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 산악회 6월 산행은 북악구간 한양도성과 인왕산 숲길 트레킹이다. 산행하는 날에는 무슨 약속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여름철에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산행하는 것은 더 운치가 있고 낭만적이다. 그리고 더위를 식혀주어서 더없이 좋다.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경복궁 역내를 통과하여 삼청로를 따라가면 삼청공원이 나온다. 삼청공원은 북악산 기슭에서 삼청천 계곡을 따라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도심 속의 자연 환경이 잘 갖추어진 근린공원이다. 예로부터 삼청이라는 이름 그대로 물이 맑고, 숲이 맑고, 사람의 마음 역시 맑은 곳이라고 하였다.
삼청공원에는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가 있다. 북악산 한양도성을 오르는 코스는 세가지이다. 첫 코스는 삼청공원이나 와룡공원에서 말바위 안내소, 숙정문, 곡장과 백악마루를 지나 창의문에 이르는 코스, 두번째는 홍련사 쉼터로 올라 숙정문과 백악마루를 지나 창의문으로 내려오는 코스, 마지막 코스는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백악마루와 청운대, 곡장을 지나 숙정문에서 홍련사 쉼터로 내려가거나 말바위 쉼터로 내려가는 코스다. 이중에서 가장 힘든 코스는 창의문에서 출발하는 코스다. 이번 산행은 비교적 수월한 첫번째 코스를 택하였다.
삼청공원 입구 정자 부근에서 스트레칭체조를 하고 울창한 삼청공원 숲길 계단을 따라 이동하였다. 말바위를 지나면 말바위 안내소에 도착한다. 말바위는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이곳에서 말을 묶어놓고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쉬던 자리라 하여 말바위라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바위에 벼락이 많이 친다해서 벼락바위라고도 했다. 시계가 양호한 날에는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출입증 표찰을 받고 통과 후에는 한양도성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한양도성은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도성을 쌓은 사람의 지역과 감독관까지 실명으로 적어놓았다. 각자성석이다. 시간의 흐름과 축성기술의 변천과정이 백악산 도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숙정문으로 이동하면 소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일품이었다. 숙정문은 조선시대 대부분 폐쇄되어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은 시체나 죄인을 압송하던 길로 쓰였으며 또 이곳의 문을 열어 두면 한양의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문을 닫아두었다. 그러나 가뭄이 들면 남대문은 닫고 이곳의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 촛대바위가 있다.
촛대를 닲았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으나 광복후에는 제거하였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백악곡성에 이른다. 곡성은 곡장으로도 불리며 성벽의 일부를 둥글게 돌출시켜 쌓은 성을 말한다. 성 밖을 더 잘 살피고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백악곡성에서 북악산 정상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백악산(명승) 조망명소와 청운대가 나온다, 백악산 조망명소는 비구름이 가득하여 관측이 제한되지만 맑은 날에는 예봉산, 검단산, 남한산, 청량산, 롯데월드타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청운대는 한양도성 성곽길 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소나무 세 그루가 운치를 더해준다. 청명한 날에는 경복궁의 신무문과 광화문, 광화문 광장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북한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가깝게 보인다. 청운대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한양도성길은 공사로 인하여 우회가 불가피 하였다. 나무계단을 따라 성 밖으로 나가면 한양도성을 연하여 철책이 이어진다. 과거 33 경비대대에서 경비했던 지역이다. 철책문을 통과하여 산림이 우거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청운대 안내소가 나온다.
청운대 안내소에서 표찰을 반납하고 2번 출입문 산책길을 따라가다가 나무덱 쉼터에서 간식을 서로 나누워 먹었다. 정이 한 뼘 더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목조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토끼굴이 나온다. 토끼굴 위에는 '한양도성 가는길' 이라고 적혀있다. 토끼굴을 빠져나오면 부암동이다. 창의문 앞 교차로에 이르면 창의문로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세검정, 왼쪽으로 가면 청운동,경복궁 방향이다. 청운동 방향으로 가면 창의문이 보인다. 창의문(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를 잇는 성문으로 의를 드러내는 문이다.
창의문 위 문루에는 인조반정공신의 이름이 1등 공신부터 3등 공신까지 나열돼 있다. 창의문은 궁 안과 궁 밖의 경계이다. 인조반정시 능양군(인조)은 병사 700명을 이끌고 창의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진입하여 광해군을 경운궁 석어당에서 무릎끓렸다. 그리고 인조대비의 윤허를 받아 즉조당에서 인조로 즉위하였다. 가슴 아픈 역사의 시작점이 바로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나와 인연이 깊은 문이다. 1972-73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 소대장으로 재직시 소초로 경비하던 구역이었다. 그리고 비봉 수색작전시에는 도보로 통과했던 문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창의문로에서 목조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청운공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표석이 있고 그 앞으로 '서시' 시비가 있다.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가져온 흙 한 줌을 이 언덕에 뿌렸다. 문학관이 자리한 청운동 인왕산 일대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산책을 즐겼던 곳으로 시인의 채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인왕산 숲길((2,5km)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연결된 길로 야자매트와 목재계단으로 이어졌다. 인왕산 숲길을 따라가면 이빨바위가 나온다. 바위가 이빨을 들어낸 채로 있는 모습이 신기하였다.
대금 명인(정약대)와 나막신 전시 모형물을 지나면 가온다리(출렁다리)가 나온다. 가온은 가운데 중심을 뜻한다. 해맞이동산을 지나면 수성동계곡에 다다른다.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휴양을 즐기던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정선이 장동팔경첩의 수성동이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수성동은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인왕산 아래의 첫번째 계곡으로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경치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서촌 옥인길을 따라가면 윤동주 하숙집터를 만난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예전의 집은 사라지고 집터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면 이상의 집이 나온다. 이상(1910-1937)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로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대표작 '날개'가 유명하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서촌 동네는 담배꽁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환경이었다. 이는 선진 시민의식의 발로다. 경복궁역 근처인 적선골 음식문화거리에 위치한 나주곰탕집에서 오찬을 즐겼다.
나주곰탕은 소뼈국물로 탕을 만들어 맛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만단정화를 나누고 경복궁역에서 전철을 타고 각자 둥지로 향했다.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멋진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인간과 모든 생물은 지구상의 자연 생태계에 의존하여 살아왔으며 문화를 계속 발전시켜왔다. 자연의 힘과 신비감을 느끼면서 즐긴 행복한 산행이었으며, 청량한 공기와 피톤치드향을 맡으며 걸으니 더 건강하고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건강할 때 산행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은 인류에게 무한한 기쁨을 선사한다.
전인구 동기생은 산행할 때 맨발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항암, 항산화 효과는 물론이고 만병통치라고 자부하고 있다. 김홍찬 회장 덕분에 동기생들과 함께 자연을 벗삼아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되어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말바위로 향하는 도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