 어느 시장 골목에서 보았다
쟁반마다 밥이며 찌개를 차려
층층이 머리에 올려 이고
혼잡한 사람들 틈을 헤집고 가던
밥의 길을
비켜라, 밥이 간다
아무도 밥을 막는 사람은 없다
뜨거운 첫 숟갈을 위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나물무침과 뜨거운 찌개와
구운 생선을 몇 층씩 머리에 이고도
밥의 길은,
밥의 힘으로 휙휙 지나간다
봐라, 밥은 언제나
저렇게 사람의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그 아슬아슬한 것들
말아먹고 비벼 먹으며
사람들은 틈을 비집고 또 살아간다
가지마다 꽃찌개를 펄펄 끓이는
한여름 배롱나무와
간신히 차린 밥을 엎어질 듯 들고 오는
초가을 코스모스 덕분에
바람이 자라고 들판이 살아났다
비켜라, 하늘에 생채기 내던 구름 같은 인파여
툭하면 밥심을 잊어버리는 인파 같은 구름이여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밥은
시간을 잡히고 간당간당하게 차렸나니
젓가락으로 깨작거리지 마라
남의 밥그릇에 기웃대지 마라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꽃무늬 몸뻬바지를 입고
비켜라, 밥이 삼시 세끼를 향해 간다
뜨끈하고 맵짜한 밥심이 간다
책을 반으로 펼치면
두꺼운 책 한 권을
딱 반으로 펼쳐놓으면
꽤 넓은 들판이 생기고 지평선이 보인다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사이
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그 위에 양 떼를 풀어놓아도 좋고
몇 채의 집을 짓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짓고
울타리를 세우면 좋겠다
울타리의 용도는 옛날에도 망설였고
지금도 망설이는 일이지만
넘어오는 것과 넘어가는 것 중
어느 것을 막는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딱 반으로 펼친 책장에서는 여차하면
다시 접어버리면 되는 일
그러고 보니 움푹한 구릉지대나
큰 강이 흐르는 곳들은
허공이 딱 반으로 접힌 곳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반으로 접힌 책
그쯤 읽으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시시비비도 대충 가려질 만하겠다
딱 반이라는 곳들은 힘이 세다
양쪽으로 나누어 주고도 남는 힘으로
양쪽을 붙잡아 둘 수 있다
책은 그 힘으로 내용을 지탱하고
등장인물들을 끌고 가고
결말을 끝장에 둘 수 있다
두꺼운 책일수록
더 많은 양쪽을 반으로 갖고 있다
나라는 책, 한쪽이 너무 두꺼워졌다
바람의 소속
지느러미들이 숲을 빠져나가고 있다
마치 산란 끝에
모천을 찾는 연어들처럼
산을 넘어가고 있다
지난봄엔 벚꽃 지느러미가
저 산을 넘어와
분분 꽃잎을 날리며 지나갔다
지난여름엔 왕성한 초록 지느러미가
저 고개를 지나 동네 고샅까지 밀물졌다
지금은 가을, 물빛을 바꾼 지느러미들은
온몸을 들썩거리며 숲으로 회귀한다
계절의 모든 것은 바람의 소속이다
벚꽃 지느러미의 방향을 정하거나
초록 손바닥의 그림자를 가르거나
씨앗의 의무를 멀리 나르기도 한다
숲은 바람의 지느러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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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벚꽃 지느러미』, 2022. 7.
김영 : 김제 출생. 1996년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문단 활동 시작.
시집 『파이디아』 『벚꽃 지느러미』 등 5권. 수필집 『쥐코밥상』 외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