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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루카 17,26-37
왜 내 주위엔 유독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만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물속에 빠진 이들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로 가고 땅에 집착하는 사람은 땅으로 갑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노아의 홍수와 비슷한 내용으로 롯의 아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소돔에 두고 온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유황불로 온 소돔 땅이 멸망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지 말라고 하시는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되자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더 이상 천사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만으로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이유는 목숨을 지켜줄 이가 옆에 없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는 심판의 기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뜻입니다. 같이 침상에 있어도, 같이 맷돌질해도
행위로는 그 사람을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자신을 지켜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세상 것에 집착하느냐, 다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독수리는 시체를 뜯어먹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를 부르는 존재는 시체 자체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독수리는 달려들 수 없습니다.
자칫 자신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왜 내 주위엔 나에게 도움 되는 사람은 없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만 있을까?”
라고 한탄합니다.
안타깝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퀸의 보컬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명성을 얻자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팀원들을 저버리고 혼자 솔로 앨범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그를 병들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잘못 가고 있었음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썩었다. 그래서 주위에 날파리들이 많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있다면 사람들은 또 돌을 던집니다.
그 집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내가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던지는 상처들이 금방 치유되고 있음을 보고는 그 안에 강한 주인을 모시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미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오드리 햅번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나이도 많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배우 멜 페러란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남편을 위한 배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촬영장에 나타나 허드렛일하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흥행 보증수표였던 그녀는 남편이 출연하는 별로 인기도 없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하게 합니다.
물론 남편이 연출한 형편없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여 최초로 흥행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겐 오래전부터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이혼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임신하여 남편을 잡아두려 했지만, 남편이 자녀를
원하지도 않고 결국 영화 찍다가 낙마하여 유산되고 맙니다.
그런 아내를 돌보지도 않고 오직 돈과 재산만을 바라는 남편과의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14년 만에 이혼하고 맙니다.
둘째 남편은 이탈리아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여행 중 우연히 만난 그 사람과 또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도 역시 바람둥이였습니다.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신문에서 보고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원만치 못했던 것일까요? 바람둥이만 남편으로 맞아들였던 것일까요?
남편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오드리 헵번 역시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겐 ‘배고픔’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녀가 6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가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라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 이후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드리 햅번은 나치 시절에 길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부재는 엄청난 상처였습니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세상 것에 얽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 떼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부와 명성, 아름다운 여성성을 노렸습니다.
그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독수리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로마군대를 상징합니다.
로마군대의 상징이 독수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자기가 쓰려고 얼마간을 남겨 숨겨 두었습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그의 행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의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는 흔들거리며 냄새를 풍겼습니다.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고기를 노리고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이내 그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달린 고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차 없이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짐승들은 자신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이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한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오드리 햅번은 두 번의 결혼 실패를 두고 더는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에게 초콜릿과 식량원조를 해 주었던 미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를 자처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가 된 것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들어 동물들을 태우게 되는 삶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면 주위에
점점 천상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안 좋은 이들에게 둘러싸이는 이유는 내가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은 내 안에 하늘에서 오신 분을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상처가 금방 치유되는 사람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이 믿음은 누구도 나에게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복음 : 루카 17, 26 - 37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합시다!
로마 유학 시절,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로 소풍을 자주 갔었습니다.
구 도시 유적지의 역사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폐허 사이를 산책하고 있노라면 아주 좋은 하루 피정이 되곤 했습니다.
자주 가다 보니 나중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폼페이 가이드 역할도 몇 번 했었습니다.
폼페이는 대도시 나폴리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잘 나가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9년경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의 강력한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매몰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폼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엄청난 화산재에 순식간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정지되어버렸습니다.
일하다가, 잠자다가, 식사를 하다가, 고기를 자르다가, 별의 별 짓을 다 하다가 그 상태 그대로 멈춰 화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죄와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도 폼페이와 흡사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계명을 무시하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주님께서는 엄청난 양의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습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사람은 물론 모든 가축들, 생명체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려 형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소돔과 고모라 시민들은 단체로 제삿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단 그 도시 안에 유일한 의인이었던 롯과 그 가족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탓에 살아서 빠져나왔습니다.
일말의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정(不淨)한 도시, 타락한 도시, 짐승들의 도시, 죽음의 도시에서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갔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면, 비정상 집단이라고 여겨진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 빠져나와서 주님께서 운행하시는 생명의 배, 구원의 배 위로 재빠르게 승선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인간 존재 자체가 늘 나약하고 부족하기에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탄 배는 자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칩니다.
높은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안전한 배에 올라타 있는지? 집단적 멸망을 향해 가는 죽음의 배에 타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께서 늘 거처하시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고 있는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과 죽음의 사이비 종교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요즘 집단들의 특징은 대단한 고단수라는 것입니다.
던지는 미끼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릅니다.
어쩌다 실수로 덜컥 미끼를 무는 순간, 그걸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 우리의 인생 전체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나름 가방끈 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그래도 한때 잘 나갔다며 으쓱대는 사람들, 썩은 동아줄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잡고 있는 사람들, 빨리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길 희망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강론>
(2024. 11. 15. 금)(루카 17,26-37)
<평온한 일상생활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26-35).”
1)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는, 인간 세상의 ‘평온한 일상생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평온한 일상생활에 만족하면서, 방심하고 자만심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입니다.
그런 일들 자체가 죄는 아닌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생활이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그 방심과 자만심이 죄로 이어집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노아 때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모습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1테살 5,2-3).”
그렇다고 해서 항상 두려워하고, 겁먹고, 긴장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8-9).”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평소에 꾸준히, 흔들림 없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것이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은 흔히 “오늘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일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종말이든지 개인의 임종이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2)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마라. 뒤로 돌아서지 마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라는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여기서 ‘지나가다.’는 ‘허무하게 사라지다.’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소유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만 원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도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경우에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현세적인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는,
“허무한 것들은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한테 발목을 잡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3)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인데, 예수님께서는 “부부라고 해도 심판 때에 갈라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이, 또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배우자 덕분에 공짜로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거나 자매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고,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식구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도 회개와 신앙생활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를 무력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셔도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