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로
지난해 연말 김해 진영에서 부산 기장 간 부산외곽순환고속도가 개통했다. 지상 구간보다 터널과 교량 구간이 더 많은 고속도로 가운데 하나다. 금정산 지하 구간은 KTX터널과는 십자형으로 걸쳐 지나지 싶다. 김해 대동에서 부산 금곡에는 낙동강을 건너는 사장교 낙동대교는 휘어진 주탑이 특이한 모양이다. 김해 대동에는 낙동강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김해금관가야휴게소가 있다.
내가 차량을 소유하지도 운전을 하지 않음에도 낙동대교 외양이나 금관가야휴게소를 잘 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연말 직원 회식으로 기장으로 대게를 먹으러 가면서 그 길을 오간 적 있다만 그것만은 아니다. 나는 경전철로 등구역에서 대동 강변으로 나가 상동까지 걸으면서 멋진 휴게소와 다리가 건설되는 현장을 지나쳤다. 물금에서 화명으로 걸으면서도 그걸 보았다.
김해의 옛 이름이 가락국이고 달리 가야국이다. 그곳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가야 왕도’라고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에 더해진 당당한 사국시대 고대 왕국의 한 축이 금관가야다. 초겨울 한파가 매섭게 찾아온 십이월 둘째 일요일이다. 날씨가 추워 즐겨가는 산행은 마음을 접고 산책을 나선 걸음이 가야 왕도로 향하려고 창원대 삼거리에서 98번 버스를 기다렸다.
김해 선암에서 장유를 거쳐 창원대까지 오가는 좌석버스다. 97번은 창원시내로 들어와 법원 앞을 거쳐서 창원대학으로 가고 98번은 시청 로터리를 돌아 창원대학으로 간다. 창원대 삼거리에서 98번을 탔더니 시청 앞을 지나 남산동 시외버스정류소를 지났다. 창원터널을 지나 대청계곡을 거쳐 김해 시내로 들어갔다. 도서관 앞에서 내려 반나절 산책 기점으로 봉황동 유적지로 올랐다.
우리나라 유물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국보와 보물 외에 사적도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사적이란 역사와 학술과 관상과 예술의 가치가 큰 것으로 국가가 법으로 지정한 문화재다. 우리나라 사적 1호가 경주 남산 기슭 포석정지다. 사적 2호가 내가 찾아간 김해 봉황동 유적지다. 봉황대는 인근 회현리 조개무지와 금관가야 최대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어우러진 곳이다.
봉황대 산책로는 개보수 하느라 정비 중에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내말고 산책을 나선 이는 고작 둘이 보였다. 가락국 천제단으로 오르니 덩그런 황세바위가 나타났다. 봉황대 황세바위는 가락국 9대 겸지왕 시절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사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현장이다. 봉황대 남쪽 기슭엔 진주 남강 논개 사당과 밀양 남천강 아랑각처럼 후대에 여의각을 세워 고혼을 달래주었다.
여의각에서 선사유적으로 복원해둔 고상가옥을 지나 회현리 패총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최근까지 다층적으로 선사유적이 발굴된 현장이었다. 지금의 김해 시내 택지는 예전 바닷가로 짐작되었다.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은 거기서 화덕에 불을 피우고 조개도 까먹고 껍질을 버렸던 장소였다. 패총은 오늘날로 치면 당시의 생활쓰레기 매립장이었다.
회현리 패총에서 되돌아 나와 수로왕릉으로 향했다. 날씨가 춥기도 했고 이른 시각이라 답사를 나선 이는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여대생 한 명만이 보였다. 미로와 같은 전각을 지나 수로왕릉 앞으로 갔다. 왕릉은 산중이나 비탈이 아닌 드물게 평지였다. 커다란 무덤 앞에는 몇 마리 양과 문무 석상이 버티고 있었다. 왕릉 뒤는 노거수가 에워쌌다. 시든 진디에 파란 하늘이 대조되었다.
수로왕릉에서 골목길을 따라 동상동 재래시장으로 가봤다. 날씨가 추운 아침나절이라 시장은 아직 활기가 차지 않았다. 경기 안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붐비는 다문화거리였다. 상호 간판들도 외국어였고 식료품들도 토종과는 달라 낯설기만 했다. 일요일이라 피부색과 말씨가 다른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진 재래시장이었다. 18.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